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시 리뷰

취미/영화 | 2015. 4. 24. 23:07
Posted by 메가퍼세크

모진 훈련으로 거장을 키워낼 것인가, 너그러운 교육으로 평범한 제자를 키워낼 것인가.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스승들의 골치를 썩이고, 지금도 썩이고 있는 질문일 것이다.


이 영화, '위플래쉬' 는 그 중 첫번째 극단을 선택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연주자를 담금질하기 위하여 비인간적 경쟁과 체벌, 인격 모독까지 서슴치 않는 플래처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피가 날 때까지 드럼을 치는 네이먼은 무서울 만큼 닮았고, 반목과 갈등을 거듭하면서도 결국은 서로의 철학과 열정에 공감하여 펼치는 마지막 신의 열정적인 연주는 첫번째 극단이 꿈꾸는 이상적인 결과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 이상적인 무대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네이먼과 다른 학생들이 겪었던 잔인할 정도의 고통은, 관객이 플래처의 교육방침과 네이먼의 열정에 단순히 감동할 수 없게 만든다.


과연 채찍질을 통해 만들어진 한 명의 위대한 연주자는, 그 채찍에 맞아 다친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는 매우 복잡하고, 또한 중요하며, 어려운 질문이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플래처의 교육 방식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제자의 자존심이나 인권, 명예와 같은 가치는 타인이 함부로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런 핵심적인 가치들을 무참히 짓밟는 플래처의 교육은 결과에 상관없이 잘못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얼핏 보면 이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 그런 가혹한 교육을 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극중의 네이먼도 부분적으로는 그렇고, 여러 운동선수들이 스스로 혹은 코치, 트레이너들을 통해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넣는 훈련을 추구한다는 것이 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더 가까운 예로는, 야간자율학습에 자율적으로 참가하여 스스로를 공부하도록 하는 고등학생들도 있고.


물론 위의 사례들은 플래처 교수의 가혹한 수업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면서 높은 성과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고, 때로는 자유를 빼앗긴 채로 얻은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플래처 교수의 방식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이 문제의 답은 간단하다. 플래처 교수의 교육 방침은 분명 잘못되었으나, 그 잘못은 가혹한 교육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플래처 교수가 자신의 팀에 들어오기로 한 한 모든 모든 학생에게 자신의 교육 방침과 스타일을 사전에 공지하고, 충분히 그에 공감한 학생들만으로 팀을 꾸렸다면 어땠을까? 극중 나타난 대부분의 문제들은 발생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그쳤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신과 공감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한, 소통의 문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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