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에 대한 생각.

잡설 | 2017. 8. 2. 08:17
Posted by 메가퍼세크

2016년 3월, 구글의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는 이세돌을 4:1로 이겼고

2017년 5월에는 커제를 3:0으로 이기고

그 직후, 자가 대국의 기보 50국을 공개해서 바둑의 역사를 뒤집어놓았다.


수십 년 동안 몸을 바쳐 연구해왔던 성과가 하루아침에 날아간 바둑 기사들의 좌절도 상당하겠지만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인류의 바둑 지식과,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인류의 추리 능력의 일각이 정복당한 것에 비하면 오히려 사소한 충격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다행히, 이런 일이 완전히 처음인 것은 아니다. 주먹도끼의 발명에서부터 계산기와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항상 도구를 사용해 자신의 능력을 보충해 왔고, 그 도구의 능력이 자신을 아득히 추월하는 경험은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도 기중기의 힘을 이길 수는 없고, 수십 년 동안 직물을 짜온 사람도 기계보다 빠르게 직물을 만들 수는 없으며, 사칙연산이 아무리 빨라도 컴퓨터나 계산기 안에서 오가는 전류의 속도보다 빠를 수는 없다. 도구가 인간의 능력을 앞지를 때마다 문명은 크게 발전했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의 재능과 능력이 쓸모없는 것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자존심의 소멸보다 이번 사건이 더 충격적인 것은, 이번에 추월당한 능력에 인간의 가장 큰 자존심과 자부심이 걸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부터 대부분의 동물보다 느리고, 힘도 약하고, 민첩하지도 못한 약한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힘이나 속도에 대한 집착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지만, 그런 약한 동물이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게 해 준 두뇌의 지능과 문제 해결 능력은 절대 추월당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물론 계산기나 컴퓨터는 그런 능력의 지엽적인 부분을 더욱 수월하게 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문제 해결의 핵심적인 부분을 인간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인간이 관측 가능한 우주에 대한 어느 정도 광범위한 탐사에서도 지능은 발견되지 않았고, 고도의 지능이라는 것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하게 인간에게만 주어진 대단한 능력이라는 허영 섞인 의식이 자리잡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그 지구상에서 독보적인(이었던) 문제 해결 능력의 한 영역에서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기계에게 더없이 완벽하게 패배했고, 심지어 자신이 수백 년 동안 연구한 모든 것(포석과 정석)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들을 발견해 버렸으니... 인간의 가장 큰 자존심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가 남아 버렸다.


물론 아직 이 상처를 축소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취는 인간의 손으로 그 목표를 한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학습시켰기에 가능했던 것이므로. 인간의 자존심을 긁어버린 이 우월한 동물은 인간의 손으로 키워진 가축일 뿐이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목표를 설정하는' 능력조차도 인공지능의 것이 된다면, 과연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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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함이라는 것.

자아성찰/가치관 | 2016. 10. 24. 17:24
Posted by 메가퍼세크

대학교에 다닐 때, 토론 수업 중 상대편을 화나게 한 적이 있었다.


'인간은 이타적일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찬성과 반대 측으로 나뉘어 서로 주장을 펼치고 있었는데, 반대 측에 있었던 내가 그 즈음 일어났던 아이티 지진 사태를 주제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이티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직접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돕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구 반대편인 이곳에서 비싼 비행기 표값을 감수하며 날아가 얼마 안 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보다 그 돈을 직접 기부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람들이 타인을 도울 때 효율적인 방법보다 자신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이타적일 수 없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아닌가?"


벌써 꽤나 오래된 일이지만, 그 일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평소 봉사활동을 하던 상대편 토론자의 진심으로 빡친 표정과, 그 때의 내 말 속에 '선함' 이라는 개념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인식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어렸을 때, 아마 선함이라는 개념을 처음 인지했을 때부터, 나는 그 개념이 정말 불완전하고 애매함 투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애초에 아이들에게 선함을 가르치기 위한 교본으로 주로 사용되는 동화나 위인전에서부터, 그 개념의 모순은 도저히 숨길 수 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난하고 힘없거나 성실하며 순박한 것으로 그려지는 선한 등장인물과 못생기고 탐욕적이며 강한 힘을 가진 악한 등장인물의 대립 구도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작위적이었고, 두루뭉실하게 무조건 착한 것으로 기술되던 선역들이 결말에 가서는 악역들이 그들의 행동에 대한 '업보' 를 받도록 방치하는 권선징악의 스토리라인 또한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과 악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결국 세상을 '착함'과 '악함' 이라는 두 편으로 가르고 한 편의 행동양식을 따라 살면 상을 받고 다른 편으로 살면 벌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예언으로 보였고, 그런 예언은 결국 한쪽 편에 대한 피해의식과 증오에 가득찬 푸념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선함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성실함과 끈기, 이타심과 겸손함 같은 특질들은 내 관점에서도 제법 일리있고 괜찮다고 생각되어, 어느 순간부터 선함이라는 개념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의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단순히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선함이 아닌, 나 자신이 한 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할 수 있는 확실하고 당당한 기준을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그 첫 걸음으로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타성의 문제였다. 내 이익에 관계없이 누군가를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선의 개념이지만, 과연 정말로 그런 것이 가능할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결국 사람의 행동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행동으로부터 얻거나 잃을 것에 대한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타적인 행동의 결정 또한 결국 이런 매커니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행이라면 타인에게 나의 선함을 보이고 싶다는 욕구의 발현일 수 있고, 완전히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행이라도 '선행을 했다' 는 사실에 대한 자기만족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무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선행을 수행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행동의 동기는 '그 큰 고통과 손해보다 이 행동의 가치가 크다' 는 계산에 기반하지 않는가.


이런저런 생각의 흐름의 끝에 도달한 결론은, 선함과 악함이란 결국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의 리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을 구해서 얻을 수 있는 자신의 만족감이,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위험성에 비해 크다고 판단되었을 때 행하는 행동일 뿐. 구하지 않는 것도 단지 그 반대의 경우일 뿐.


물론 그런 계산의 기준들은 사회적인 선함의 기준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 영향을 합쳐 자신이 수립한 기준들에 따라 계산을 수행할 것이다. 단지 나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 그런 관념과 당위성에 의거하고 있다고 말하기보다 그저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는 좀더 솔직한 기준들에 의거하는 것이 좀 더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곤란해하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과, 차가 오랫동안 오지 않는 횡단보도를 빨간불에 건너는 행동은 모두 단순히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는 제멋대로인 이유에 의한 것이고, 그 행동에 대한 뿌듯함이나 죄책감 같은 건 딱히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 나로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논리적이고, 당당하고, 당연한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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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꽂힌 노래.

취미/음악 | 2016. 10. 3. 23:00
Posted by 메가퍼세크

무언가에 꽂힌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에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무언가가 오직 나에게만은 한없이 특별한 것으로 느껴지고, 몇 번이고 반복해 향유하고 싶어진다는 것. 그것을 만든 누군가의 의도와 생각이, 내 마음의 벽을 뚫고 들어와 마음 속에서 끝없이 휘돌아 가는 그 감각은,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신기하면서도 전율 가득한 순간들 중 하나다.


이번에 꽂힌 대상은 노래, 하지만 노래 전체가 아닌, 아주 좁은 한 부분이다.


곡 이름은 준수의 '꼭, 어제'



유튜브에서 루시아의 곡들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곡인데, 루시아의 음악을 들은 준수 측에서 콜라보를 제안하여 만들어진 곡이라고 한다.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던 준수의 목소리는 솔직히 내 취향에서 상당히 비껴나가 있었고, 뮤비도 전혀 스토리가 짐작되지 않는 뜬구름 잡는(내 기준에서) 느낌에, 멜로디도 그다지 귀에 확 들어오지 않는, '꽂히기' 에는 한참 부족한 노래였다.


그나마 루시아가 부른 버전은 어느 정도 마음에 들어서 꽤 여러 번을 들었지만, 특히 마음에 드는 곡들과 비교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그저 며칠 듣다 보면 질릴 법한,평범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곡을 반복해 듣다가 갑자기 귀에 들어온 가사 한 줄이, 나를 돌이킬 수 없이 꽂히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은
초라한 나의 진심은
겨우 이런 것뿐이야
그대와 함께 늙어가고 싶어요
흰머리조차도 그댄 멋질 테니까



'그대와 함께 늙어가고 싶다' 는 말. 소박하면서도 간절하고, 막연하면서도 구체적이고, 마음을 형태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짧고 간결한. 이 한 줄만큼 완벽한 고백이 어디 있을까. 결혼식장에서 부르는 축가와 같은 고백의 노래에 마지막 가사로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이 짧은 가사 몇 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꽂힘은 며칠이면 끝날 것 같았던 이 곡의 감상 횟 수를 수십 배 이상으로 늘렸는데, 아무래도 꽂힘이라는 현상은 전염성이 있는 것인지. 마음에 들지 않던 멜로디나 곡의 진행, 심지어 내 취향의 반대에 가까웠던 준수의 목소리까지도 어느 정도 괜찮아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 꽤나 좁고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내 취향의 폭이 확장된 것은 정말 오랜만인데, 꽂힌다는 것은 이 정도까지 위력적인 현상이었던 걸까.


부디, 앞으로의 인생을 사는 동안에도 지금과 같은 꽂힘과 그 열병 같은 감동의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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