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에 대한 생각

잡설 | 2018. 10. 3. 21:16
Posted by 메가퍼세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이른바 '뜨거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실과 의견, 입장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입장을 찾는 것은 급류 속에서 중심을 잡는 것과도 비슷하고, 충분히 생각하고 정리해 표현한 생각도 나중에 사태가 정리되고 천천히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것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번 사건에 대한 수많은 말들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지만 결국 사람 마음이란 게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여러 글들과 인터뷰, 영상, 댓글들을 보며 나름의 생각과 의견들이 쌓여가니, 어딘가에 갈무리라도 해 두고 싶은 마음에 여기에 글을 쓰게 되었다.


황교익이라는 사람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계기는, 한국 천일염의 문제에 대해 다룬 기사에서였다. 별 생각 없이 쓰던 천일염이 사실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지고,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를 불순물들이 포함되어 있는 위험한 조미료라는 주장을 폈는데, 그 근거로 염전 생산환경에서 쓰는 장판의 재질이나, 한국의 천일염 불순물 허용치 등을 들었다. 적어도 내가 찾아본 기사와 인터뷰들에서 황교익은 충분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으며, 과거에 자신이 천일염을 옹호했던 일에 대해서도 사과할 줄 아는 지적 양심을 갖춘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비정상회담과 알쓸신잡, 수요미식회 등의 프로그램에서 황교익이 했던 말들을 보기 시작하면서다. 방송에서 나온 말들이야 으레 앞뒤 잘리고 돌아다니기 마련인지라 크게 신용하지 않는 편이지만, 거기에 나온 몇몇 말들의 수위가 꽤 높은 것 같아서 좀더 긴 버전의 발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한정식이 기생요릿집에서 유래한 최근의 문화라거나, 불고기의 이름이 야키니쿠에서 온 말이라거나 하는 많은 쟁점들은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고, 혹시 틀린 부분이 있다고 해도 나에게는 크게 관심이 가는 분야가 아니다. 하지만, 맛이라는 분야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명확히 문제였던 것은, 방송에서 언급하는 '사실' 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그 사실을 가지고 어떤 '가치'들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단정하는 황교익의 태도였다.


알쓸신잡에서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는 건 사람들의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 착각이라면서 실제로 차이가 존재한다는 유시민을 '불쌍해 보인다', '맛있는 걸 안 먹고 자란 것 같다' 라며 조롱한다든가, 비정상회담에서 일본 요리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면서 중국과 이탈리아 요리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비하한다든가, 쌈은 한국 음식을 맛없게 만들고 재료의 분별력을 없애는 방법 중 하나라든가 하는, 타인의 취향과 가치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폄하하는 그 발언들은 황교익이라는 사람에 대한 정나미를 완전히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황교익이라는 사람은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으로 보나, 실제 방송에서의 역할로 보나, 한 분야에서의 지식을 전달해 주는 '전문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식을 탐구하고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일까? 의견이 많이 갈리겠지만, 나는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만 이야기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한 분야를 대표해 대중 앞에 나온 이상 대중은 그 분야에 대해 전문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명확히 검증된 사실들 사이에 그 전문가의 가치 판단이나 왜곡된 해석이 포함되어도 그걸 걸러낼 능력이 없다. 이런 역학관계 속에서 자신이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대중에게 설파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전문가가 아닌 '선동가'와 '사기꾼' 이 되고, 진실을 전달하는 사람의 자격을 잃는다.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달고, 어떤 음식이 '맛없는 음식' 라고 단정하는 것이 정확히 그런 행위다.


좀더 쉬운 이해를 위해 잠시 맛의 영역을 벗어나 보자. 어떤 음악 평론가가 방송에서 방탄소년단의 음악에 대해 '이런 음악은 가치가 없고, 이걸 듣는 사람들은 음악도 모르는 바보들이다' 라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그 평론가가 대중음악을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클래식 전문이라면? 그 후에 어떤 반응이 이어질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한 가지에 대해 객관적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타인의 주관적 경험의 영역에 끼어들 자격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전문가의 권위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지키는 동안에만 유효한 것이다.

 

예의와 존중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18. 8. 20. 22:50
Posted by 메가퍼세크

사람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사람의 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없이 생각해 보았을,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을 만한 그런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살아가며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때로는 그 사람들과 더없이 친해지거나 극도로 미워하는 사이가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한 사람의 인간관계 전체를 아우른다고 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답과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문제에 답하는 과정이 으레 그렇듯, 이 문제에 답하는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가 다루는 대상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와 인식이다. 가장 윗 문장에 들어 있는 두 명의 '사람', 즉 '나'와 '타인'에 대한 해석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기본적인 공리와 같다. 나는 이 중요한 위치에, '나와 타인은 동등한 위치에 있고,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권리가 없다' 라는 문장을 넣어서 생각을 시작했다. 평등과 각자의 주권 존중이야말로 인권이라는 개념의 가장 근본적인 시작이고, 동시에 인간관계의 대전제로서 가장 적합한 위치를 가질 테니까.


일단 이 단순한 문장을 전제로 삼으면, 인간관계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마주치는 많은 상황들에 대한 대답과 새로운 질문들이 솟아난다. 예컨대 서로에 대한 권리가 없는 동등한 개인이 같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에게서 그럴 수 있는 권리를 얻어야 하고, 그렇기에 '부탁'과 승낙 혹은 거절이라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부탁의 범위 안에는 서로간의 의무를 규정하는 '계약'이나 '약속'이 포함되어 있고,의무를 포함하는 관계에 동의한다면 그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따라 서로간의 '신용' 또는 '신뢰' 가 생겨난다.


이렇게 생겨난 신용과 신뢰라는 개념은 결국 타인에 대한 믿음의 지표이고, 다르게 말하면 그 사람이 나의 시간이나 돈, 또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떤 약속에 10분 늦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10분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약속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할 테니까.


나에 대한 타인의 존중도를 손쉽게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표는 '예의'라는 개념이다. 이 또한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가 있을 법한 까다로운 개념이지만, 나에게 있어 예의란 '상대의 거리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싫어하는 행동을 고의로 하지 않고, 꺼리는 화제를 억지로 꺼내지 않는 것.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사람마다 거리와 피해의 기준이 천차만별이기에 제대로 지키는 건 어렵다. 백 가지 행동을 조심하더라도 한 가지 행동을 실수하면 예의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생각도 하지 못한 행동에서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 만큼. 


그렇게 까다로운 예의들 중에서도 가장 의견이 갈리고 지키기 어려운 것은, 각자의 감정을 어떻게 표출하는지에 대한 기준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문제 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단지 상대를 무시하며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는 무례한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관점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특히 분노의 원인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에게 짜증을 표출하는 행위야말로 무례함과 천박함의 극치라고 생각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라는 개념의 본질은 그런 까다로운 기준이나 미묘한 감정들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타인과의 거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의 기준으로 타인의 호불호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되겠지' 라는 지레짐작을 버리고, 언제든지 상대가 자신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자신의 거리를 침범당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역설적이지만, 어떤 사람을 정말로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최소한의 거리를 철저하게 지킬 때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상호 존중과 진심을 다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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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능력과 차별의 문제

자아성찰/가치관 | 2018. 6. 2. 08:37
Posted by 메가퍼세크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조던 피터슨이라는 교수가 페미니즘에 대해 인터뷰한 동영상을 봤다.

https://youtu.be/N7cf_DW5CQc

시종일관 정중하고 침착한 태도로 임하는 교수의 태도와 철저한 논리 속에서 근거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주장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인터뷰 내내 교과서적인 무례함과 편협함으로 일관했던 여자 앵커의 태도였다. 교수의 주장이 담고 있는 객관적 태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한 주장을 끝임없이 감정적으로 곡해해서 받아들이며, 상대의 말을 수없이 끊어대며 자기 할 말만 한없이 반복하는, 그야말로 극단적 페미니스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모습. 


인간의 합리성을 믿는 사람이라면 크나큰 좌절과 함께 화가 치밀어 오를 만한 광경이지만, 사실 그런 순간적인 감정이야말로 문제에 대한 심층적 접근을 막는 가장 큰 장벽 중의 하나다. 부질없는 화를 억제하고 영상을 다시 보면서, 그런 극단적인 태도가 왜 생겨났을지 고찰해 보았다.


인터뷰 내내 앵커의 말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전제는, '여자는 남자에 비해 크게 차별받고 있으며, 무슨 수를 써서든 이걸 없애야 한다' 라는 가정이다. 이 가정이 정말 맞는지, 옳은지에 대한 판단을 차치하고 '차별에 대한 피해의식' 이라는 짧은 단어로 요약해보면, 문제의 본질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여성들은 자신이 크게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할까?


물론 오직 성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차별도 존재하겠지만, 중점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터뷰에서 교수가 말한 것과 같은, '실재하지 않는 차별' 에 대한 혼동이다. 정말로 받고 있는 차별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지만, 차별이 아닌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엉뚱한 사람에 대한 폭력에 불과하니까. 어째서 많은 여성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차별에도 분노를 느낄까?


물론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매우 어렵고, 사람마다 수많은 견해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는 '능력의 차이에 대한 좌절감'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자기보다 무언가를 더 잘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무력감,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성취를 금방 뛰어넘어버리는 그 누군가에 대한 좌절과 분노라는 감정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예시는 체력과 근력이다. 누구나 알듯이 일반적인 남자와 여자는 체격부터가 크게 차이가 나고, 평균 근력을 따지면 60대가 넘은 할아버지도 20~30대 여자보다 월등히 강하며, 격투기의 영역에서는 아마추어 남자 선수가 프로 여자 선수를 이기는 경우도 흔할 정도다. 물론 여자도 노력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는 강해질 수 있다지만, 160cm 정도의 보통 여자가 웬만큼 노력해 봐야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평범한 성인 남자를 이기려면 대체 얼마나 걸릴지. 결국 평범한 여자들은 매일 길에서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자신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고 생각해 보면 무서워서 밖을 걸어다닐 수나 있을까 싶고, 상당한 피해의식을 느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런 피해와 불안이 단지 여성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 세상에는 보통 여자들과 체력이 비슷한 150cm의 왜소증 남자도 있고, 꽤 강한 남자들도 웬만해서는 이길 수 없는 190cm의 근육질 여성들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비율적으로 상당한 차이는 나겠지만, 중요한 것은 똑같은 약함을 가졌더라도 150cm짜리 남자는 자신의 왜소함을 탓하지만, 160cm짜리 여자는 자신이 여자인 것을 탓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두 경우 모두 근본적인 문제는 단지 '강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는 것 뿐인데도. 바로 이런 종류의 착각이야말로 여성들이 느끼는 왜곡된 피해의식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체력과 근력처럼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은 좀 낫지만, 차이가 조금이라도 애매하거나 모호해진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철저한 논리와 합리성이 요구되는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극도의 남초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프로그래머 자리가 나서 지원했다가 떨어진 남성은 자신의 실력밖에 탓할 게 없지만, 여자는 "내가 여자라서, 능력이 떨어질 것 같다는 편견으로 떨어뜨린 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 의구심이 합리적인 범위의 검증만으로 끝난다면 참 좋겠지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특성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길과 인정하지 않는 길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근거가 부족해도 후자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때로는 그 근거 없는 선택을 한 사람들이 뭉쳐, 아무 차별이 없었던 곳에 차별이 존재한다는 착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그런 왜곡된 의식을 가장 명확히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특정 분야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성 쿼터제다. 정치, 치안, 군사 등의 분야에 여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에 상관없이 상대적으로 낮은 허들로 여성을 일정 수 이상 뽑아야 된다는 제도. 개인적으로는 이런 제도야말로 "능력에 관계없이 성별만으로 혜택을 받는" 남녀차별의 정의에 아주 정확히 부합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도대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게 다른 남자와 여자라는 두 생물이 어떤 영역에서도 같은 능력과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발상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그런 제도를 통해 충분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데서 나오는 손해는 대체 누가 책임지는 것일까? 범죄자를 잡을 능력이 떨어지는 경찰이나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군인, 유권자를 대변하기는커녕 헛소리만 하는 여성 정치인들을 만드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차별을 없애기는커녕, 페미니즘과 여성 인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을 아주 확실하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거라는 데 돈을 걸 수도 있다.


결국 저번 글과 같은 논지로 돌아가는데, 여성 인권과 페미니즘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적은, 존재 여부조차 모호한 차별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게 만드는 피해의식과 그로 인한 분노라는 것이다. 남녀평등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정말로 이루고 싶다면 우선 그것이 "능력에 따른 공정한 차별" 이라는 말과 동치라는 것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오직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확실한 차별과 부조리들을 찾아 환부를 절개하는 의사처럼 정확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분노와 피해의식을 떠넘길 간편한 대상(남자)에 집중하는 순간, 본연의 목적은 멀리 사라지고 단지 분노와 비합리성에 찌든 광신자들의 집단만이 남을 뿐이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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