인공지능이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면

잡설 | 2018. 3. 4. 22:25
Posted by 메가퍼세크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지능이라는 능력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넓어지고,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부분들에 대한 인공지능의 수행 능력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 인류 최고의 바둑 기사가 인공지능 앞에서 무릎꿇는 것을 목도한 사람들이 미래의 인공지능이 정복할 영역들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뛰어난 능력의 로봇으로 인한 대규모의 일자리 소멸과 제 2의 러다이트 운동에서부터 자신보다 바둑도 못 두는 인간에게 반기를 든 로봇의 반란, 로봇을 통해 한층 더 효율적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테러 조직과 군대에 대한 우려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는 데 있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정작 그런 상상들 중 어떤 것이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한 고찰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개인적으로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잘 언급되지 않는 한 시나리오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스스로 이루어낸 성취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의 복잡한 내면, 외면적 가치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해낸 "예술"이라고 불리는 영역이다. 작게는 한 인간의 삶에서, 크게는 사회나 국가에 걸친 거시적인 주제들을 다루기도 하는 이 영역은 모든 문화권과 지역과 시대에 걸쳐 언제나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간 지능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정수이자 단순한 실용적 사고와 계산적 능력으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냉정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과연 예술이라는 영역은 다른 지능적 행동들과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을까? 베토벤의 음악과 톨스토이의 소설은 이성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어떤 번뜩이는 것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적 창조성이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가장 단순한 관념은, 예컨대 오선지 몇백 줄에 음표를 채워넣을 수 있는 천문학적 가짓수를 이성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논리에 기인한다. 인간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가능성의 바다에서 듣거나 보기 좋은 무언가를 '창조'해 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에 입각하지 않은 새로운 차원의 능력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듣거나 보기 좋은" 이라는 조건이 이성적으로 계산해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해야 할 것은, 이 전제가 과연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인공지능 분야의 눈부신 발전은 "아니"라는 답변의 설득력을 급속하게 올리고 있다. 당장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서 가장 좋은 수를 찾아낸 알파고의 사례가 가장 큰 반증이다. 딥 러닝의 알고리즘은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서 가장 기준에 부합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모든 경우를 탐색하는 대신 몇 가지 가능성에서 시작해서 조금 더 그 기준을 잘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최적의 가능성에 해당하는 점들을 빠르게 찾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알고리즘들이 예술 영역에 적용되는 것도 결국 시간의 문제가 아닐까. 인간이 청각으로 느끼는 감각과 취향의 기준 함수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오선지의 가능성 공간에서 딥 러닝을 수행하면 인간이 "듣기 좋은" 음악의 가능성의 점(=걸작)들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진다면, 즉 인공 지능의 예술적 능력이 인간을 초월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적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은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에 비해 소수에게만 주어지고, 그렇기에 하나의 예술 작품은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무난한 취향과 감각의 기준 함수를 만족하는 선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딥 러닝으로 자기 집에서 예술 작품을 즐길 수 있다면, 오직 한 사람만의 기준 함수에 맞추어 그 사람에게 가장 재미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걸작"의 의미는 어떻게 될까.


또한, 인공 지능의 창작 능력을 이용해 언제든 "보고 싶은" 스타일의 예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완결되었거나 작가의 절필로 더 이상 후속작을 볼 수 없는 작품이 있다면, 그 작품의 스타일을 모두 입력하고 다음 시리즈를 뽑아내면 된다. 예컨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코난 도일의 스타일을 완벽히 모방한 주문제작 홈즈 시리즈를 영원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상황일 수도 있고, 예술에 종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악몽과 같은 상황일 수도 있겠다. 좋게 생각하면 누구나 자기 취향을 만족시키며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나쁘게 생각하면 모두가 자신만의 취향에 빠져 소통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생각하는 예술이라는 개념이 아주 큰 변화를 겪게 되리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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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입문기.

취미/기타 | 2017. 12. 26. 22:03
Posted by 메가퍼세크

차를 마시기 시작한 지도, 꽤 된 것 같다.


처음으로 티백을 샀던 시점으로부터 계산하면 3년 남짓, 처음으로 찻잎을 산 때부터는 2년 정도. 차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 입장에서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일 수 있겠지만, 정말로 문외한이었던 시절부터 생각하면 나름대로 제법 많은 단계들을 거쳐왔다고 생각한다. 그 소박한 과정과 행복들을 언젠가 잊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안타까움이 남아, 짧은 글로나마 기억을 정리해 보려 한다.


처음으로 홍차라는 음료의 매력을 알게 된 계기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된 홍대의 한 찻집. 커피를 주로 하는 일반적인 카페가 아니라, 정말로 차만을 주 메뉴로 내놓는 '찻집' 이었다. 그동안 대충 우려낸 립톤 티백밖에 몰랐던 입장에서는 온갖 찻잎의 이름과 특징들이 적힌 메뉴판만으로도 신기했는데, 사진에서나 볼 법한 하얀 찻주전자와 찻잔, 보온을 위한 천 덮개까지 딸려나오는 디테일함이 참 인상깊었다. 그 때 마셨던 차는 '웨딩 임페리얼' 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찻잔에 따르자마자 확 풍기는 진한 향기와 은은한 맛, 곁들여 먹었던 스콘의 맛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완벽하게 만족스러웠다. '몇 잔이라도 끝없이 마시고 싶다' 는 생각에서부터 '그동안 왜 이런 걸 몰랐을까' 라는 후회, '앞으로 살면서 이런 걸 계속 마실 수 있다면, 인생이란 건 꽤 살 만한 게 아닐까' 라는 감정까지도 이끌어낼 정도로, 살면서 느꼈던 가장 깊고 진실한 만족의 순간 중 하나였다.


그 짧은 만족의 순간을 재현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지만 본격적인 찻잎은 생각보다 너무 양이 많았고, 몇 번 마시고 내팽개치는 애물단지가 될까 싶어 근처 마트에서 산 얼그레이 티백 한 통이 내가 스스로 구입한 첫 홍차였다. 비록 크게 비싼 티백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느꼈던 만족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은 상당히 뿌듯했고, 나름대로 우리는 시간도 바꿔보고 어울리는 과자도 찾아가면서 생각보다 빠르게 새로운 취미에 익숙해졌다. 마침 그 즈음에 사는 곳도 바뀌고 취업 비슷한 것도 해서, 기념삼아 처음으로 진짜 잎차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구입했던 브랜드, 트와이닝스.>


그저 처음에는 클래식한 게 좋겠지 싶어 트와이닝스라는 브랜드의 다즐링(왼쪽)을 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홍차의 강한 향에 매료된 초보자에게 다즐링의 향은 너무 은은했고, 언뜻 녹차와도 비슷한 그 느낌에 익숙해지기는 쉽지 않았다. 산 지 한 달 남짓은 의욕적으로 마시다가 어느새 잊어버리고, 몇 달간 방치해두다가 밀크티 시도해본다고 좀 마시고, 홍차시럽 시도해본다고 또 손대고... 그러다 보니 결국 다 마시는 데 한 일 년은 걸린 것 같다.


그래도 찻잎 한 통을 비웠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하얀 본차이나 다구들과 함께 산 게 오른쪽의 레이디그레이. 트와이닝스의 대표적인 상품이고, 초심자에게 추천한다는 리뷰를 보고 덜컥 질렀는데 상당히 괜찮았다. 조금 연하고 녹차같은 느낌이 났던 다즐링에 비해, 레몬처럼 상큼한 향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섞여 묘한 조화를 이루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은 쉽게 지루해지는 생물인 탓인지, 아무리 좋은 향이라도 매일같이 하나만 마시다 보면 물리기 십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얼마 안 되는 인내심이 지름신의 유혹에 순식간에 패퇴하고 통장 잔고의 숫자 몇 개를 바꿔놓은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수순과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자낫-노르망디 뽐므>(왼쪽)

<티센터 스톡홀름 블렌드>(오른쪽)

<꽁뜨와 프랑세 뒤 떼-떼 드 리베흐>(아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나가면 안 되겠지 싶어 세 통으로 제한을 걸고, 다양한 향을 맛보고 싶었으니 최대한 느낌이 다른 것으로, 그러면서도 하나하나의 느낌이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걸고 쇼핑몰을 뒤지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그런 과정조차도 사실은 꽤 마음에 들었다고도 할까. 찻잎의 향과 느낌에 대한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과 묘사를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수행한 끝에 찾은 최적의 답이, 이 세 종류의 찻잎이었다.


먼저 사과를 뜻하는 '뽐므' 라는 이름이 붙은 첫번째 차는, 숯덩이같이 검은 색의 찻잎과 그에 걸맞은 강력한 떫은 맛, 뭔가 약재 냄새 같으면서도 곰곰히 짚어보면 사과의 느낌이 나는 독특한 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차들과 비슷한 시간을 우려도 월등히 떫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짧은 시간을 우리면 향이 충분히 우러나오지 않아, 초 단위의 정확한 시간 조절을 필요로 하는 상당히 고난이도의 잎이었다.


하지만 그런 높은 난이도와 성공했을 때의 중후하면서도 달작지근한 향은 열정에 불타는 초보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도전 과제가 되었고, 실수로 떫게 우려져도 커버할 수 있는 단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집어들게 되곤 하는 차였다.


두 번째, '티센터 스톡홀름 블렌드' 는 대중적으로 꽤 인기가 많은 것 같았는데, 올록볼록한 요철과 함께 세심하게 디자인된 차 용기도 그렇고, 홍차 특유의 따뜻한 느낌과 레이디그레이를 닮은 시트러스의 시원한 향, 그리고 그 둘을 이어주는 이름 모를 보라색 느낌의 향으로 이루어진 완성도 높은 향의 스펙트럼, 그리고 다른 차보다 조금 더 우려도 그렇게 떫지 않은 부드러움을 가진 붙임성 있는 찻잎이었다.


크게 신경쓰지 않고 가벼운 느낌으로 차를 마시고 싶을 때, 너무 가라앉은 마음을 조금 편하게 놓아주고 싶을 때, 그리고 홍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처음 대접하고 싶을 때 안성맞춤인, 보편적이고 편안한 느낌이라고 하면 딱 맞을 것 같다.


마지막 차 '떼 드 리베흐' 는 프랑스어로 '겨울의 차' 라는 뜻인데, 그 이름처럼 따뜻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조금 밝은 갈색을 떠올리게 하는 향을 가지고 있었다. 스톡홀름 블렌드와 같은 상큼한 느낌은 없지만 완만하게 풍겨져 오는 따뜻함과 그 사이사이 풍겨오는 고풍스럽고 깊은 향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진 세 종류의 차를 차례로 즐기는 경험은 어느덧 하루에 한 번씩 맡는 향과 목을 넘어가는 따뜻한 액체의 느낌에 익숙해지게 만들었고, 그렇게 형성된 나의 작은 의식은 이윽고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의 일부가 되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삶의 낙 중 하나가 되었다. 언젠가 무슨 이유로든 이런 느낌과 감정을 잃어버리고 다른 취미로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해도,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개척한 이 작은 즐거움에 대한 기억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오래도록 곱씹을 수 있는 한 조각으로 남아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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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문제 해결

자아성찰/가치관 | 2017. 12. 25. 21:53
Posted by 메가퍼세크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부쩍 싸움이 늘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할 일 없는 어그로꾼들과 더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싸움은 새삼스레 언급할 만큼 특별한 것도 아니고, 만연하다 못해 이제는 당연한 풍경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지만, 언젠가부터 그와 조금은 다른 성격의 싸움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베와 메갈리아, 워마드, 급진적 동성애자 집단과 그 외 별별 욕먹을 만한 일을 하는 집단들에 대한 다수의 가열찬 비난을 주제로 일종의 '흐름' 이 만들어지고, 그 흐름의 방향에 부합하는 글들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상에 대한 분노를 공유하며 서로를 증폭시키고 뒷받침해 주며, 가끔 나타나는 해당 집단의 어그로들이 그 흐름에 기름을 붓는, 그런 종류의 싸움.


물론 대부분의 경우 비난받는 대상에 대한 검증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고, 그 나름의 조사와 논리를 통해 대상을 까야 할 이유는 꽤 확실해져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투기장에서 안심하고 대상에게 맹공을 퍼붓는 사람들의 논리와 문체를 보면, 그런 싸움의 목적이 까는 대상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해결점 모색 따위에 있지 않다는 것쯤은 누구라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인정할 만큼 사악하고, 아무리 욕해도 부족함이 없는 대상에 대한 목적 없는 분노의 표출, 조금 논지를 벗어나거나 성급한 연좌제를 적용해도 눈감아 주는 같은 편들 사이에서 느끼는 소속감과 자신이 나름대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편에 서 있다는 약간의 자부심이, 이런 가열찬 공격의 근본적인 목적과 동기이자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이런 거대하고 맹렬한 분노의 원천에 대한 성급한 추측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런 흐름이 맺을 결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고, 그에 대한 한 가지 답은 뜻밖에도 이 글의 세 번째 문단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정부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해 노무현과 그에 관련된 것들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로 전이된 일베, 여성이 겪는 아픔에 대한 몇 가지 타당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한국 남자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로 썩어버린 메갈리아와 워마드, 차별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해 오히려 거부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일부 게이 집단까지, 내부에서 계속 휘감아 돌다 결국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분노는 암세포와 같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에 대한 분노가 다시 소용돌이치는 이런 상황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맹목적인 분노의 흐름은 정작 그 분노의 대상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일차원적인 대응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고, 당장 눈에 보이는 분노의 대상과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크게 분리되어 있기 마련이다. 당장 메갈리아의 사례를 봐도,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어려움의 근원을 해결하기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한남' 이라는 명확한 목표에 대한 증오에 집중했지만, 그게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에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되었을까? 오히려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은 남자들의 분노를 불러,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 약화에나 크게 기여했을 뿐이다.


물론, 분노라는 감정 자체는 아래 글에서 언급했듯 문제 해결의 중요한 원동력이 될 수 있지만 그런 힘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분노를 벗어난 조금 더 넓은 시야와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핵심적인 요소들이 동반되지 않은 분노는 단지 찻잔 속의 태풍에서 그치거나, 가끔은 계속 돌다 썩어버려 또다른 괴물이 되는 결과만을 낳을 뿐. 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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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

자아성찰/가치관 | 2017. 9. 11. 21:23
Posted by 메가퍼세크

누구나, 살면서 많은 문제들을 마주하게 된다.


학교에서 푸는 좁은 의미의 문제 뿐 아니라 대인관계, 조직관리, 거시적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의견 수렴 과정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셀 수도 없이 많고도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런 문제들의 극히 일부는 짧은 시간 안에 풀 수 있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푸는 데 어떤 형태로든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고, 또 어떤 문제들은 평생에 걸친 노력에도 풀리지 않곤 한다. 특히 정해진 답이 없는 종류의 문제들이 그렇다. 어째서 대부분의 문제들은 풀기 어려울까?


내 생각은 이렇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이 문제를 풀어보고 싶다' 라는 감정에 의해 일어나고, 문제 해결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에너지도 역시 감정에서 유래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과정에서는 철저한 이성적 사고가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감정에 의한 문제 인식의 과정에서 올바른 시기에 이성에 의한 문제 해결로 넘어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전환 자체도 어려울 뿐더러 전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감정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과정에서 문제 해결의 동기가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한 가지 감정에 의해 조종사가 되고 싶다는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종사가 되기 위한 과정에 대하여 열심히 조사하고, 공군 사관학교와 같은 기관에 들어가 구체적인 비행기 조종 스킬들을 배우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 나간 원동력은 열정이지만, 그 열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계기판을 외우고 조작 방법들을 익히며 힘든 체력 훈련을 통과하는 구체적이고 이성적인 해결 과정이 필요하다. 결국, 이 사람은 '하늘을 난다' 는 감정적인 목표를 위해서 감정을 죽이고 효율적으로 하늘을 나는 방법을 배우는 이성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잘 알듯 그런 구체적인 접근 과정은 문제 해결을 위한 초기의 감정적 동기를 꾸준히 소모시키고 저해하기 마련이고, 결국 동기를 모두 상실하고 문제 해결을 포기하거나 원래의 동기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문제만 해결하는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문제 해결에 다수의 힘을 필요로 할 때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는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문제에 대한 감정적인 인식에서 이성적인 해결책으로 올바르게 넘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주변을 둘러봐도, 정치나 사회와 같은 거시적 문제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아도 실질적 해결을 모색하는 사람은 적지 않은가?


이런 경우 문제 해결을 원하는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의 단게로 나뉜다.


첫번째는, 오직 감정적인 시각만으로 문제 해결에 골몰하는 경우. 이는 일부 사람들의 문제 해결 의지를 고취시킬 수는 있지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책에 도달하도록 유도하거나, 때로는 완전히 틀린 방향으로 군중을 이끌기도 한다.


두번째는,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전적으로 이성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경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적 접근을 혐오하며, 이성적인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성향이다. 이들은 첫번째 단계보다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높지만, 사람들의 감정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문제 해결의 동기와 의지를 저해하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 단계는 사람들의 감정적인 측면에 충분히 공감하며 문제 해결의 원동력을 유지하고, 이성적이고 본질적인 해결책의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유도하여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이 세 단계는 불을 이용해 요리를 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사람들의 감정은 불에 해당하고 이성은 그 불을 이용해 요리를 하는 능력이다. 감정만이 앞선 집단은 강력한 화력을 가지지만 요령이 없어 요리의 겉만 태워먹기 십상이고, 이성만이 앞선 집단은 뛰어난 요리 실력이 있지만 화력이 부족해 결과를 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능력이 모두 필요하고, 따라서 세 단계의 사람들의 비율 또한 적당히 유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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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 대한 생각.

잡설 | 2017. 8. 2. 08:17
Posted by 메가퍼세크

2016년 3월, 구글의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는 이세돌을 4:1로 이겼고

2017년 5월에는 커제를 3:0으로 이기고

그 직후, 자가 대국의 기보 50국을 공개해서 바둑의 역사를 뒤집어놓았다.


수십 년 동안 몸을 바쳐 연구해왔던 성과가 하루아침에 날아간 바둑 기사들의 좌절도 상당하겠지만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인류의 바둑 지식과,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인류의 추리 능력의 일각이 정복당한 것에 비하면 오히려 사소한 충격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다행히, 이런 일이 완전히 처음인 것은 아니다. 주먹도끼의 발명에서부터 계산기와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항상 도구를 사용해 자신의 능력을 보충해 왔고, 그 도구의 능력이 자신을 아득히 추월하는 경험은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도 기중기의 힘을 이길 수는 없고, 수십 년 동안 직물을 짜온 사람도 기계보다 빠르게 직물을 만들 수는 없으며, 사칙연산이 아무리 빨라도 컴퓨터나 계산기 안에서 오가는 전류의 속도보다 빠를 수는 없다. 도구가 인간의 능력을 앞지를 때마다 문명은 크게 발전했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의 재능과 능력이 쓸모없는 것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자존심의 소멸보다 이번 사건이 더 충격적인 것은, 이번에 추월당한 능력에 인간의 가장 큰 자존심과 자부심이 걸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부터 대부분의 동물보다 느리고, 힘도 약하고, 민첩하지도 못한 약한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힘이나 속도에 대한 집착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지만, 그런 약한 동물이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게 해 준 두뇌의 지능과 문제 해결 능력은 절대 추월당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물론 계산기나 컴퓨터는 그런 능력의 지엽적인 부분을 더욱 수월하게 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문제 해결의 핵심적인 부분을 인간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인간이 관측 가능한 우주에 대한 어느 정도 광범위한 탐사에서도 지능은 발견되지 않았고, 고도의 지능이라는 것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하게 인간에게만 주어진 대단한 능력이라는 허영 섞인 의식이 자리잡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그 지구상에서 독보적인(이었던) 문제 해결 능력의 한 영역에서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기계에게 더없이 완벽하게 패배했고, 심지어 자신이 수백 년 동안 연구한 모든 것(포석과 정석)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들을 발견해 버렸으니... 인간의 가장 큰 자존심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가 남아 버렸다.


물론 아직 이 상처를 축소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취는 인간의 손으로 그 목표를 한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학습시켰기에 가능했던 것이므로. 인간의 자존심을 긁어버린 이 우월한 동물은 인간의 손으로 키워진 가축일 뿐이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목표를 설정하는' 능력조차도 인공지능의 것이 된다면, 과연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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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함이라는 것.

자아성찰/가치관 | 2016. 10. 24. 17:24
Posted by 메가퍼세크

대학교에 다닐 때, 토론 수업 중 상대편을 화나게 한 적이 있었다.


'인간은 이타적일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찬성과 반대 측으로 나뉘어 서로 주장을 펼치고 있었는데, 반대 측에 있었던 내가 그 즈음 일어났던 아이티 지진 사태를 주제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이티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직접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돕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구 반대편인 이곳에서 비싼 비행기 표값을 감수하며 날아가 얼마 안 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보다 그 돈을 직접 기부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람들이 타인을 도울 때 효율적인 방법보다 자신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이타적일 수 없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아닌가?"


벌써 꽤나 오래된 일이지만, 그 일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평소 봉사활동을 하던 상대편 토론자의 진심으로 빡친 표정과, 그 때의 내 말 속에 '선함' 이라는 개념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인식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어렸을 때, 아마 선함이라는 개념을 처음 인지했을 때부터, 나는 그 개념이 정말 불완전하고 애매함 투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애초에 아이들에게 선함을 가르치기 위한 교본으로 주로 사용되는 동화나 위인전에서부터, 그 개념의 모순은 도저히 숨길 수 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난하고 힘없거나 성실하며 순박한 것으로 그려지는 선한 등장인물과 못생기고 탐욕적이며 강한 힘을 가진 악한 등장인물의 대립 구도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작위적이었고, 두루뭉실하게 무조건 착한 것으로 기술되던 선역들이 결말에 가서는 악역들이 그들의 행동에 대한 '업보' 를 받도록 방치하는 권선징악의 스토리라인 또한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과 악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결국 세상을 '착함'과 '악함' 이라는 두 편으로 가르고 한 편의 행동양식을 따라 살면 상을 받고 다른 편으로 살면 벌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예언으로 보였고, 그런 예언은 결국 한쪽 편에 대한 피해의식과 증오에 가득찬 푸념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선함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성실함과 끈기, 이타심과 겸손함 같은 특질들은 내 관점에서도 제법 일리있고 괜찮다고 생각되어, 어느 순간부터 선함이라는 개념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의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단순히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선함이 아닌, 나 자신이 한 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할 수 있는 확실하고 당당한 기준을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그 첫 걸음으로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타성의 문제였다. 내 이익에 관계없이 누군가를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선의 개념이지만, 과연 정말로 그런 것이 가능할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결국 사람의 행동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행동으로부터 얻거나 잃을 것에 대한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타적인 행동의 결정 또한 결국 이런 매커니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행이라면 타인에게 나의 선함을 보이고 싶다는 욕구의 발현일 수 있고, 완전히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행이라도 '선행을 했다' 는 사실에 대한 자기만족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무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선행을 수행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행동의 동기는 '그 큰 고통과 손해보다 이 행동의 가치가 크다' 는 계산에 기반하지 않는가.


이런저런 생각의 흐름의 끝에 도달한 결론은, 선함과 악함이란 결국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의 리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을 구해서 얻을 수 있는 자신의 만족감이,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위험성에 비해 크다고 판단되었을 때 행하는 행동일 뿐. 구하지 않는 것도 단지 그 반대의 경우일 뿐.


물론 그런 계산의 기준들은 사회적인 선함의 기준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 영향을 합쳐 자신이 수립한 기준들에 따라 계산을 수행할 것이다. 단지 나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 그런 관념과 당위성에 의거하고 있다고 말하기보다 그저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는 좀더 솔직한 기준들에 의거하는 것이 좀 더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곤란해하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과, 차가 오랫동안 오지 않는 횡단보도를 빨간불에 건너는 행동은 모두 단순히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는 제멋대로인 이유에 의한 것이고, 그 행동에 대한 뿌듯함이나 죄책감 같은 건 딱히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 나로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논리적이고, 당당하고, 당연한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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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꽂힌 노래.

취미/음악 | 2016. 10. 3. 23:00
Posted by 메가퍼세크

무언가에 꽂힌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에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무언가가 오직 나에게만은 한없이 특별한 것으로 느껴지고, 몇 번이고 반복해 향유하고 싶어진다는 것. 그것을 만든 누군가의 의도와 생각이, 내 마음의 벽을 뚫고 들어와 마음 속에서 끝없이 휘돌아 가는 그 감각은,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신기하면서도 전율 가득한 순간들 중 하나다.


이번에 꽂힌 대상은 노래, 하지만 노래 전체가 아닌, 아주 좁은 한 부분이다.


곡 이름은 준수의 '꼭, 어제'



유튜브에서 루시아의 곡들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곡인데, 루시아의 음악을 들은 준수 측에서 콜라보를 제안하여 만들어진 곡이라고 한다.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던 준수의 목소리는 솔직히 내 취향에서 상당히 비껴나가 있었고, 뮤비도 전혀 스토리가 짐작되지 않는 뜬구름 잡는(내 기준에서) 느낌에, 멜로디도 그다지 귀에 확 들어오지 않는, '꽂히기' 에는 한참 부족한 노래였다.


그나마 루시아가 부른 버전은 어느 정도 마음에 들어서 꽤 여러 번을 들었지만, 특히 마음에 드는 곡들과 비교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그저 며칠 듣다 보면 질릴 법한,평범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곡을 반복해 듣다가 갑자기 귀에 들어온 가사 한 줄이, 나를 돌이킬 수 없이 꽂히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은
초라한 나의 진심은
겨우 이런 것뿐이야
그대와 함께 늙어가고 싶어요
흰머리조차도 그댄 멋질 테니까



'그대와 함께 늙어가고 싶다' 는 말. 소박하면서도 간절하고, 막연하면서도 구체적이고, 마음을 형태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짧고 간결한. 이 한 줄만큼 완벽한 고백이 어디 있을까. 결혼식장에서 부르는 축가와 같은 고백의 노래에 마지막 가사로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이 짧은 가사 몇 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꽂힘은 며칠이면 끝날 것 같았던 이 곡의 감상 횟 수를 수십 배 이상으로 늘렸는데, 아무래도 꽂힘이라는 현상은 전염성이 있는 것인지. 마음에 들지 않던 멜로디나 곡의 진행, 심지어 내 취향의 반대에 가까웠던 준수의 목소리까지도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 꽤나 좁고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내 취향의 폭이 확장된 것은 정말 오랜만인데, 꽂힌다는 것은 이 정도까지 위력적인 현상이었던 걸까.


부디, 앞으로의 인생을 사는 동안에도 지금과 같은 꽂힘과 그 열병 같은 감동의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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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선택의 문제에 대하여

자아성찰/가치관 | 2016. 9. 26. 23:16
Posted by 메가퍼세크

언제나 선거철이 되면,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투표해라, 누구를 찍어라, 찍을 사람이 없으면 무효표라도 던지라는 외침. 낮은 투표율과 선거일을 놀러 가는 날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불만스러운 생각이 든다.


 물론 전체 사회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서 투표하고, 결과적으로 최적의 지도자들 뽑아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겠지만, 언제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고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인류에게 필연적인 것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 판단의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정할 권리 또한 있다.


 생각해 보자. 개인의 입장에서 투표란 복잡한 행동이다. 후보자 각각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가치 판단을 내리고, 투표장에 직접 가기까지 참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반면 그로 인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작아도 최소 수천, 수만 표에서 수백만 표가 왔다갔다하는 일반적인 투표에서 한 사람의 표가 차지하는 비중은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내려가야 한다. 아주 적게 만 명이라고만 가정해도 한 사람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0.01%.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고, 결국 개인의 입장에서 투표라는 행위가 주는 실질적인 이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투표를 할까? 누구나 알다시피, 이것은 의미 부여의 문제다. 세상에는 아주 작은 영향력이나마 자신이 행사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이나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스스로에게 별 이득이 없고 투자해야 하는 것만 있는 일이라도, 스스로 당위성이나 의무감, 행위에 따른 의무감 등을 느낄 수 있다면 기꺼이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특질이 결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할 필요 또한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할 필요가 없고, 단순히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의미 부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심지어 법으로 보장된 투표의 권리가 '국민의 의무' 같은 거창한 구호와 함께 사회적 선으로 취급되고,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식이 그 반대급부로 나빠지는 현재의 세태는 과연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충분한 투표율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구성원들의 관심으로 지탱되는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무관심의 자유' 라는, 또 다른 가치 또한 존중되는 세상을 원하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개인적으로는, 내가 투표를 하는 행동의 결정이 그 행동의 사회적 인식이나 투표 안 한 사람에 대한 주변의 싸늘한 눈길에 의해서보다는 투표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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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사이드 스쿼드 후기

취미/영화 | 2016. 8. 7. 00:41
Posted by 메가퍼세크

최악을 예상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뇌를 비우고 액션만 보면 적당히 볼만하긴 한데, 부자연스러운 부분이나 바보같은 장면들이 자꾸 눈에 띄어서 한 번씩 헛웃음이 나오는 그런 정도?


신기한 건 예전에 명량을 봤을 때 느낀 실망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는 거다. 영화의 주제에 맞는 씬(명량:전쟁 자살특공대:전투, 광기)에 집중하기보다 감성팔이에만 치중했다고 할까? 아무 필요없이 나오는 눈물짜기 연출에 억지로 집어넣은 백병전 연출(이순신 무쌍, 최종부 인챈트리스 쌈질)까지. 전체적으로 흥행하고 싶어서 억지로 집어넣은 장면들이 개연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런 게 싫어서 한국 영화를 안 보는데 DC까지 이러고 자빠지다니.


게다가 이런 류의 영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캐릭터 디자인과 개성도 생각보다 개판이었다. 존재감도 없는 부메랑 던지는 놈이나 나올 때마다 오글거리고 어색하기만 한 일본 여자 칼잡이를 시작으로, 광기의 끝을 보여주기는커녕 그냥 총 좀 잘 쏘고 쌈 좀 잘하는 주연 캐릭터로 바뀐 할리퀸과 조커에, 하수구에 사는 괴물 주제에 너무 인간답고 마음에 그늘도 없고 심지어 어디가 나쁜지조차 잘 모르겠는 킬러 크록. 그나마 데드샷이나 엘 디아블로는 좀 멋졌지만 이 둘도 전혀 악당같지는 않다. 유일한 악역인 인챈트리스가 그 절정인데, 넝마 쪼가리 걸치고 순간이동으로 기밀문서 셔틀이나 하다가 빡치니까 오빠 불러서 징징거리기나 하고. 나중에는 세상을 멸망시킬 무기를 만든답시고 엉덩이나 흔들다가 뜬금없이 또 내려와서 쌈질 좀 하다가 갑자기 또 염력을 쓰는가 하면 마지막엔 폭탄 한 방에 가고.. 캐릭터의 강렬한 매력이라는 건 분장 좀 세게 하고 cg 떡칠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애초에 영화 내에서 애네가 나쁜 짓을 하는 장면이라는 거 자체가 번갯불에 콩 볶듯 몇 초로 끝나는데 나쁜 놈이라고 인식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그냥 인상 좀 더럽고 말 좀 미친놈처럼 하면 다 나쁜놈인가? 이건 '나쁜놈들' 을 모은 게 아니라, '쌈 좀 잘하는 놈들' 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쌈 잘하고 총 잘쏴서 대단하다는 평을 들었나? 


하긴 애초에 미친놈들을 모아서 부대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광기와 난폭함, 빌런의 미덕과 같은 여러 특성들은 결국 예측 불가능성과 자유로움에 기반을 두고 있을진대, 목에는 폭탄이 심어지고 자기 목숨을 내놓고 강한 적과 싸우는 판에 광기 표현한답시고 이상한 짓 하다간 죽기밖에 더 할까?(실제로 한 놈 죽었고) 개인 영화들이 한 개씩 있는 상황이었다면 몰라도, 다 처음 나오는 듣보잡들인데 개성을 보여줄 시간도 없이 쌈박질만 하니 이게 히어로 영환지 악당 영환지.


시작부터 캐릭터성을 존나 강하게 표현하겠다는 의도를 너무 대놓고 풍기는 감옥 씬들로 시작해서 뭔 카탈로그마냥 빌런들 하나씩 능력과 사연을 소개하고, 모아서 쌈박질 하러 가는 극도로 뻔하고 예측 가능하고 평면적인 전개나, 아주 개판은 아니지만 묘하게 조금씩 모자라고 공감 잘 안 가는 연출이나 모자란 개그 센스까지. 세세한 부분들까지 참 꼼꼼하게 개판인 영화다.


그래도 뭐, 데드샷이나 할리퀸의 액션은 나름 괜찮았으니 그냥 그거 본 걸로 만족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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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카페의 조건

자아성찰/취향 | 2016. 4. 7. 00:35
Posted by 메가퍼세크

나에게 있어, 카페라는 건 참 특별한 장소다.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카페는 단순히 만남과 이야기를 위한 장소일 뿐이지만, 혼자서 가는 카페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외부와는 전혀 다른 고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잠시 동안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는 나만의 특별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 몰두하는 대상은 지금과 같은 글쓰기나 독서, 공부 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몰두하는 대상이 아니라 한 가지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매일의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쌓이는 스트레스나 피곤함이 극에 도달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좋은 카페에 찾아가 잠시 동안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으면 스트레스나 피곤함이 눈 녹듯 사라진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좋은 카페는 무엇보다 중요한 공간 중의 하나이고, 다른 어떤 장소보다 심사숙고해 선택해야 할 대상에 속한다. 그런 심사의 과정에서 고려하게 되는 나만의 기준들을, 이 글을 통해 정리해 보려고 한다.


1.채광과 조명


-카페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빛과 음악이다. 바깥 세상과 카페 내부 사이의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채광이 너무 잘 되거나 바깥에서 안이 훤히 보이는 카페는 그다지 좋지 않다. 최소한 대낮이라도 불을 껐을 때 카페 안이 어두워질 정도는 되어야 한다. 외부의 자연광을 차단하고 조명의 불빛만으로 카페를 새로 칠했을 때, 카페 내부의 고유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조명의 선택도 중요하다. 햇빛의 백색광과는 다르고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약간의 어둑어둑함, 형광등보다는 전구의 은은함이 더 마음에 든다. 펜을 들고 무언가를 쓸 때 종이에 비치는 손의 그림자는, 카페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이자 좋은 조명을 판단하는 척도 중의 하나다.


2.음악


-두 번째 요소는 조금 더 까다롭다. 카페의 원래 목적 때문에라도 카페 내에서 완전히 소음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카페 바깥의 소리를 막고 내부를 음악으로 칠하는 것은 카페의 분위기를 조성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작업이다. 각각 고유의 특색을 가진 음악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이 부분에서는 특히 취향이 많이 갈리겠지만, 주로 내가 선호하는 것은 잔잔하면서 약간 활발한 분위기의 음악. 가사가 전혀 없는 현악 계열의 연주곡이 베스트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떤 곡이라도 카페의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면 상관은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것은, 카페의 인테리어, 조명과 음악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하는 것. 정말로 잘 선곡된 음악은 신경쓰지 않으면 음악이 재생되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고, 귀를 기울이면 언제든지 선율에 빠져들 수 있다. 어쩌면 카페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음료 다음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이 아닌가 싶다.


같은 맥락에서, 사실 모든 경우에 방음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카페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카페 내부에서의 집중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만, 가끔씩 그 법칙을 깨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예전에 방문했던 한 카페는, 기찻길 옆에 위치해 있어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소리가 들렸다. 얼핏 보면 상당히 시끄러울 것 같았지만 다행히 기찻길에서의 거리는 꽤 멀었고, 오히려 가끔씩 멀리서 들려오는 은은한 기차소리는 그 카페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다. 카페의 정면은 도로에 인접해 있었지만, 이중 문 구조로 도로의 소음은 문을 열고 닫을 때까지도 거의 완벽히 차단되었다. 나쁜 소리는 막고 좋은 소리는 끌어들인, 아주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3.실내 디자인


-조명과 음악이 카페를 바깥과 다른 공간으로 만드는 밑그림과 채색이라면, 실내 인테리어는 세부 묘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카페의 분위기와 컨셉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수단이면서, 카페 내부를 감상의 대상으로까지 격상시킬 수 있는 가장 예술적인 부분이기도 하기에 실내 인테리어의 수준은 카페 주인의 미적 감각과 센스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간단한 액자나 픽셀 아트, 방향제 같은 소품도 멋지지만 멋진 장식장이나 벽화, 쿠션감 좋은 클래식한 의자도 좋고. 실내 디자인의 컨셉은 워낙 극과 극이기에 좋아하는 스타일을 딱 판단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음악의 경우처럼 크게 튀지 않고 카페의 분위기에 잘 녹아든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감이기에.


4.메뉴


-주로 '커피 맛' 으로 대표되는 메뉴의 질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항목이 어째서 이렇게 아래에 위치해 있는지 의아해햘 수 있겠다. 물론 카페의 메뉴 구성과 맛은 상당히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카페를 판단하는 제 1기준으로 작용하곤 한다. 하지만 카페의 이용 목적은 사람마다 셀 수 없이 다양하고, 나처럼 분위기와 공간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에게 메뉴는 카페의 분위기를 구성하는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카페의 음료 퀄리티가 심각할 정도로 좋지 않다면 그건 큰 문제겠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카페의 메뉴 구성과 맛은 카페 분위기의 형성에 마지막 방점을 찍는 플러스 요인이 될 수는 있어도 마이너스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물론 조명과 음악,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는 카페 주인이 메뉴에 신경을 쓰지 않기도 어렵고.


그렇다면 좋은 메뉴란 무엇일까. 카페 메뉴에 오를 수 있는 음료와 음식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고, 하나 하나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주류가 되는 것은 보통 커피와 차의 양대산맥으로 나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카페 음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커피이고, 카페라는 말 자체가 프랑스어로 커피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온 만큼 커피 하나라고 하는 것이 맞겠으나, 역사적인 이유에서든 개인적인 선호에서든 카페를 말할 때 차를 떼놓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제대로 만든 커피나 차에서 느껴지는 깊은 향과 맛은 카페라는 공간이 왜 생겼는지, 어째서 필요한지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 중 하나고, 그만큼 두 음료에 쏟는 조사와 공부, 노력이야말로 카페 주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커피를 메인으로 삼는다면 최소한 원두의 품질과 로스팅, 다양한 추출 방법에 대해 공부하고, 차를 판매하고 싶다면 원산지와 브랜드별로 찻잎들을 구입해서 시음해 보는 정도? 굳이 최고의 바리스타가 된다거나 영혼을 울리는 차 맛을 낼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그 깊은 세계에 대한 나름의 감상과 노력하는 자세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민과 노력이야말로, 좋은 카페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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