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리아-루시아

취미/음악 | 2015. 4. 25. 11:57
Posted by 메가퍼세크



그대의 낱말들은 술처럼 달기에 
나는 주저 없이 모두 받아 마셔요 
내가 하는 말을 나조차 못 믿을 때도 
너는 나를 다 믿었죠 

어떤 때에 가장 기쁨을 느끼고 
어떤 때에 가장 무력한 지 
나 자신도 알지 못 했던 부분과 
나의 모든 것에 관여되고 있어 

나는 녹지 않는 얼음으로 
당신을 조각해서 두 팔로 그러안고 
절대 놓지 않을 거예요 
내 미련함을 탓해도 돼요 
가슴이 시려와도 나는 기쁠 거예요 

이제 그만 악마가 나를 포기하게 하시고 
떠났다가 다시 오라 내게 머물지 말고 

부유한 노예 녹지 않는 얼음 
타지 않는 불 날이 없는 칼 
화려한 외면 피 흘리는 영혼 
하나인 극단 그것들의 시 

나는 녹지 않는 얼음으로 
당신을 조각해서 두 팔로 그러안고 
절대 놓지 않을 거예요 
내 미련함을 탓해도 돼요 
가슴이 시려와도 나는 기쁠 거예요 

그래 녹지 않는 얼음처럼 
아픔을 마비하고 고통을 무감케 해 
함께 할 수 없을 거예요 
서로를 찢고 할퀼 거예요 
가슴이 시려와도 나는 모를 거예요 

그대의 낱말들은 
그대의 낱말들은 




루시아의 가사는 무언가 특별하다.


소재의 선택이나 본인의 감성도 독특하지만,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그 소재와 감성을 가사로 담아내는 표현 능력.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주제라도 다른 사람들이 조망하지 않았던 측면을 파고들어 자신만의 새로운 정서로 다시 창조하는 느낌이 든다.


이 곡은 그런 측면이 가장 잘 돋보이는 곡 중 하나다.

'햄릿' 의 등장인물인 오필리아의 정서가 소재인데, 얼핏 보면 그다지 특별하지 않아 보인다. 사랑과 집착이라는 두 가지 정서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문화 컨텐츠에서 가장 널리, 많이 쓰이는 소재에 속하고, 잠깐 가요 차트만 뒤져도 그에 대한 곡을 수십 개는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햄릿의 내용을 아는 사람에게, 곡의 가사는 다르게 들린다.


'햄릿'의 도입부에서, 오필리아와 햄릿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복수에 눈이 먼 햄릿이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도를 당하고, 복수극에 얽힌 사고로 자신의 아버지 폴로니우스마저 잃은 후 충격을 이기지 못해 미쳐버리고 결국에는 물에 빠져 죽음을 맞이한다.


아무런 죄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사람에게 매도당하고, 아버지까지 잃어버리게 된 비련의 여인 오필리아. 그럼에도 이전의 사랑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면, 그 정서는 이 노래의 가사와 같지 않았을까. 햄릿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고 하면, 실성한 오필리아가 부르는 아리아는 이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곡에 쓰여진 표현들이다. 일반적인 사랑노래들의 레퍼토리처럼 사랑의 대상에 집중해 그저 자신의 사랑을 토로하고 애원하는 대신, 이 곡은 지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수많은 은유와 비유를 동원해 설명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대신 '당신의 낱말들은 술처럼 달고, 내가 하는 말을 나조차 못 믿을 때도 당신은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당신을 영원히 생각하겠습니다' 대신 '녹지 않는 얼음으로 당신을 조각하고, 영원히 안고 있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자신에게 고통을 준 장본인을 사랑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한탄하는 대신 수많은 역설적 상황에 대한 묘사와 내적 갈등에 대한 암시로 곡 속에 녹여냈다.


결국 이 곡의 가사는 햄릿이라는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등장인물에 대한 깊은 감정 이입. 그리고 문학적인 표현 능력이 합쳐져 탄생한 훌륭한 2차 창작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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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드-춤추는 바람

취미/음악 | 2015. 4. 25. 11:56
Posted by 메가퍼세크


심심해서 엔하위키를 눈팅하다가, '바드' 항목에서 동명의 인디밴드를 발견했다.


밴드 이름 한번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하면서 유튜브를 검색해 노래를 들어 보았고, 처음 눌러본 곡 '아이시절' 의 전주가 나오기 시작한 지 불과 5초도 안 되어 이 밴드가 내 취향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잔잔하면서도 활기찬, 마치 축제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면서도 액센트가 분명한 힘있는 연주.

거기에 더해진, 정말로 음유시인들이 노래할 법한 평화로우면서도 어딘지 아련한 가사.


곡에 따라 분위기는 꽤 다르고 연주곡도 꽤 있지만, 전체적인 악기들의 조화와 분위기 조성 같은 기본적인 요소들 자체가 말도 안 될 만큼 내 취향의 스트라이크 존을 직격했다.


첫 곡을 들은 지 10분 만에 음원 사이트에서 모든 곡을 구입하고, 음악 플레이어에 넣어 랜덤 반복 재생으로 돌린 지 벌써 거진 이틀째. 앞으로 일주일 가량은 듣게 될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음악 외적인 요소로 고른 가수의 음악이 마음에 드는 것은 투어리스트에 이어 벌써 두 번째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가수들은 제목 선정이나 앨범 구성 같은 쪽에서도 취향이 비슷한가 싶기도 하다.


언제 콘서트라도 하면 꼭 보러 가야지.


바드(Bard) 2집 - Road To Road
음반
아티스트 : 바드(Bard)
출시 : 2012.05.24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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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APEPE-二人の写真(두 사람의 사진)

취미/음악 | 2015. 4. 25. 11:52
Posted by 메가퍼세크

한 때 통기타 소리에 꽂혀서 연주할 만한 곡을 찾다가 발견한 그룹.

분위기도 좋고, 연주 실력도 좋고, 가사 한 줄 없이 연주로만 승부하는 그 담백함도 좋다. 


잔잔하면서도 확실한 높낮이와 포인트가 있는 멜로디는 마치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서 

데파페페 곡들을 들을 때는 다른 곡들에 비해 조금 더 한음 한음에 집중하게 된다.

연주자가 어떤 생각과 감성으로 현을 뜯고 있는지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고 해야 하나?


대부분의 노래가 다 좋지만 이 곡, '두 사람의 사진' 은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내가 생각하던 '잔잔한 통기타 연주곡' 의 이상적인 이미지에 완벽하게 매치되어, 처음 듣는 순간 참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전주가 끝나고 시작되는 첫 마디 멜로디부터 아련하고 추억하는 듯한 정서가 진하게 담겨 있고, 너무 방방 뜨지도 축 처지지도 않으면서 가을 길을 산책하는 것처럼 이어지는 분위기. 가사가 없음에도 전체적인 멜로디의 완급 조절이나 높낮이가 정말로 말소리를 닮아서, 누군가가 모닥불 앞에서 조용히 추억을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교나 어려운 테크닉이 충분히 들어가 있음에도 곡의 분위기에 충분히 녹아들어, 과도하지 않은 맛을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욕심부리지 않고 정말 세심하게 조절을 잘 한 곡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언젠가 기타를 배우게 된다면, 그 이유의 90% 이상은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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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시 리뷰

취미/영화 | 2015. 4. 24. 23:07
Posted by 메가퍼세크

모진 훈련으로 거장을 키워낼 것인가, 너그러운 교육으로 평범한 제자를 키워낼 것인가.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스승들의 골치를 썩이고, 지금도 썩이고 있는 질문일 것이다.


이 영화, '위플래쉬' 는 그 중 첫번째 극단을 선택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연주자를 담금질하기 위하여 비인간적 경쟁과 체벌, 인격 모독까지 서슴치 않는 플래처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피가 날 때까지 드럼을 치는 네이먼은 무서울 만큼 닮았고, 반목과 갈등을 거듭하면서도 결국은 서로의 철학과 열정에 공감하여 펼치는 마지막 신의 열정적인 연주는 첫번째 극단이 꿈꾸는 이상적인 결과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 이상적인 무대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네이먼과 다른 학생들이 겪었던 잔인할 정도의 고통은, 관객이 플래처의 교육방침과 네이먼의 열정에 단순히 감동할 수 없게 만든다.


과연 채찍질을 통해 만들어진 한 명의 위대한 연주자는, 그 채찍에 맞아 다친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는 매우 복잡하고, 또한 중요하며, 어려운 질문이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플래처의 교육 방식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제자의 자존심이나 인권, 명예와 같은 가치는 타인이 함부로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런 핵심적인 가치들을 무참히 짓밟는 플래처의 교육은 결과에 상관없이 잘못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얼핏 보면 이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 그런 가혹한 교육을 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극중의 네이먼도 부분적으로는 그렇고, 여러 운동선수들이 스스로 혹은 코치, 트레이너들을 통해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넣는 훈련을 추구한다는 것이 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더 가까운 예로는, 야간자율학습에 자율적으로 참가하여 스스로를 공부하도록 하는 고등학생들도 있고.


물론 위의 사례들은 플래처 교수의 가혹한 수업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면서 높은 성과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고, 때로는 자유를 빼앗긴 채로 얻은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플래처 교수의 방식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이 문제의 답은 간단하다. 플래처 교수의 교육 방침은 분명 잘못되었으나, 그 잘못은 가혹한 교육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플래처 교수가 자신의 팀에 들어오기로 한 한 모든 모든 학생에게 자신의 교육 방침과 스타일을 사전에 공지하고, 충분히 그에 공감한 학생들만으로 팀을 꾸렸다면 어땠을까? 극중 나타난 대부분의 문제들은 발생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그쳤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신과 공감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한, 소통의 문제였던 것이다.


 

복싱 일지. 일주일째

취미/복싱 | 2015. 4. 8. 01:16
Posted by 메가퍼세크

첫 날 일지를 쓴 게 어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다.


평소에도 그렇게 시간이 느리게 느껴졌던 건 아니었지만, 요새 특히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 중에는 복싱을 시작한 것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원래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서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고 있을 시간에, 스텝을 밟고 주먹을 휘두르며 무언가에 열중하는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내가 느끼는 하루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를 줄여 주었고, 매일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도착하다 보니 약간 있었던 불면증이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린 것도 하루를 짧게 느끼게 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말하자면 하루 중에서 다소 여유롭고 지루했던 시간들을 다듬어 잘라낸 느낌?


뭔가 서론이 길었지만, 요컨대 복싱이 들어간 일과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는 소리다.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건 참 위대해서, 절대로 적응할 수 없었던 첫 날의 느낌이 거짓말로 느껴질 만큼 겨우 일 주일 만에 참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줄넘기를 할 때, 한 라운드의 처음과 끝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끝이 보이지 않는 한 라운드 안에서 얼마 되지 않는 체력을 순식간에 방전시키고 한 10초쯤 헐떡거리다가 다시 줄넘기를 시작하는 과정을, 셀 수도 없이 반복하고 나서야 라운드 공이 울렸는데 이제는 대략 두 번이나 세 번쯤의 전력질주로 한 라운드를 끝낼 수 있는 역량이 갖추어진 것이다.


백 수십개에서 이백 개 정도의 줄넘기를 한 번 하고, 잠시 쉬다가 다시 백 수십개 정도를 하면 라운드의 끝나는 종이 울리는 것을 보면, 첫 날의 죽을 것 같던 고통과 끝나지 않던 한 라운드의 기억이 참 거짓말 같기도 하다. 


두 번째로, 운동하는 중 어느 정도 평상심을 유지하게 되었다.


조금만 운동해도 이미 바닥으로 추락한 체력을 붙잡고 헉헉거리며 좀비 상태로 운동을 지속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체력이 완전히 떨어져도 조금 쉬면 충분히 한 번의 루틴을 마무리할 수 있는 정도의 체력이 생겼다. 항상 유지할 수 있는 체력의 최소치가 올라갔다는 느낌인가? 덕분에 운동을 하면서 조금 더 자세와 디테일에 집중하고, 주위를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 것 같다.


세 번째로, 기술들을 배웠다.


뭐 기술이라고 해 봤자 기본은 첫 날 배운 잽과 둘째 날 배운 스트레이트, 그리고 스텝의 조합이지만. 잽과 스트레이트, 앞뒤로 뛰는 스텝을 조합한 콤비네이션들을 하나씩 배우고, 매일매일 연습하다 보니 어느 정도 자세가 잡혔다. 거울 앞에서 주먹질을 반복하는 내 모습이 매일 조금씩 그럴듯해지고, 이제 복싱이 끝났을 때 종아리만이 아니라 팔도 아프다는 데서 묘한 보람을 느낀다. 


그래 봤자 결국 아직 종아리에 배긴 알도 안 사라진 햇병아리일 뿐이기는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복싱이 무엇인지에 대해 감을 잡아가고 있다는 느낌?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올라가, 체급이 비슷한 상대와 서로 기술을 받아주다 보면 거울 앞에서 혼자 연습할 때와는 엄청나게 다른 감각을 느끼고, 이런 게 복서가 느끼는 시야구나. 하고 혼자 감탄하기도 한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지, 스파링과 비슷한 매스 복싱을 하는 분들도 몇 쌍 있었는데 그 중 몇 분들의 움직임은 정말 만화같았다. 화려한 스텝과 움직임으로 상대의 펀치는 피하고 자기 펀치는 때려넣고. 구석에 몰아넣은 후 툭툭 압박하다가 반격하려고 하면 피하고 카운터. 정말 말도 안 나올 만큼 멋있었고, 언젠가 저런 걸 하고 싶다는 목표 의식도 한 구석에 생겼다.


결과적으로, 일주일째의 감상은 만족스럽다. 계속 더 열심히 하고 싶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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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 일지. 1일째

취미/복싱 | 2015. 3. 31. 23:51
Posted by 메가퍼세크

갑자기, 운동이 하고 싶어졌다.


질풍노도의 시기부터 허구한 날 책상에만 앉아 있었던 부작용이 이제야 발병한 건지, 쌓여만 가는 스트레스를 쏟아낼 배출구가 필요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무의식 중에 운동 하나쯤은 해야겠다는 근거없는 목적의식이 생겼던 것이다.


운동 중에서도 특히 해보고 싶었던 건 격투기. 남자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쓰잘데기없는 로망도 있고, 이리저리 치고박고 하는 게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았다. 넘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해 근처 체육관들 몇 개를 싸돌아다니다가 가장 활발하고 그나마 체력소모가 적을 것 같은 복싱 체육관을 선택해 등록을 마친 게 바로 어제. 오늘부터 첫 운동을 나가기 시작했다.


집에 굴러다니던 츄리닝과 싸구려 운동화를 들고 가장 붐비는 시간에 체육관에 들어가,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처음 하게 된 것은 역시 복싱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줄넘기.


3분짜리 한 라운드와 30초의 휴식시간을 표시해 주는 공에 맞춰, 줄넘기 5라운드로 첫날 운동을 시작했다.


'3분간 줄넘기' 라는 단어를 얕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초죽음이 되어 헉헉거리며 뻗어버리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두 라운드 반쯤. 생각해보면 말이 3분이지, 줄넘기를 1초에 두 번만 한다고 쳐도 쉬지 않고 한다면 무려 360개를 해야 된다는 소리가 된다. 5라운드를 쉬지 않고 한다면 무려 1800개. 한번에 100개씩 해도 18번을 돌아야 하는 거다.


근 3년 이상 운동이라고는 전혀 손도 대지 않았던 저질 체력의 몸에 그 정도 분량의 운동을 시켜버렸으니, 결과는 뭐 뻔할 뻔자였다. 한 라운드 3분은 근 30분에 가깝게 느껴지면서도, 휴식 30초는 진짜 한 10초도 안 되는 것 같은 모순된 시간감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줄넘기를 겨우겨우 마쳤다. 줄넘기만으로 다리에 알이 배기고, 좀비처럼 줄을 돌리다가 '힘들어서 줄에 걸리는' 게 무엇인지 처음 알게 되는 신비한 경험도 했다.


그 후 배우게 된 첫 날의 진도는 가장 기초적인 복싱의 스탠스와 전진, 후진, 그리고 잽. 스탠스는 만화나 동영상 같은 데서 본 것과는 꽤 달라서, 이마 높이까지 손을 높게 올리고 가로로도 상당히 좁았다. 발의 자세는 뭐 생각하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는데, 상체는 정면을 보면서 발은 대각선 자세를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스텝을 뛰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물론 그 '어려웠다' 는 말의 의미에서 가장 컸던 건 역시 체력적인 부분이었다. 주먹을 이마 높이까지 올리고 지속적으로 무릎의 탄력을 이용해 뛰는 자세는 그 자체만으로 체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쓰다 보니 얼마 안 되는 체력은 물 흐르듯 빠져나갔고, 한 라운드를 다 채우기는 커녕 한 30초에 한번씩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며 휴식을 취하기가 다반사더라.


마지막으로 배운 잽과 스텝의 연습이 끝날 때쯤에는, 마치 배터리가 엄청 노화된 스마트폰 같다고 할까. 잠시 엎드려 숨을 몰아쉬며 체력을 눈꼽만큼 채워놓은 후 잽 몇 번으로 순식간에 방전시키고, 다시 숨을 몰아쉬는 바보같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뭐, 군대도 힘든 보직이 시간은 잘 간다고 했던가. 한 라운드 한 라운드는 엄청나게 안 가는 거 같은데, 막상 '죽겠다' 는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으니 한 번씩 시계를 보면 분침이 엄청나게 전진해 있는 게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줄넘기 3라운드로 마무리 운동을 하고 나자 어느 새 시간은 운동하러 온 지 1시간 뒤. 정말 폭풍같은 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비도 오고 약간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몸에서 비오듯 흐르는 땀과 화력발전소 수준으로 폭발하는 열 때문에 굳이 옷을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고, 입고 왔던 옷을 가방에 넣은 후 체육관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집까지 츄리닝 차림으로 걸어서 왔다.


미리 저녁을 늦게, 많이 먹었음에도 엄청나게 폭발하는 허기와 갈증 때문에 요새 거의 안 먹던 야식도 먹고 스포츠드링크도 사서 먹어보고, 여러 모로 평소와는 현저히 다른 경험을 해 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물론 그 경험에는 다리에 생긴 알과 전신에 몰려오는 피로도 포함해야겠지만,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나자 몸의 고통은 (잠시)깨끗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열심히 뺑이쳤던 기억이 미화된다고 해야 하나. 재밌었던 기억으로 바뀌더라. 뭔가 신기했다.


내일은 뭘 하게 될 지, 얼마나 빡시고 힘들 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나와 이렇게 개운한 기분으로 블로그질을 할 수 있다면, 아마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꼴랑 하루 해 놓고 너무 설레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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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리뷰(스포)

취미/영화 | 2015. 3. 10. 12:58
Posted by 메가퍼세크


킹스맨은 최고였다.


정장간지와 액션, 정신나간 스토리 전개가 합쳐져 형용할 수 없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양복입고 총쏘는 액션과  B급스러운 절단 연출 등은 이퀄리브리엄이 생각나는데, 거기에서 정장간지와 약간의 첨단장비를 더한 느낌?


스토리 자체도 뻔하디 뻔한 액션물의 과대망상증 최종보스, 무력파 중간보스, 찐따였다가 어떤 계기로 강해져서 악당을 물리치는 주인공, 강력하고 현명한 멘토라는 아주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프레임을 따왔다.


하지만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 같은 요리도 다른 사람이 만들면 맛이 달라지듯이, 그 프레임에 씌워진 살들은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영국식 정통 정장을 입고 첨단 장비를 곳곳에 숨긴 채 절제된 액션으로 적을 해치우는 등장인물들.

심지어 그들이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을 따온, 오래전부터 내려온 소수정예 첩보원이라니.


'신사', '기사', '스파이', '정장', '권총', '격투'


대부분의 사람들이 멋지다고 느끼는 '멋의 물감' 들을 잘 선별하고, 그들을 전형적인 스토리의 프레임 안에서 완벽하게 조화시켜 하나의 완성된 멋의 그림을 그렸다는 느낌이다.


물론 완성도나 영화의 전체적인 짜임새에서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왜 의족을 달고 있는지, 어떻게 격투를 그리도 잘 하는지 끝까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중간보스라던가. 주인공과의 경합 끝에 랜슬롯 자리를 차지하고도 인공위성 격추하고 전화 한 통 거는 단조로운 역할만 맡은 안습한 여자 기사. 그 어떤 의심도 없이 공짜 유심을 받아 자기 스마트폰에 꽂는 전 세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런 자잘한 단점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이 영화가 뿜어낸 멋과 임팩트가 충분했기 때문에. 결국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액션과 멋이었고, 스토리와 설정, 완성도와 같은 요소들은 모두 그것을 위한 부가적인 도구로만 작용했다.(그리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후반부에 나오는 폭죽 장면과 난데없는 스칸디나비아 공주의 섹드립. 액션과 멋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했던 약간의 시리어스함을 중화시키고, 아직도 이 영화의 성격에 대해 긴가민가했던 관객들에게 확실한 쐐기를 박는 좋은 도구였다. 맛을 살리려다 보니 너무 느끼해진 고기 요리에 뿌리는 몇 방울의 식초라고 할까?


이런 류의 영화를 원체 좋아하기도 했지만, 멋을 내는 데 쓴 재료들 자체도 개인적인 취향에 딱 들어맞아서 전체적인 감상은 퍼펙트. 속편이 나온다고 해도 같은 감독의 작품이라면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물론 나만 느끼는 감상은 아니겠지만, 머릿속에 콜린 퍼스의 간지나는 정장 차림은 당분간 클래식 정장에 대한 지름신을 일으키게 될 것 같다.


 

가을방학, 루시아 노래들.

취미/음악 | 2015. 3. 8. 03:27
Posted by 메가퍼세크

집에서 혼자 노래를 듣다 보면, '이건 나 혼자 듣기 아깝다' 싶은 곡들이 있다.


멜로디가 좋거나 가사가 좋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멜로디가 좋은 노래는 눈을 감고 머릿속을 비운 채 들을 때 진가를 발휘하고

가사가 좋은 노래는 가사창을 조금 더 키워놓고 멍하니 가사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친구들에게 노래를 들려줄 때도 멜로디가 좋은 노래는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틀어놓고 이어폰을 꽂아 주면 그만인 반면, 가사가 좋으면 가사창까지 띄워서 건네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말 가사가 좋은 곡들은 아예 노래를 떼놓고 가사만 봐도 웬만한 문학 작품 못지 않아, 아예 가사 전체를 복사해다 폴더에 모아놓기도 한다.


그런 좋은 가사를 가진 곡들 중, 내가 특히 좋아하는 두 가수의 곡을 몇 개 추려 모아보았다.

초연하고 담담하지만 잔잔한 목소리로 생각과 철학을 흐르듯 풀어내는 가을방학,

감성과 운율이 살아 있는 가사를 마치 연극배우와 같이 극도로 감정이입하여 표현해내는 루시아.

서로 정 반대라고 할 수도 있는 두 종류의 표현법이지만, 듣다 보면 약간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소개하려고 보니 대부분의 곡들이 좋아, 고르는 데 애를 먹어서 각각 5개씩만 선정했으니 여기 소개된 곡들이 마음에 든다면 다른 곡들도 들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1. 인기 있는 남자애



달달하고 스토리있는 곡.

직접적으로 결론을 내지 않고 짧고 간결한 스토리를 반복하면서 여운을 남기는 게 좋다.


2.가을방학-가을방학



참 아련하면서 공감되는 곡이다.


'너' 의 넋두리를 화자가 대신 풀어주면서, 잠시 화자의 입장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구도가 노래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라 신선했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인데도 잠시 깊게 들어가는 척 하다가 두루뭉실하게 넘어가서 너무 심각하지 않게 완급 조절을 한 것도 마음에 든다.


3.가을겨울봄여름-가을방학



글로 치자면 '수필'이나 '설'을 떠올리게 하는 가사다.

일상의 사소한 깨달음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가을방학의 스타일이 가장 잘 묻어나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


4.여배우-가을방학



'취미는 사랑' 으로 가을방학을 알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접한 곡.

소재도 좋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설레임이라는 주제가 참 괜찮은 것 같다.

그리 길지도 않은 곡 내에서 서사적 구성을 물 흐르듯이 풀어내면서, 심리적 묘사까지 충실한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5.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가을방학의 감성이 묻어나는 곡.

시시때때로 바뀌는 기분의 색깔에 대한 곡이다. 



6.루시아-선인장



이런 동식물을 소재로 한 노래도 좋다.

가시 돋힌 선인장이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 이런 가사를 생각해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7.필로소피-루시아



가사는 반복도 많고 단순한데, 참 무거운 단어가 많이 쓰인 노래다.

자신만의 철학으로 번뇌하는 연인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한 것 같은데... 곡이 좋아서 참 많이 듣긴 했지만 아직도 몇 부분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8.어떤 날도, 어떤 말도-루시아



소재는 참 단순한데, 문장과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드는 곡이다.

사랑 노래를 이런 식으로 쓰는 가수는 처음 봐서, 루시아 노래에 처음 빠졌었던 기억이 난다.


9.어른이 되는 레시피-루시아



제목도 특이하고, 내용도 특이하다.

노래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가사의 상상력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찾아보니 홍차에 계피와 레몬을 넣는 레시피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서 착안한 게 아닌가 싶다.

어른들이 마시는 홍차를 마시면,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아이의 심리? 를 표현한 게 아닐까.


10.I can'y fly-루시아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냥 문장이 좋다...

어딘가의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어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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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사랑받는 음식, 초콜릿.


개인적으로 초콜릿은 고고하게 단품으로서 맛을 발휘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과자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한 시너지 효과도 쉽사리 무시할 수는 없다.


오늘은 그 시너지 효과를 준수하게 이용한 괜찮은 과자 두 개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먼저 소개할 것은, 최상과 최악의 맛을 모두 보여준 본 마망 상표의 마지막 작품, 초콜렛&캬라멜 타르트.




겉포장은 이번에도 다른 제품들과 비슷하다.

최초로 두 가지 맛을 컨셉으로 한 제품이라 그런지, 캬라멜과 초콜릿 두 가지를 균형 있게 강조했다는 정도?


그리고 근접 샷을 업로드하려고 했지만, 깜박하고 사진을 날려먹은데다 남겨둔 과자도 없는 관계로... 어차피 두 번이나 소개했던 상품이고, 실제 모양도 겉포장에 그려진 것과 똑같으니 일단은 대충 넘어가도록 하겠다.


맛의 평가는, 미묘하지만 준수한 편이다.

한 과자에 초콜릿&캬라멜&파이 껍질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집어넣고, 밸런스를 맞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 입에 넣었을 때의 맛 밸런스는 꽤 잘 맞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끈적한 질감을 가진 캬라멜의 맛이 조금 더 강하고 오래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듯 하다.


초콜릿 부분이 단단해 보이지만 보기보다 두께가 얇아 한입 베어물면 아래의 캬라멜 층으로 자연스럽게 부서지고, 캬라멜과 파이까지 깔끔하게 입 안에 들어온 후 서로 융화되는 식감은 높게 평가할 만 하다.


초콜릿이 쿠키에 밀착되어 서로 단단하게 융합된 보통의 초콜릿 쿠키와 달리, 초콜릿이 캬라멜 층 위에 약하게 붙어있는 구조적 특징과 타르트 껍질 특유의 질감, 그 둘의 질감과 맛을 모두 감싸는 캬라멜의 느낌은 확실히 특이하고 완성도 높은 일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소한 한 번쯤 먹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피카소 초콜릿 쿠키.



겉포장과 이름을 보면 유럽 과자인 줄로 착각하기 쉽지만, 뒷면의 설명을 보니 말레이시아산이다.

왜 저런 이름을 썼는지는 알 수 없고, 위에 써 있는 'CABELL DE BRUE' 라는 문구는 구글 번역기로 수없이 돌려봤지만 어떤 나라 언어인지 모르겠다...


뭐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일단 과자를 뜯었다.



속포장이 한 번 되어 있고,




그걸 뜯으면 과자가 들어 있는 트레이가 나온다.

이 사진에서는 보기가 좀 안 좋지만,




뒤집으면 이런 모양이 나온다. 아무래도 초콜릿 부분은 압력이 가해지면 녹을 수 있으니, 다른 과자에 묻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넣어둔 듯. 처음 트레이를 보고 이번에도 창렬인가 싶었지만, 이렇듯 실용적인 목적의 포장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체적인 맛은 초콜릿과 쿠키의 두께를 두 배씩 뻥튀기한 초코틴틴에 약간 가깝다. 두 부분 다 두께가 상당한 편이고, 쿠키 부분은 평범하게 담백한 맛을 내지만 초콜릿 부분의 단맛이 상당히 강하다.


처음에는 거의 팀탐에 버금갈 정도의 단맛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먹다 보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고, 서로 두껍고 자기주장 강한 맛을 내는 초콜릿과 쿠키의 맛이 번갈아 휘몰아치다가 결국 초콜릿이 근소하게 이기는? 그런 느낌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할 것 같다. 


집어먹을 때 손가락에 초콜릿이 묻기 쉬워서 접대용으로 쓰기는 좀 그렇고, 적당히 단 맛이 필요할 때 한번씩 먹으면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또한 국내 과자에서는 찾기 힘든 맛이니까.

 

toraysee 렌즈 클리너

취미/기타 | 2015. 2. 15. 13:51
Posted by 메가퍼세크

보통 '안경닦이' 라고 부르는, 안경을 닦는 데 쓰이는 극세사 천은, '계륵'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물건이다. 있으면 여러 모로 좋지만, 딱히 없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옷자락 같은 적당한 천으로 안경을 닦다가 생긴 자잘한 기스들을 보면서 안경닦이의 필요성을 느낄 때도 많지만, 안경을 쓰고 다니는 모든 곳에 손수건만한 천을 챙겨 가기도 귀찮고, 막상 들고 나가서 잃어버리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딜레마 때문인지, (특히 남자들의 경우) 이 작은 천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은근히 찾아보기가 힘들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안경을 쓰기 시작한 어릴 적부터 잃어버린 안경닦이가 최소한 수십 장. 하도 잃어버리다 못해, "비싼 안경닦이를 사면 안 잃어버리겠지?" 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도달해 인터넷을 뒤졌던 적이 있었다.(아마 5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도레이시' 라는 일제 안경닦이가 좀 비싸지만 엄청 좋다는 말을 듣고 바로 주문, 만 원 근처라는 안경닦이로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놀랐지만, 생각보다 엄청 뛰어났던 성능에 만족하고 소중히 썼다. 하지만 사람의 습성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기에 몇 달이 지나기도 전에 그 비싼 물건조차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즈음에 바쁜 일들이 많았던지, 어쩌다 보니 다시 사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시 안경점에서 공짜로 주는 안경닦이를 쓰게 되었다.


얼마 전에 다시 생각이 나서 해당 상표의 안경닦이를 찾아보았지만, 해당 상품은 이미 품절에 새로 들어올 기약도 없고, 국내에서 구할 방도가 없는 상황. 


하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거진 한 시간여의 검색 끝에 이베이와 아마존닷컴에서 '도레이시' 라는 이름의 천조각을 찾았고, 배송비 포함 17유로(대략 2만원 이상)에 가까운 미친 가격에 잠깐 고민했지만 마침 한창 돈 쓸 데가 없던 상황이라 그냥 질러버렸고, 얼마 전 한국에 물건이 도착했다.


그렇게 5년여의 시간을 넘어 다시 재회한 그 물건의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


역시 비싼 몸이라 그런지, 흰색 바탕에 일부분만 물건이 보이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포장이 참 멋지다.

안경을 쓰는 친구들에게 줄 수 있는 색다른 선물로도 괜찮을 것 같다.


'Multi-purpose washable micro fibre lens cloth' 라는 긴 문장은 이 물건의 용도와 재질, 특성을 명확히 설명해 준다.


'다목적의, 세탁 가능한, 극세사 재질의 렌즈 클로스'


그런데, 잠깐의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이 문장의 진의는 놀라웠다.


'극세사' 라는 단어는 한 가지 섬유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는 실' 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이고, 극세사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것이, 'NP분할사' 라고 하는, 단순히 하나의 섬유를 잘게 쪼갠 종류의 극세사로, 직경은 대략 5마이크로미터 정도. 보통 안경점에서 나누어 주는 공짜 안경닦이는 보통 저급의 NP극세사를 일반적인 굵은 실과 혼방하여 직조하는 것으로, 원가는 겨우 100원 이하.


그에 비해 이 렌즈 클로스를 직조하는 데 쓰인 극세사는 '해도사' 라고 하는, 특수한 화학 공정을 통해 처음부터 엄청나게 얇게 제조한 고급 실로, 직경은 2마이크로미터 정도에 NP분할사와 달리 단면이 둥근 모양이라는 이점이 있다고 한다.


제조 원가도 비싸고 제조에 드는 기술력이 상당해서, 이 상품의 제조사인 일본의 '도레이' 나, 한국의 '코오롱' 같은 몇몇 기업만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라고.


워낙 얇다 보니 렌즈에 닿는 표면적이 넓어 본연의 목적(렌즈 클리닝)에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보통 비누로 거품을 내도 극세사 때문인지 거품이 거의 쉐이빙 폼에 가까울 만큼 작고 균일하게 나서 미용 목적으로도 많이 팔린다는 믿기지 않는 말도 있었다.


말 그대로 '다목적' 의, '질 좋은 극세사를 사용한', '최고급'의 렌즈 클로스. 이런 놀라운 품질에 대한 광고문구나 설명서 하나도 없이, 그저 시크하게 한 문장으로 상품 설명을 끝냈다는 건 대체 어떤 자신감일까. 


아무튼, 설레발은 이쯤 하고 상품을 개봉해 보자.




일단 순수 극세사라 그런지, 두께가 정말 얇다. 양면에 손가락을 마주대고 비벼 보면, 천 특유의 부피감은 간데없고 거의 기름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둔 느낌? 약간 손수건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말도 안 되는 두께 때문에 확실히 구별된다. 그렇게 얇음에도, 말도 안 될 만큼 치밀해 직조물 특유의 체크무늬는 거의 보이지도 않으며, 엄청나게 가까이에서 쳐다보아야 거의 점에 가까운 조밀한 벌집 모양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


시험삼아 렌즈를 닦아보니 그 두께 때문에 거의 손가락으로 직접 렌즈를 닦는 느낌이면서도, 렌즈에 묻은 모든 기름기나 이물질이 천으로 빨려들어가는 게 참 신기했다. 가장자리의 마감 처리도 상당히 꼼꼼하고 촘촘해서, 아무리 사용해도 실 한 오라기 하나 쉽사리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좋은 지갑을 사면 돈을 많이 쓰게 되고, 좋은 신발을 사면 많이 걸어다니고 싶게 된다고 했던가. 앞으로는 안경을 닦는다는 것의 느낌이 참 많이 달라질 것 같다. 물론 그 느낌에는, 무려 2만원이나 하는 렌즈 클로스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긴장도 (좀 많이)섞여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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