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와 휴식에 대하여

잡설 | 2015. 4. 14. 00:50
Posted by 메가퍼세크

요새, 생활에 여유가 없다.


일은 그렇게 바쁘지 않고, 출근과 퇴근도 자유롭고, 취미 활동도 충분하고,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어쩐지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휴식이 부족한가 싶어 잠자는 시간도 늘려 보고,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쉬기도 하고, 독서도 했지만 마음의 여유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리 안정적인 정신상태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로 무언가에 휘둘리는 느낌은 처음이었기에 문득 내가 편안하게 쉬고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야간자율학습 시간.


매일 한두 시간 동안 죽어라고 공부를 하다가,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1층으로 내려가  교정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굳이 1층까지 내려갔던 이유는, 그 자판기가 조금 특이했기 때문에. 다른 자판기 커피와는 조금 다르게, 커피 가루와 물을 섞어서 내려주는 게 아니라 물과 커피가 따로 내려온 이후 젓는 막대가 꽂혀서 나왔다. 신기하기도 했고, 기분 탓인지 다른 자판기 커피보다 조금이라도 더 맛있어 보여서 거의 그 자판기 커피만 마셨던 것 같다.


며칠 그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었는데, 아무래도 교실에서는 좀 멀어서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고, 바깥에 접해 있어 어둡고. 다른 사람 신경쓸 것 없이 혼자 조용히 있기 딱 좋은 곳이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그 자판기로 내려가, 커피를 뽑고,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머리를 식히다 보니 문득 그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고, 수능을 보는 그 날까지 거의 매일 그 커피를 마시면서 참 많은 생각들을 했다.


내가 이 고생을 해서 대학에 들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수능을 망치면 어떡하지. 대학에 들어가서도 친구놈들을 계속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생각했고, 대부분의 결론은 '어떻게든 되겠지' 로 끝났다.


커피를 마시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밤하늘을 보면서 기분이 풀렸는지. 혹은 둘 다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은 평소의 비관적이고 스트레스 받던 심리상태가 어느 정도 풀려서, 잠시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꽤 많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마치 공원처럼 잘 꾸며지고 분위기도 좋았던 캠퍼스를 산책할 때,

시험 기간에 가장 친한 친구 집에서 밤을 새다가 잠시 쉬려고 근처를 걸어다닐 때,

모든 면에서 내가 생각하던 분위기에 딱 맞는 카페를 찾았을 때,

특히 멋지다고 생각했던 가로등 앞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을 때.


보통은 아주 조용하거나 좋아하는 음악이 들려오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기온에서, 몸의 컨디션이 충분히 좋으면서 주변이 어둡거나 은은한 조명이 있고, 주변의 풍경도 마음에 들 때, 내가 진짜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보면 참 까다로우면서도,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조건들이기도 하다. 휴식을 취한다는 것은 아무 것에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나에게 가능한 자극을 주지 않는,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기에. 나에게 거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거슬리지 않거나 긍정적인 자극들만 남겨야만 내가 회복할 수 있도록 보호할 수 있겠지.


물론 주변 환경만 맞는다고 무조건적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휴식을 취하는 주체는 '나' 이고, 내 몸이나 마음이 휴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내가 놓여 있는 환경에 대해 익숙하고 편안하다는 심리를 가지지 않으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결국 나에게 있어 제대로 휴식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 주변 환경이 모두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하는 까다로운 일이고, 어찌 보면 제대로 일한다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것일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 몸의 피곤함? 새로운 장소에 대한 이질감? 어느 쪽이든, 언젠가 다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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