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함이라는 것.

자아성찰/가치관 | 2016. 10. 24. 17:24
Posted by 메가퍼세크

대학교에 다닐 때, 토론 수업 중 상대편을 화나게 한 적이 있었다.


'인간은 이타적일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찬성과 반대 측으로 나뉘어 서로 주장을 펼치고 있었는데, 반대 측에 있었던 내가 그 즈음 일어났던 아이티 지진 사태를 주제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이티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직접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돕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구 반대편인 이곳에서 비싼 비행기 표값을 감수하며 날아가 얼마 안 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보다 그 돈을 직접 기부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람들이 타인을 도울 때 효율적인 방법보다 자신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이타적일 수 없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아닌가?"


벌써 꽤나 오래된 일이지만, 그 일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평소 봉사활동을 하던 상대편 토론자의 진심으로 빡친 표정과, 그 때의 내 말 속에 '선함' 이라는 개념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인식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어렸을 때, 아마 선함이라는 개념을 처음 인지했을 때부터, 나는 그 개념이 정말 불완전하고 애매함 투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애초에 아이들에게 선함을 가르치기 위한 교본으로 주로 사용되는 동화나 위인전에서부터, 그 개념의 모순은 도저히 숨길 수 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난하고 힘없거나 성실하며 순박한 것으로 그려지는 선한 등장인물과 못생기고 탐욕적이며 강한 힘을 가진 악한 등장인물의 대립 구도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작위적이었고, 두루뭉실하게 무조건 착한 것으로 기술되던 선역들이 결말에 가서는 악역들이 그들의 행동에 대한 '업보' 를 받도록 방치하는 권선징악의 스토리라인 또한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과 악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결국 세상을 '착함'과 '악함' 이라는 두 편으로 가르고 한 편의 행동양식을 따라 살면 상을 받고 다른 편으로 살면 벌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예언으로 보였고, 그런 예언은 결국 한쪽 편에 대한 피해의식과 증오에 가득찬 푸념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선함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성실함과 끈기, 이타심과 겸손함 같은 특질들은 내 관점에서도 제법 일리있고 괜찮다고 생각되어, 어느 순간부터 선함이라는 개념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의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단순히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선함이 아닌, 나 자신이 한 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할 수 있는 확실하고 당당한 기준을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그 첫 걸음으로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타성의 문제였다. 내 이익에 관계없이 누군가를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선의 개념이지만, 과연 정말로 그런 것이 가능할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결국 사람의 행동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행동으로부터 얻거나 잃을 것에 대한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타적인 행동의 결정 또한 결국 이런 매커니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행이라면 타인에게 나의 선함을 보이고 싶다는 욕구의 발현일 수 있고, 완전히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행이라도 '선행을 했다' 는 사실에 대한 자기만족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무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선행을 수행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행동의 동기는 '그 큰 고통과 손해보다 이 행동의 가치가 크다' 는 계산에 기반하지 않는가.


이런저런 생각의 흐름의 끝에 도달한 결론은, 선함과 악함이란 결국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의 리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을 구해서 얻을 수 있는 자신의 만족감이,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위험성에 비해 크다고 판단되었을 때 행하는 행동일 뿐. 구하지 않는 것도 단지 그 반대의 경우일 뿐.


물론 그런 계산의 기준들은 사회적인 선함의 기준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 영향을 합쳐 자신이 수립한 기준들에 따라 계산을 수행할 것이다. 단지 나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 그런 관념과 당위성에 의거하고 있다고 말하기보다 그저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는 좀더 솔직한 기준들에 의거하는 것이 좀 더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곤란해하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과, 차가 오랫동안 오지 않는 횡단보도를 빨간불에 건너는 행동은 모두 단순히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는 제멋대로인 이유에 의한 것이고, 그 행동에 대한 뿌듯함이나 죄책감 같은 건 딱히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 나로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논리적이고, 당당하고, 당연한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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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꽂힌 노래.

취미/음악 | 2016. 10. 3. 23:00
Posted by 메가퍼세크

무언가에 꽂힌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에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무언가가 오직 나에게만은 한없이 특별한 것으로 느껴지고, 몇 번이고 반복해 향유하고 싶어진다는 것. 그것을 만든 누군가의 의도와 생각이, 내 마음의 벽을 뚫고 들어와 마음 속에서 끝없이 휘돌아 가는 그 감각은,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신기하면서도 전율 가득한 순간들 중 하나다.


이번에 꽂힌 대상은 노래, 하지만 노래 전체가 아닌, 아주 좁은 한 부분이다.


곡 이름은 준수의 '꼭, 어제'



유튜브에서 루시아의 곡들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곡인데, 루시아의 음악을 들은 준수 측에서 콜라보를 제안하여 만들어진 곡이라고 한다.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던 준수의 목소리는 솔직히 내 취향에서 상당히 비껴나가 있었고, 뮤비도 전혀 스토리가 짐작되지 않는 뜬구름 잡는(내 기준에서) 느낌에, 멜로디도 그다지 귀에 확 들어오지 않는, '꽂히기' 에는 한참 부족한 노래였다.


그나마 루시아가 부른 버전은 어느 정도 마음에 들어서 꽤 여러 번을 들었지만, 특히 마음에 드는 곡들과 비교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그저 며칠 듣다 보면 질릴 법한,평범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곡을 반복해 듣다가 갑자기 귀에 들어온 가사 한 줄이, 나를 돌이킬 수 없이 꽂히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은
초라한 나의 진심은
겨우 이런 것뿐이야
그대와 함께 늙어가고 싶어요
흰머리조차도 그댄 멋질 테니까



'그대와 함께 늙어가고 싶다' 는 말. 소박하면서도 간절하고, 막연하면서도 구체적이고, 마음을 형태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짧고 간결한. 이 한 줄만큼 완벽한 고백이 어디 있을까. 결혼식장에서 부르는 축가와 같은 고백의 노래에 마지막 가사로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이 짧은 가사 몇 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꽂힘은 며칠이면 끝날 것 같았던 이 곡의 감상 횟 수를 수십 배 이상으로 늘렸는데, 아무래도 꽂힘이라는 현상은 전염성이 있는 것인지. 마음에 들지 않던 멜로디나 곡의 진행, 심지어 내 취향의 반대에 가까웠던 준수의 목소리까지도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 꽤나 좁고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내 취향의 폭이 확장된 것은 정말 오랜만인데, 꽂힌다는 것은 이 정도까지 위력적인 현상이었던 걸까.


부디, 앞으로의 인생을 사는 동안에도 지금과 같은 꽂힘과 그 열병 같은 감동의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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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선택의 문제에 대하여

자아성찰/가치관 | 2016. 9. 26. 23:16
Posted by 메가퍼세크

언제나 선거철이 되면,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투표해라, 누구를 찍어라, 찍을 사람이 없으면 무효표라도 던지라는 외침. 낮은 투표율과 선거일을 놀러 가는 날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불만스러운 생각이 든다.


 물론 전체 사회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서 투표하고, 결과적으로 최적의 지도자들 뽑아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겠지만, 언제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고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인류에게 필연적인 것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 판단의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정할 권리 또한 있다.


 생각해 보자. 개인의 입장에서 투표란 복잡한 행동이다. 후보자 각각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가치 판단을 내리고, 투표장에 직접 가기까지 참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반면 그로 인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작아도 최소 수천, 수만 표에서 수백만 표가 왔다갔다하는 일반적인 투표에서 한 사람의 표가 차지하는 비중은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내려가야 한다. 아주 적게 만 명이라고만 가정해도 한 사람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0.01%.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고, 결국 개인의 입장에서 투표라는 행위가 주는 실질적인 이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투표를 할까? 누구나 알다시피, 이것은 의미 부여의 문제다. 세상에는 아주 작은 영향력이나마 자신이 행사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이나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스스로에게 별 이득이 없고 투자해야 하는 것만 있는 일이라도, 스스로 당위성이나 의무감, 행위에 따른 의무감 등을 느낄 수 있다면 기꺼이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특질이 결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할 필요 또한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할 필요가 없고, 단순히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의미 부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심지어 법으로 보장된 투표의 권리가 '국민의 의무' 같은 거창한 구호와 함께 사회적 선으로 취급되고,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식이 그 반대급부로 나빠지는 현재의 세태는 과연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충분한 투표율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구성원들의 관심으로 지탱되는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무관심의 자유' 라는, 또 다른 가치 또한 존중되는 세상을 원하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개인적으로는, 내가 투표를 하는 행동의 결정이 그 행동의 사회적 인식이나 투표 안 한 사람에 대한 주변의 싸늘한 눈길에 의해서보다는 투표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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