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감정에 둔감한 편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삶의 여러 장면들에서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들을 또렷하게 느끼는 일이 남들보다는 드물고, 설령 그런 감정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에 온전히 휩쓸리기보다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고 노력해 왔다.
감정이란 건 도대체 뭘까. 감정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그것이 이성과 대비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여러 현상들을 보고 느끼는 것들을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연결로 설명하려는 이성적 접근과 달리, 감정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즉각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성에 대해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개념을 엄밀히 따지기 시작하면 복잡해지겠지만, 내게 있어 이성은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에 기반한 하나의 세계관에 가깝다. 외부의 정보가 들어왔을 때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섣불리 원인을 단정하지 않고, 모른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 만약 그 정보에 대해 어떤 의견을 말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 한 철저히 조사하고 그 판단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태도 같은 것이다. 사람마다 의견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방식을 고수하려 노력하는 것이 이성적 사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무엇인가. 그런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를 잠시 접어두고,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무언가 행동하게 만드는 방향성, 또는 충동을 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 어떤 사건을 저질렀다는 뉴스를 봤을 때,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 그런 판단은 중립적이어야 할 사고의 흐름에 방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감정의 개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좋고 나쁨의 문제라기보다는, 감정이 이성적 사고를 편향시키는 하나의 경향성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인간의 사고를 컴퓨터와 같은 계산 기계로 생각한다면, 이런 대립적 요소들은 더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사고를 수행하는 방식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극들을 일정한 구조 안에서 처리하는 일종의 운영체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이성이라는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고, 때때로 그 흐름을 방해하거나 우회시키는 별도의 신호들, 즉 감정적 요소들이 있다. 그것들은 단순한 오류일 수도, 외부로부터 주입된 악성 코드일 수도, 혹은 애초에 커널에 새겨진 근본 설정일 수도 있다. 종류를 막론하고 그런 감정이 활성화되는 순간, 이성이라는 프로그램은 더 이상 정보를 객관적으로 모으고 분석하는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불충분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거나, 입력된 정보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일 등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사고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이상, 감정 그 자체도 근본적으로는 분석 가능한 범위 안에 있을 것이다. 예컨대 내가 분노라는 감정을 느꼈다면, 그 감정을 유발한 조건은 무엇인지, 그것이 내 사고 구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나아가 그런 감정의 개입이 전체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등을 하나씩 따져볼 수 있다. 감정이 객관화되고 분석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무언가가 아니라 일정 정도 관리 가능한 신호로 바뀐다. 심리학이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명상, 혹은 메타인지는 바로 그런 능력과 태도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분석하고 통제하는 것이 언제나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이성이란 결국 현실에서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것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가능한 선택지를 평가해 그중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프레임워크일 뿐이다. 그것은 사고의 도구이지, 사고의 방향성이나 목적 자체는 아니다. 내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거나,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를 추구하는 사고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성적 사고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성의 방향을 설정하는 더 상위의 감정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감정이란 것은 때때로 이성의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성이 어떤 목표를 향해 작동하게 만드는 원천적 동기이기도 하다.
결국 사람의 사고 구조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활용하게 되는 가장 큰 기계이고, 그것을 잘 써먹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단순한 구분을 뛰어넘어 스스로의 사고 구조 전체를 깊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예컨대 내 경우에는 누군가의 주장에서 이성적인 허점을 발견했을 때 반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는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를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차적으로는 내가 가진 그런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통해 원칙을 지키는 자기 자신을 뽐내거나 스스로 만족하고 싶은 감정적 욕구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감정적 동기는 보통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고,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합리화하는 데 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캐내는 일은 굉장히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그나마 나의 경우에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싶다는 원천적 욕구가 있기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동기’조차 감정의 산물인 이상, 내가 느끼는 것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감정을 파헤치는 데 사용한 이성은 또 다른 감정에 의해 동작하는 것이고, 그 감정을 해석하려는 시도 또한 결국은 다른 감정의 영향 아래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순환할 뿐이라면, 나의 정신세계와 감정적 동기를 완전히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듯 스스로의 운영체제를 완전히 분석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더라도 그 사실을 온전히 마주하고, 가능한 한 정직하게 스스로를 고찰하려는 태도는 여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적 욕구 중 하나가 ‘이성적이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그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스스로를 계속해서 진실하게 고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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