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킹 배드 후기 (스포)

취미/영화 | 2025. 11. 4. 21:48
Posted by 메가퍼세크

최근에 브레이킹 배드를 정주행했다. 최고의 드라마라는 평가처럼 짜임새도 좋고 인상적인 장면도 많았지만, 동시에 여러모로 보기 불편한 작품이기도 했다. 드라마의 특성상 보편적 윤리 따위는 집어치우고 별의 별 방식과 가치관으로 행동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나오는데, 그들을 보며 느껴지는 혐오감과 상대적 만족감 같은 감정들은 나 스스로의 윤리적 기준에 대한 깊은 질문으로 발전되곤 했다. 어딘가에서 이 작품이 일종의 "로르샤흐 테스트" 라는 말이 있었는데, 굉장히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동안 여러 질문과 답변을 던지면서 내 윤리와 사고방식이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지를 여러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었고, 그 결과를 여기에 정리해 둘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스포일러 포함.

이 시리즈에서 내가 혐오감을 느낀 인물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 가장 강렬했던 것은 제시였다. 이 드라마의 초반 몇 시즌은 제시가 저지른 바보같은 일과 그에 대한 월터의 수습이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했고, 그 후에도 내 관점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수없이 많았다. 물론 제시의 행동 중 단순히 본인의 판단 능력 부족이나 실수에 의해 벌어진 일들도 많은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삼고 싶지 않다. 사람의 능력은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아무리 조심해도 실수는 할 수 있는 거니까. 진짜 문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한 노력이나 결과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고, 그 결과를 직시하고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시가 저지른 수많은 바보같은 행동들은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끝없이 손실과 위험을 가져왔지만, 제시는 그것들에 대해 사과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자기합리화와 공격적인 반응으로 대응한다. 감정은 진하지만, 책임은 희박하다. 월터가 리스크와 책임을 뒤집어쓰고 그의 행동들을 수습하고 배려하고 도와주어도, 그가 그것에 대해 고마워하거나 보답한 것은 손에 꼽는다. 극중 상당 기간 동안 제시는 사실상 나이만 먹은 청소년에 가까웠고, 월터나 마이크 같은 보호자가 없으면 무책임하고 바보같은 짓만 저지르는 살아있는 위험 덩어리일 뿐이었다.

단지 그가 본인의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싸여 원료를 팔고 마약 사업을 그만두려 한 것은 몇 안 되는 이해할 만한 행동이었지만, 그 이후에 자신의 도덕적 충격에만 집중해 돈을 아무데나 뿌리는 것 같은 생각 없는 행동을 일삼고, 월터가 브록에게 한 짓을 발견하자마자 맹목적인 복수심을 표출하며 원래의 느낌으로 돌아간다. 물론 아이를 이용한 것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행동이 맞고 그것이 제시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도 이해할 만 하지만 , 여전히 월터는 그의 목숨을 구하고 수많은 바보짓을 수습한 은인이었고 월터에게 생존을 위해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지, 그가 아이를 죽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제시는 자신의 감정에만 100% 몰입해서 그에 대한 그 어떤 고찰도, 검증도 하지 않고 월터를 맹목적으로 공격하고 몰아붙였다. 물론 그가 월터에게 이용당했다는 배신감도 있었겠지만, 그에 대한 분노로 저지른 행동들은 다시 DEA 요원들에게 이용당하기만 했을 뿐 아닌가?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도 자기 관점에서의 오해만으로 월터를 다시 한 번 단정했고, 마지막 장면에서 월터가 자신의 목숨을 한번 더 구해주었을 때도 바로 월터에게 총을 겨누었다. 결국 끝까지 그는 인간적으로 극도로 미성숙했고, 자신의 트라우마와 애매한 윤리 의식에 휘둘리며 맹목적이고 아이같은 행동으로 여기저기에서 이용당하기만 했다. 이런 행보에 대해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지는 있을지 몰라도, 내가 추구하고 싶은 가치에서는 가장 정반대에 가까운 존재라고 느꼈다. 스스로를 직시하고 통찰하며 성장하려 하지 않는 미숙한 행동은, 결국 자신의 행동에 대한 무책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스카일러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초기에 그녀는 월터를 위해 진정으로 노력했고, 월터 거짓말과 범죄를 알게 되었을 때 느꼈을 혐오와 공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거기서 생각을 멈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항상 생각하는 원칙 중 하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디까지나 사실에 대한 근사치일 뿐이며, 얼마든지 오차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록 내가 지금까지 느낀 것이 무언가에 대한 강한 인상을 만들었더라도 항상 “그것이 사실인가?”, “지금 보고 있는 단면이 전부인가?”, “내가 모르는 정보가 더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것이 완전히 틀렸을 수 있다는 불확실성을 열어둔 채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스카일러는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자신이 월터의 거짓말에 대해 느낀 감정을 아무 필터링 없이 그대로 때려박았고, 월터가 마약 딜러라는 단편적 사실을 확인한 시점에서 더 이상의 정보 획득이나 대화를 모두 단절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 심리적 관점을 확정하며, 그 단정 위에서만 행동했다. 그 결과는 엇나간 도덕적 우월감과 자기기만, 비일관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월터를 쫓아내기 위해 바람을 피우고, 월터의 자금을 아무런 논의 없이 사용하고 (행크의 치료비와 테드의 세금 문제), 월터의 돈세탁과 여러 일들에 가담하면서도 스스로를 “인질”로 재정의하고 피해자 프레임에 안착했다. 월터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인식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지만, 월터가 행크의 일에 관련되었을 거라는 추측만으로 그 잘못된 일로 얻은 돈을 사용해야 한다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한 시점에서 그녀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런 행동들이 소시민적이고 평범한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관점에서는 이 또한 무책임과 자기기만, 자기합리화의 덩어리로만 느껴진다. “저 사람은 틀렸다”는 확신이 “그러니 저 사람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로 변질되는 순간, 윤리와 대화는 사라지고 자기연민과 아집에 빠진 위선자만이 남는다.


월터는 가장 흥미롭다. 그는 항상 계획을 세우고, 복잡한 변수를 통제하고, 상대의 반응을 예측하며, 필요한 자원을 정확히 배치한다. 이성적 역량만 보면 가장 우월한 편이다. 하지만 그 이성은 견고한 원칙 대신 자존심, 인정 욕구, 박탈감이라는 불안정한 동기 위에서 작동하며, 어떤 계기로 트리거가 눌리는 순간 정교한 계산은 순식간에 충동적 행동으로 대체된다. 그런 인간적인 단점들이 그를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지만 동시에 굉장한 혐오감도 불러일으킨다. 그는 그런 대단한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단지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자아를 세우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연료로써 불태웠으며, 그에 희생되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에는 급격히 무감각해졌다. 사실 이렇게 보면 극중에 나오는 여러 조직의 보스와 조직원들과도 크게 다를 바 없기도 하다. 그들 또한 본인 또는 조직의 이득이라는 확실한 동기와 목표의식이 있고, 그를 위해 비대한 자존심과 거만함, 과감한 행동이라는 방패로 스스로를 보호하며 그 과정에서 즉흥적이고 바보같은 일도 수없이 했다. 월터는 단지 그들 중 가장 능력있고, 감정적 단점도 크며, 극단적으로 비틀려 있는 인물일 뿐인 것 같다. 역으로 보면, 그렇기에 스스로를 직시하고 합리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며 솔직한 소통과 배려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구스타보는 내가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다. 그는 당연하게도 일반적인 기준에서 엄청난 악인이 확실하지만, “합리적 의사결정”이라는 기준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있다. 거스에게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분리되어 있고, 이성적 행동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의 거시적 목표인 복수는 철저히 감정적이지만, 그에 대한 실행은 거의 완벽하게 철두철미한 계산과 이성에만 의존한다. 상대의 입장과 행동, 반응을 미리 계산해서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지 않고, 필요한 행동은 군더더기 없이 실행하며, 상대의 감정까지 고려하여 필요하다면 공감과 관용 (처럼 보이는) 의 제스쳐까지 취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이 작품 속 다수의 인물이 감정과 이성을 서로 침범하게 내버려둔다면, 구스는 두 층을 분리하고 다른 인물들의 의사결정과 감정까지 모두 조망하며 최선의 행동을 취한다. 물론 그의 판단도 100% 완벽하지는 않았고 조금 남아있던 감정적 요소 때문에 결국 몰락하기도 했지만, 즉흥적이고 성급한 인물들이 넘쳐나는 이 시리즈에서 그의 판단력과 냉철함은 유독 돋보였다. 복수를 위해 인생을 바쳤다는 점에서 춘추시대의 오자서가 생각나기도 했다.

다른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다. 토드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라 평가가 무의미하고, 사울은 단순한 하청업자였다. 리디아는 겁이 많아서 역어로 모든 위험요소를 과격하게 제거하려다 역으로 위험을 키우는 결벽증 같은 타입이고, 제시의 친구들이나 제인은 의도와 책임이 얕은 즉흥적 인물이다. 테드는 성욕과 허영심에 취한 전형적인 바보이고. 이런 부류들은 너무 명백히 다른 유형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내 감정을 크게 자극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더 자주 불편하게 만든 건, 이성과 감정의 경계 위에서 계속 흔들리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바보같은 결정을 한 캐릭터들다. 위에 언급된 제시와 스카일러, 월터는 말할 것도 없고 마리의 도벽과 허언과 가벼운 입, 행크의 마초적 허세와 공격성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마지막 둘은 짜증스럽긴 해도 이 작품에서는 가장 “선에 가까운” 축에 속하기는 하겠지만, 스스로의 약함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추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시 좋은 반면교사가 된다.

그리고 작품 전반에서 가장 답답했던 것 중 하나는 거의 모든 인물이 보여주는 절망적인 수준의 의사소통이다. 공유해야 할 정보는 잘라서 던지고, 자존심 때문에 핵심을 숨기고, 상대의 맥락과 정서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건조한 사실만 들이밀거나 역으로 실질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순간에 자기 감정만 앞세운다.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지속적으로 사실을 확인하려 노력하는 대신 대부분의 대화가 부분적인 정보만으로 의심하고, 섣부르게 단정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이상한 의사소통이 감독의 의도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져 몰입이 깨질 정도였다. 실제로 미국의 특정 지역에서 저 정도 수준의 비효율적 커뮤니케이션이 흔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선 좋은 반면교사가 되었다. 서로의 의도를 가능한 투명하게 전하고, 불확실성은 열린 채로 유지하며, 정서적 맥락을 먼저 확인하고, 그 다음에 사실을 다루는 것. 이런 기본만 지켜도 극중 파국의 절반 이상은 사라지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사실인지 추측인지를 혼동하는 순간, 의사소통의 근간은 무너지고 오해와 의심은 눈덩이처럼 굴러 파국을 만든다.


정리하면, 이 작품을 보며 내가 확인한 스스로의 원칙은 이렇다.

- 감정은 행동의 동기나 목표를 정할 때만 관여해야 하고, 구체적인 판단과 실행을 방해하는 필터로 작용해서는 안된다. 

- 주관적인 감정과 인식은 언제나 근사치이며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인식과 뿌리깊은 감정을 가졌더라도, 그것이 틀린 인식에 의거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즉시 폐기하고 수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감정과 인식으로 누군가를 함부로 단정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

- 소통은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상호작용이어야 한다. 내가 원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목표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가능한 투명하게 소통해야 한다. 

- 스스로의 감정과 기준을 끊임없이 직시하고 점검하며, 본인이 아집이나 자존심 등에 빠져있는지 진단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완전히 막기는 힘들지만,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 중 하나에 심각하게 빠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런 감정과 판단, 기준들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 글은 단지 내가 이런 장면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을 이렇게 해석해 이렇게 결론내렸다는 기록일 뿐이다. 언젠가 다시 보면 완전히 다른 감상을 느낄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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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5. 7. 14. 03:44
Posted by 메가퍼세크

나는 살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감정에 둔감한 편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삶의 여러 장면들에서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들을 또렷하게 느끼는 일이 남들보다는 드물고, 설령 그런 감정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에 온전히 휩쓸리기보다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고 노력해 왔다.

감정이란 건 도대체 뭘까. 감정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그것이 이성과 대비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여러 현상들을 보고 느끼는 것들을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연결로 설명하려는 이성적 접근과 달리, 감정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즉각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성에 대해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개념을 엄밀히 따지기 시작하면 복잡해지겠지만, 내게 있어 이성은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에 기반한 하나의 세계관에 가깝다. 외부의 정보가 들어왔을 때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섣불리 원인을 단정하지 않고, 모른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 만약 그 정보에 대해 어떤 의견을 말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 한 철저히 조사하고 그 판단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태도 같은 것이다. 사람마다 의견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방식을 고수하려 노력하는 것이 이성적 사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무엇인가. 그런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를 잠시 접어두고,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무언가 행동하게 만드는 방향성, 또는 충동을 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 어떤 사건을 저질렀다는 뉴스를 봤을 때,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 그런 판단은 중립적이어야 할 사고의 흐름에 방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감정의 개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좋고 나쁨의 문제라기보다는, 감정이 이성적 사고를 편향시키는 하나의 경향성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인간의 사고를 컴퓨터와 같은 계산 기계로 생각한다면, 이런 대립적 요소들은 더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사고를 수행하는 방식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극들을 일정한 구조 안에서 처리하는 일종의 운영체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이성이라는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고, 때때로 그 흐름을 방해하거나 우회시키는 별도의 신호들, 즉 감정적 요소들이 있다. 그것들은 단순한 오류일 수도, 외부로부터 주입된 악성 코드일 수도, 혹은 애초에 커널에 새겨진 근본 설정일 수도 있다. 종류를 막론하고 그런 감정이 활성화되는 순간, 이성이라는 프로그램은 더 이상 정보를 객관적으로 모으고 분석하는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불충분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거나, 입력된 정보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일 등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사고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이상, 감정 그 자체도 근본적으로는 분석 가능한 범위 안에 있을 것이다. 예컨대 내가 분노라는 감정을 느꼈다면, 그 감정을 유발한 조건은 무엇인지, 그것이 내 사고 구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나아가 그런 감정의 개입이 전체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등을 하나씩 따져볼 수 있다. 감정이 객관화되고 분석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무언가가 아니라 일정 정도 관리 가능한 신호로 바뀐다. 심리학이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명상, 혹은 메타인지는 바로 그런 능력과 태도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분석하고 통제하는 것이 언제나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이성이란 결국 현실에서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것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가능한 선택지를 평가해 그중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프레임워크일 뿐이다. 그것은 사고의 도구이지, 사고의 방향성이나 목적 자체는 아니다. 내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거나,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를 추구하는 사고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성적 사고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성의 방향을 설정하는 더 상위의 감정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감정이란 것은 때때로 이성의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성이 어떤 목표를 향해 작동하게 만드는 원천적 동기이기도 하다.

결국 사람의 사고 구조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활용하게 되는 가장 큰 기계이고, 그것을 잘 써먹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단순한 구분을 뛰어넘어 스스로의 사고 구조 전체를 깊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예컨대 내 경우에는 누군가의 주장에서 이성적인 허점을 발견했을 때 반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는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를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차적으로는 내가 가진 그런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통해 원칙을 지키는 자기 자신을 뽐내거나 스스로 만족하고 싶은 감정적 욕구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감정적 동기는 보통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고,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합리화하는 데 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캐내는 일은 굉장히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그나마 나의 경우에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싶다는 원천적 욕구가 있기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동기’조차 감정의 산물인 이상, 내가 느끼는 것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감정을 파헤치는 데 사용한 이성은 또 다른 감정에 의해 동작하는 것이고, 그 감정을 해석하려는 시도 또한 결국은 다른 감정의 영향 아래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순환할 뿐이라면, 나의 정신세계와 감정적 동기를 완전히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듯 스스로의 운영체제를 완전히 분석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더라도 그 사실을 온전히 마주하고, 가능한 한 정직하게 스스로를 고찰하려는 태도는 여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적 욕구 중 하나가 ‘이성적이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그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스스로를 계속해서 진실하게 고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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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4. 2. 22. 22:37
Posted by 메가퍼세크

오랜만에 블로그를 돌아보다가, 옛날에 쓰다가 중간에 멈추고 남겨 둔 글을 발견했다.

2014년 12월 10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걸 보면 이미 9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오래된 글이다.

이 글을 처음 쓰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굉장히 많은 차이점이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공유하는 것도 있겠지.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옛날에 썼던 이 글을 완성하면서 과거의 나와 대화해 보았다. 어느 부분이 과거의 생각인지는 굳이 명시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면서 빈번하게 마주하는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한 질문이다. 온전히 자신의 의사로 스스로의 삶을 끝내는 것. 사전적 정의는 굉장히 간단하지만, 이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굉장히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자살이야말로 모든 것이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인 행위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직면하고 있는 세상사로부터 도망치는 비겁하고 치졸한 행위라고도 한다. 이런 상반된 행위에 대한 많은 사람의 생각에 더해, 내가 가진 생각들을 풀어내 보자. 

 

우선, 자살이라는 행위가 좋은 것인지에 대한 판단부터 시작하자. 자살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논리는, '사후세계' 라는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것이다. 생에서 겪고 있는 여러 고난과 어려움들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해도, 이 생의 다음에 오는 별도의 생이 있어 지금의 고통이 그대로 이어지거나, 때로는 더욱 증폭된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이 논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살에 대한 강한 억제력이 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지 않다. 사후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현재의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해 그런 피드백을 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지 등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있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그런 부분들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꺼려진다는 점도 있다. 내가 자살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전적으로 현생에 대한 나의 판단에 의한 것이고 싶다.

두 번째 논리는, 자살을 했을 때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겪을 여러 형태의 고통을 언급한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모와 가족들을 비롯해 친지와 동료 등, 자신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없음으로써 굉장히 큰 심리적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런 것은 도덕적이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이 논리는 자신이 죽은 후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한 굉장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살을 실제로 감행하고 난 후에는 어차피 자신이 죽고 없을 것인데 주변 사람들의 입장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되물을 수도 있다. 

이쯤에서 죽음이라는 것의 근본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아는 지식 안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서로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얼마나 강한 고통을 겪어도 죽음이라는 상태로 변하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살아 있는 사람들로 인해 겪는 이익이나 손해 등의 모든 상호작용도 함께 없어진다. 결국,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벽한 의미의 '탈출구' 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게임에서의 로그아웃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게임을 플레이함으로써 얻는 여러 형태의 이득(즐거움, 돈, 타임 킬링 등)이 충분히 있고, 그것이 게임을 하지 않을 때의 상태와 비교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생이라는 조금 더 복잡한 게임에 적용되지 않을 만한 이유가 없다. 삶이라는 것을 유지하는 동안 얻는 이득이 유지하지 않을 때보다 크다고 생각하면 삶을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로그아웃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게임이든 인생이든 자신의 로그아웃(죽음)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이 사냥하던 길드원, 낳아주신 부모님, 깊은 감정적 유대를 공유하는 친구들 등. 사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런 이유로 게임(인생)을 떠나지 않는 사람도 매우 많고, 이런 것들도 한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감정적인)에 들어갈 것이다. 결국 이런 종류의 이득에도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하거나, 그런 이득들을 합친 결과물이 마이너스가 된다면 로그아웃을 택할 수 있다.(또는 어차피 그런 감정들도 로그아웃과 함께 모두 사라진다는 생각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자살을 이미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담은 어떨까? 죽음 직전에서 돌아와 생의 기쁨을 느꼈다던가, 자살을 결심했던 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는 등. 이런 류의 경험담은 너무 흔하다 못해 클리셰가 된 지 오래고, 설득력도 높지 않다.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살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없는데,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담만을 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나마 자살이 극도로 실패하기 쉬운 일이라면 귀담아 들을 만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성의만으로도 100%에 가까운 성공률을 얻을 수 있는데 말이다. 

(투신 자살이라면 몇 층 더 높은 건물을 고르고, 음독 자살이라면 조금 더 강한 약을 선택하고, 총을 사용하겠다면 권총보다는 샷건을 선택하는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실패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조금만 사족을 붙이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을 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상태로 이동하기까지 겪는 중간 과정에 대한 공포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퓨처라마' 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것처럼, 길거리에 적은 금액을 넣으면 손쉽게 자살할 수 있는 부스를 만든다면? 자살률은 아무리 적어도 최소 두세 배 정도는 급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 자잘한 요소들을 제외하고 보면 자살이란 현실이라는 컨텐츠에 대한 긍정적 요소들에서 부정적 요소들을 뺀 것이 마이너스가 되었을 때 행하는 단순한 손익 계산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살률이 높은 국가의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그 국가에서의 삶에 대해 만족보다는 불만을 느끼고 있는 것이고, 자살률이 낮은 나라는 그 반대일 확률이 높겠지. 아니, 사실 만족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문화에 따른 가치관의 영향도 클 수 있다. 가족을 좀더 소중히 여기거나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성향이 큰 나라의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자살을 덜 할 것이고, 자신의 행복이 좀더 중요하고 두려움도 적은 사람들은 더 쉽게 자살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상황은 어떨까? 나는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현실과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뭔가 의미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인생이라는 것에서 즐기는 컨텐츠들은 충분히 계속 즐길 만한 재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만나거나 나를 아는 사람들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고,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내가 존중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또한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여기까지 나열한 것이 내가 자살할 생각 없이 살아있는 이유이고,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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