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일지. 1일째
갑자기, 운동이 하고 싶어졌다.
질풍노도의 시기부터 허구한 날 책상에만 앉아 있었던 부작용이 이제야 발병한 건지, 쌓여만 가는 스트레스를 쏟아낼 배출구가 필요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무의식 중에 운동 하나쯤은 해야겠다는 근거없는 목적의식이 생겼던 것이다.
운동 중에서도 특히 해보고 싶었던 건 격투기. 남자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쓰잘데기없는 로망도 있고, 이리저리 치고박고 하는 게 상당히 재미있을 것 같았다. 넘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해 근처 체육관들 몇 개를 싸돌아다니다가 가장 활발하고 그나마 체력소모가 적을 것 같은 복싱 체육관을 선택해 등록을 마친 게 바로 어제. 오늘부터 첫 운동을 나가기 시작했다.
집에 굴러다니던 츄리닝과 싸구려 운동화를 들고 가장 붐비는 시간에 체육관에 들어가, 잽싸게 옷을 갈아입고 처음 하게 된 것은 역시 복싱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줄넘기.
3분짜리 한 라운드와 30초의 휴식시간을 표시해 주는 공에 맞춰, 줄넘기 5라운드로 첫날 운동을 시작했다.
'3분간 줄넘기' 라는 단어를 얕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초죽음이 되어 헉헉거리며 뻗어버리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두 라운드 반쯤. 생각해보면 말이 3분이지, 줄넘기를 1초에 두 번만 한다고 쳐도 쉬지 않고 한다면 무려 360개를 해야 된다는 소리가 된다. 5라운드를 쉬지 않고 한다면 무려 1800개. 한번에 100개씩 해도 18번을 돌아야 하는 거다.
근 3년 이상 운동이라고는 전혀 손도 대지 않았던 저질 체력의 몸에 그 정도 분량의 운동을 시켜버렸으니, 결과는 뭐 뻔할 뻔자였다. 한 라운드 3분은 근 30분에 가깝게 느껴지면서도, 휴식 30초는 진짜 한 10초도 안 되는 것 같은 모순된 시간감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줄넘기를 겨우겨우 마쳤다. 줄넘기만으로 다리에 알이 배기고, 좀비처럼 줄을 돌리다가 '힘들어서 줄에 걸리는' 게 무엇인지 처음 알게 되는 신비한 경험도 했다.
그 후 배우게 된 첫 날의 진도는 가장 기초적인 복싱의 스탠스와 전진, 후진, 그리고 잽. 스탠스는 만화나 동영상 같은 데서 본 것과는 꽤 달라서, 이마 높이까지 손을 높게 올리고 가로로도 상당히 좁았다. 발의 자세는 뭐 생각하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는데, 상체는 정면을 보면서 발은 대각선 자세를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스텝을 뛰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물론 그 '어려웠다' 는 말의 의미에서 가장 컸던 건 역시 체력적인 부분이었다. 주먹을 이마 높이까지 올리고 지속적으로 무릎의 탄력을 이용해 뛰는 자세는 그 자체만으로 체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쓰다 보니 얼마 안 되는 체력은 물 흐르듯 빠져나갔고, 한 라운드를 다 채우기는 커녕 한 30초에 한번씩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며 휴식을 취하기가 다반사더라.
마지막으로 배운 잽과 스텝의 연습이 끝날 때쯤에는, 마치 배터리가 엄청 노화된 스마트폰 같다고 할까. 잠시 엎드려 숨을 몰아쉬며 체력을 눈꼽만큼 채워놓은 후 잽 몇 번으로 순식간에 방전시키고, 다시 숨을 몰아쉬는 바보같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뭐, 군대도 힘든 보직이 시간은 잘 간다고 했던가. 한 라운드 한 라운드는 엄청나게 안 가는 거 같은데, 막상 '죽겠다' 는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으니 한 번씩 시계를 보면 분침이 엄청나게 전진해 있는 게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줄넘기 3라운드로 마무리 운동을 하고 나자 어느 새 시간은 운동하러 온 지 1시간 뒤. 정말 폭풍같은 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비도 오고 약간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몸에서 비오듯 흐르는 땀과 화력발전소 수준으로 폭발하는 열 때문에 굳이 옷을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고, 입고 왔던 옷을 가방에 넣은 후 체육관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집까지 츄리닝 차림으로 걸어서 왔다.
미리 저녁을 늦게, 많이 먹었음에도 엄청나게 폭발하는 허기와 갈증 때문에 요새 거의 안 먹던 야식도 먹고 스포츠드링크도 사서 먹어보고, 여러 모로 평소와는 현저히 다른 경험을 해 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물론 그 경험에는 다리에 생긴 알과 전신에 몰려오는 피로도 포함해야겠지만,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나자 몸의 고통은 (잠시)깨끗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열심히 뺑이쳤던 기억이 미화된다고 해야 하나. 재밌었던 기억으로 바뀌더라. 뭔가 신기했다.
내일은 뭘 하게 될 지, 얼마나 빡시고 힘들 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나와 이렇게 개운한 기분으로 블로그질을 할 수 있다면, 아마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꼴랑 하루 해 놓고 너무 설레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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