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에 대한 생각

잡설 | 2018. 10. 3. 21:16
Posted by 메가퍼세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이른바 '뜨거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실과 의견, 입장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입장을 찾는 것은 급류 속에서 중심을 잡는 것과도 비슷하고, 충분히 생각하고 정리해 표현한 생각도 나중에 사태가 정리되고 천천히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것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번 사건에 대한 수많은 말들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지만 결국 사람 마음이란 게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여러 글들과 인터뷰, 영상, 댓글들을 보며 나름의 생각과 의견들이 쌓여가니, 어딘가에 갈무리라도 해 두고 싶은 마음에 여기에 글을 쓰게 되었다.


황교익이라는 사람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계기는, 한국 천일염의 문제에 대해 다룬 기사에서였다. 별 생각 없이 쓰던 천일염이 사실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지고,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를 불순물들이 포함되어 있는 위험한 조미료라는 주장을 폈는데, 그 근거로 염전 생산환경에서 쓰는 장판의 재질이나, 한국의 천일염 불순물 허용치 등을 들었다. 적어도 내가 찾아본 기사와 인터뷰들에서 황교익은 충분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으며, 과거에 자신이 천일염을 옹호했던 일에 대해서도 사과할 줄 아는 지적 양심을 갖춘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비정상회담과 알쓸신잡, 수요미식회 등의 프로그램에서 황교익이 했던 말들을 보기 시작하면서다. 방송에서 나온 말들이야 으레 앞뒤 잘리고 돌아다니기 마련인지라 크게 신용하지 않는 편이지만, 거기에 나온 몇몇 말들의 수위가 꽤 높은 것 같아서 좀더 긴 버전의 발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한정식이 기생요릿집에서 유래한 최근의 문화라거나, 불고기의 이름이 야키니쿠에서 온 말이라거나 하는 많은 쟁점들은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고, 혹시 틀린 부분이 있다고 해도 나에게는 크게 관심이 가는 분야가 아니다. 하지만, 맛이라는 분야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명확히 문제였던 것은, 방송에서 언급하는 '사실' 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그 사실을 가지고 어떤 '가치'들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단정하는 황교익의 태도였다.


알쓸신잡에서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는 건 사람들의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 착각이라면서 실제로 차이가 존재한다는 유시민을 '불쌍해 보인다', '맛있는 걸 안 먹고 자란 것 같다' 라며 조롱한다든가, 비정상회담에서 일본 요리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면서 중국과 이탈리아 요리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비하한다든가, 쌈은 한국 음식을 맛없게 만들고 재료의 분별력을 없애는 방법 중 하나라든가 하는, 타인의 취향과 가치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폄하하는 그 발언들은 황교익이라는 사람에 대한 정나미를 완전히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황교익이라는 사람은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으로 보나, 실제 방송에서의 역할로 보나, 한 분야에서의 지식을 전달해 주는 '전문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식을 탐구하고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일까? 의견이 많이 갈리겠지만, 나는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만 이야기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한 분야를 대표해 대중 앞에 나온 이상 대중은 그 분야에 대해 전문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명확히 검증된 사실들 사이에 그 전문가의 가치 판단이나 왜곡된 해석이 포함되어도 그걸 걸러낼 능력이 없다. 이런 역학관계 속에서 자신이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대중에게 설파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전문가가 아닌 '선동가'와 '사기꾼' 이 되고, 진실을 전달하는 사람의 자격을 잃는다.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달고, 어떤 음식이 '맛없는 음식' 라고 단정하는 것이 정확히 그런 행위다.


좀더 쉬운 이해를 위해 잠시 맛의 영역을 벗어나 보자. 어떤 음악 평론가가 방송에서 방탄소년단의 음악에 대해 '이런 음악은 가치가 없고, 이걸 듣는 사람들은 음악도 모르는 바보들이다' 라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그 평론가가 대중음악을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클래식 전문이라면? 그 후에 어떤 반응이 이어질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한 가지에 대해 객관적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타인의 주관적 경험의 영역에 끼어들 자격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전문가의 권위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지키는 동안에만 유효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면

잡설 | 2018. 3. 4. 22:25
Posted by 메가퍼세크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지능이라는 능력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넓어지고,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부분들에 대한 인공지능의 수행 능력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 인류 최고의 바둑 기사가 인공지능 앞에서 무릎꿇는 것을 목도한 사람들이 미래의 인공지능이 정복할 영역들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뛰어난 능력의 로봇으로 인한 대규모의 일자리 소멸과 제 2의 러다이트 운동에서부터 자신보다 바둑도 못 두는 인간에게 반기를 든 로봇의 반란, 로봇을 통해 한층 더 효율적으로 세상을 멸망시킬 테러 조직과 군대에 대한 우려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는 데 있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만, 정작 그런 상상들 중 어떤 것이 가능성이 높은지에 대한 고찰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개인적으로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잘 언급되지 않는 한 시나리오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이 스스로 이루어낸 성취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 중 하나는, 자신의 복잡한 내면, 외면적 가치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해낸 "예술"이라고 불리는 영역이다. 작게는 한 인간의 삶에서, 크게는 사회나 국가에 걸친 거시적인 주제들을 다루기도 하는 이 영역은 모든 문화권과 지역과 시대에 걸쳐 언제나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간 지능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정수이자 단순한 실용적 사고와 계산적 능력으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냉정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과연 예술이라는 영역은 다른 지능적 행동들과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을까? 베토벤의 음악과 톨스토이의 소설은 이성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어떤 번뜩이는 것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적 창조성이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가장 단순한 관념은, 예컨대 오선지 몇백 줄에 음표를 채워넣을 수 있는 천문학적 가짓수를 이성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논리에 기인한다. 인간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가능성의 바다에서 듣거나 보기 좋은 무언가를 '창조'해 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에 입각하지 않은 새로운 차원의 능력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듣거나 보기 좋은" 이라는 조건이 이성적으로 계산해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해야 할 것은, 이 전제가 과연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인공지능 분야의 눈부신 발전은 "아니"라는 답변의 설득력을 급속하게 올리고 있다. 당장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서 가장 좋은 수를 찾아낸 알파고의 사례가 가장 큰 반증이다. 딥 러닝의 알고리즘은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서 가장 기준에 부합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모든 경우를 탐색하는 대신 몇 가지 가능성에서 시작해서 조금 더 그 기준을 잘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최적의 가능성에 해당하는 점들을 빠르게 찾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알고리즘들이 예술 영역에 적용되는 것도 결국 시간의 문제가 아닐까. 인간이 청각으로 느끼는 감각과 취향의 기준 함수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오선지의 가능성 공간에서 딥 러닝을 수행하면 인간이 "듣기 좋은" 음악의 가능성의 점(=걸작)들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런 사태가 실제로 벌어진다면, 즉 인공 지능의 예술적 능력이 인간을 초월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적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은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에 비해 소수에게만 주어지고, 그렇기에 하나의 예술 작품은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무난한 취향과 감각의 기준 함수를 만족하는 선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딥 러닝으로 자기 집에서 예술 작품을 즐길 수 있다면, 오직 한 사람만의 기준 함수에 맞추어 그 사람에게 가장 재미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걸작"의 의미는 어떻게 될까.


또한, 인공 지능의 창작 능력을 이용해 언제든 "보고 싶은" 스타일의 예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완결되었거나 작가의 절필로 더 이상 후속작을 볼 수 없는 작품이 있다면, 그 작품의 스타일을 모두 입력하고 다음 시리즈를 뽑아내면 된다. 예컨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코난 도일의 스타일을 완벽히 모방한 주문제작 홈즈 시리즈를 영원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상황일 수도 있고, 예술에 종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악몽과 같은 상황일 수도 있겠다. 좋게 생각하면 누구나 자기 취향을 만족시키며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나쁘게 생각하면 모두가 자신만의 취향에 빠져 소통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생각하는 예술이라는 개념이 아주 큰 변화를 겪게 되리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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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 대한 생각.

잡설 | 2017. 8. 2. 08:17
Posted by 메가퍼세크

2016년 3월, 구글의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는 이세돌을 4:1로 이겼고

2017년 5월에는 커제를 3:0으로 이기고

그 직후, 자가 대국의 기보 50국을 공개해서 바둑의 역사를 뒤집어놓았다.


수십 년 동안 몸을 바쳐 연구해왔던 성과가 하루아침에 날아간 바둑 기사들의 좌절도 상당하겠지만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인류의 바둑 지식과,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인류의 추리 능력의 일각이 정복당한 것에 비하면 오히려 사소한 충격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다행히, 이런 일이 완전히 처음인 것은 아니다. 주먹도끼의 발명에서부터 계산기와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항상 도구를 사용해 자신의 능력을 보충해 왔고, 그 도구의 능력이 자신을 아득히 추월하는 경험은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도 기중기의 힘을 이길 수는 없고, 수십 년 동안 직물을 짜온 사람도 기계보다 빠르게 직물을 만들 수는 없으며, 사칙연산이 아무리 빨라도 컴퓨터나 계산기 안에서 오가는 전류의 속도보다 빠를 수는 없다. 도구가 인간의 능력을 앞지를 때마다 문명은 크게 발전했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의 재능과 능력이 쓸모없는 것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자존심의 소멸보다 이번 사건이 더 충격적인 것은, 이번에 추월당한 능력에 인간의 가장 큰 자존심과 자부심이 걸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부터 대부분의 동물보다 느리고, 힘도 약하고, 민첩하지도 못한 약한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힘이나 속도에 대한 집착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지만, 그런 약한 동물이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게 해 준 두뇌의 지능과 문제 해결 능력은 절대 추월당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물론 계산기나 컴퓨터는 그런 능력의 지엽적인 부분을 더욱 수월하게 해 주었지만, 그럼에도 문제 해결의 핵심적인 부분을 인간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인간이 관측 가능한 우주에 대한 어느 정도 광범위한 탐사에서도 지능은 발견되지 않았고, 고도의 지능이라는 것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하게 인간에게만 주어진 대단한 능력이라는 허영 섞인 의식이 자리잡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그 지구상에서 독보적인(이었던) 문제 해결 능력의 한 영역에서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기계에게 더없이 완벽하게 패배했고, 심지어 자신이 수백 년 동안 연구한 모든 것(포석과 정석)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들을 발견해 버렸으니... 인간의 가장 큰 자존심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가 남아 버렸다.


물론 아직 이 상처를 축소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취는 인간의 손으로 그 목표를 한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학습시켰기에 가능했던 것이므로. 인간의 자존심을 긁어버린 이 우월한 동물은 인간의 손으로 키워진 가축일 뿐이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목표를 설정하는' 능력조차도 인공지능의 것이 된다면, 과연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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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에 대하여

잡설 | 2016. 2. 14. 23:15
Posted by 메가퍼세크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높은 곳에서 남을 깔보기 위해 들이는 노력들이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어찌 보면 그런 노력들이 사람을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가끔은 너무나 애처롭게 보일 때가 있다.


어린아이 시절에는 누구나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던 관심이라는 자원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쉽게 얻기 힘든 희소한 자원이 되어 가고. 그럼에도 어릴 때처럼 무제한의 관심을 다시 한 번 가지고 싶어하는 아이 같은 마음은 없어지지 않기에 모두가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는 것인지. 티 없이 웃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은 항상 보기 좋으면서도, 언젠가 그 아이들이 차가운 세상에 던져져 느낄 기분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가라앉곤 한다.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연인이나 친구를 만들어 관심을 교환하거나, 지위나 명성이라는 매개체를 얻으려 노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관심에 대한 욕구를 잠시 잊을 수 있는 행동에 전념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해 가는데, 그런 방법 중 가장 서투르면서도 직접적인 것은 '허세 부리기' 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TV나 인터넷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유명한 인물들의 이야기. 뛰어난 능력을 통해 많은 관심을 얻으며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동경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별다른 노력 없이 어릴 적부터 변함없는 관심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재능 있는 사람들, '천재' 들의 이미지를 선망하는 것.


그런 선망은 보통 특별한 재능이 없는 자신에 대한 좌절과 다른 형태의 행복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지만, 가끔은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벗어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 자기 자신에게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라고 끝없이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이, '허세' 를 부리는 사람들의 사정이 아닐까.

 

'위플래쉬' 와 잔혹 동시집 사태에 대한 생각

잡설 | 2015. 5. 25. 22:39
Posted by 메가퍼세크

몇 주 전에 위플래쉬를 보고 리뷰 하나를 휘갈겼는데, 영 뒷맛이 좋지 않았다. 필력의 한계인지 표현력의 한계인지, 내가 느꼈던 복잡한 기분을 거의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그동안 여러 가지로 많은 노력을 했고, 그 결과로 조금이나마 더 숙성되고 다듬어진 내 생각들을 다시 한 번 여기에 정리해 보려 한다.




'가르친다' 는 것은 무엇일까?


교육, 훈련, 훈육. 다양한 종류의 가르침을 일컫는 많은 말들이 있지만, 모두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킨다' 는 뜻을 담고 있다. 자잘한 단어의 뉘앙스 차이는 주로 그 변화가 어떤 면에서 일어나는지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변화는 보통 크게 두 가지, 기능적 변화와 인간적 변화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기능적 가르침은, 주로 '훈련' 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훈련을 주도하는 사람은 총을 쏘거나, 못을 박거나, 음식을 만드는 것과 같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기술들을 높은 수준으로 익히고 있고, 그런 기능들을 훈련받는 사람에게 전수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서로의 합의에 기반하며, 일종의 거래로 생각할 수 있다.


반면 '교육' 이나 '훈육' 같은 단어로 일컫는 인성적 가르침은 좀 더 복잡하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무언가의 방법을 통해 교육자가 교육받는 사람의 정신세계에 고의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이다. 예컨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조금 더 생각하게 된다던가, 함부로 물건을 부수지 않는다던가 하는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인성적 변화를 주는 가르침의 복잡함은, 그 가르침의 당위성을 판단할 때 드러난다.


어떤 가르침이 '당위를 가진다' 고 표현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두 입장에서의 만족도를 생각할 수 있다.(앞으로 편의상 '스승' 과 '제자' 로 통칭한다) 스승과 제자가 모두 가르침을 주고 받고자 하는 의사가 있고, 그 과정과 결과에 만족한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결과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있기에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헬스 트레이너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트레이너의 제자는 자신의 몸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키고자 하는 큰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트레이너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여러 가르침을 받는다, 이 가르침은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운동의 방법을 배우는 것만을 이야기하겠지만, 많은 트레이너들은 제자가 덤벨을 더 이상 들 수 없다고 할 때 한두 번 더 시키는 것처럼, 기능적인 가르침의 영역을 벗어나곤 한다. 이는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제자의 의사를 거슬러 가르침을 강요하는 행동이지만, 보통 여기에 불평을 표하는 제자는 거의 없다. '자신의 몸을 변화시킨다' 는, 조금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위플래쉬의 플래처 교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비인간적인 긴장과 인간적 모욕, 체벌이라는 매우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교육을 시행했다.

모욕을 당한 제자 한 명이 자살하는 등 그의 교육의 부작용은 매우 컸지만, 사실 기본적인 구도는 위의 예시와 그렇게 다를 것이 없다. 교육의 장기적인 목적은 '명 연주자의 양성' 이고, 그것을 위해 제자에 대한 체벌, 인격 모독, 고압적인 분위기 등을 활용해 정신적 충격을 주어, 그 반동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극단적이고 도박적인 방법은 맞지만, 본질적으로 틀린 방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국 두 예시 모두 시간에 따라 제자의 정신 상태가 변하는 가르침의 과정이고, 헬스 트레이너의 사례에서 중간 과정보다 마지막에 다다른 제자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여기에서도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플래처의 방법이 정말로 명연주자를 양성할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는 그 방법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너무 과할 만큼 강하게 시행했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있겠지만.


또한 얼마 전에 일어났던 잔혹 동시집 사태도 이런 프레임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 특정한 인성적 가르침을 단계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된 관습이고, 여러 가지 이유로 당연시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항상 밝고 명랑하고 선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고, 단지 보편적인 고정관념이었을 뿐이다. 어린이들의 정신세계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확연히 달랐고, 이전의 관념과 대비되는 잔혹함도 충분히 들어 있었다.


물론 어린이들의 그런 면들이 소름끼친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런 부분이 빼놓을 수 없는 아이들의 진짜 '동심'의 일부분이라면, 어른들에게는 교육을 통해 그것을 왜곡시킬 권리가 있는 것일까? 이는 정말로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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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와 휴식에 대하여

잡설 | 2015. 4. 14. 00:50
Posted by 메가퍼세크

요새, 생활에 여유가 없다.


일은 그렇게 바쁘지 않고, 출근과 퇴근도 자유롭고, 취미 활동도 충분하고,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어쩐지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휴식이 부족한가 싶어 잠자는 시간도 늘려 보고,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쉬기도 하고, 독서도 했지만 마음의 여유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원래부터 그리 안정적인 정신상태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로 무언가에 휘둘리는 느낌은 처음이었기에 문득 내가 편안하게 쉬고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야간자율학습 시간.


매일 한두 시간 동안 죽어라고 공부를 하다가,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1층으로 내려가  교정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셨다.


굳이 1층까지 내려갔던 이유는, 그 자판기가 조금 특이했기 때문에. 다른 자판기 커피와는 조금 다르게, 커피 가루와 물을 섞어서 내려주는 게 아니라 물과 커피가 따로 내려온 이후 젓는 막대가 꽂혀서 나왔다. 신기하기도 했고, 기분 탓인지 다른 자판기 커피보다 조금이라도 더 맛있어 보여서 거의 그 자판기 커피만 마셨던 것 같다.


며칠 그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었는데, 아무래도 교실에서는 좀 멀어서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고, 바깥에 접해 있어 어둡고. 다른 사람 신경쓸 것 없이 혼자 조용히 있기 딱 좋은 곳이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그 자판기로 내려가, 커피를 뽑고,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머리를 식히다 보니 문득 그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고, 수능을 보는 그 날까지 거의 매일 그 커피를 마시면서 참 많은 생각들을 했다.


내가 이 고생을 해서 대학에 들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수능을 망치면 어떡하지. 대학에 들어가서도 친구놈들을 계속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내가 떠올릴 수 있었던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생각했고, 대부분의 결론은 '어떻게든 되겠지' 로 끝났다.


커피를 마시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밤하늘을 보면서 기분이 풀렸는지. 혹은 둘 다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은 평소의 비관적이고 스트레스 받던 심리상태가 어느 정도 풀려서, 잠시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꽤 많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마치 공원처럼 잘 꾸며지고 분위기도 좋았던 캠퍼스를 산책할 때,

시험 기간에 가장 친한 친구 집에서 밤을 새다가 잠시 쉬려고 근처를 걸어다닐 때,

모든 면에서 내가 생각하던 분위기에 딱 맞는 카페를 찾았을 때,

특히 멋지다고 생각했던 가로등 앞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을 때.


보통은 아주 조용하거나 좋아하는 음악이 들려오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기온에서, 몸의 컨디션이 충분히 좋으면서 주변이 어둡거나 은은한 조명이 있고, 주변의 풍경도 마음에 들 때, 내가 진짜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보면 참 까다로우면서도,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조건들이기도 하다. 휴식을 취한다는 것은 아무 것에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나에게 가능한 자극을 주지 않는,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기에. 나에게 거슬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거슬리지 않거나 긍정적인 자극들만 남겨야만 내가 회복할 수 있도록 보호할 수 있겠지.


물론 주변 환경만 맞는다고 무조건적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휴식을 취하는 주체는 '나' 이고, 내 몸이나 마음이 휴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내가 놓여 있는 환경에 대해 익숙하고 편안하다는 심리를 가지지 않으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결국 나에게 있어 제대로 휴식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 주변 환경이 모두 정확히 맞아떨어져야 하는 까다로운 일이고, 어찌 보면 제대로 일한다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것일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 몸의 피곤함? 새로운 장소에 대한 이질감? 어느 쪽이든, 언젠가 다시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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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히트 달성

잡설 | 2015. 2. 9. 23:58
Posted by 메가퍼세크



별 생각 없이 블로그 들어왔는데 딱 2500히트.


잠깐 기분이 좋았는데, 블로그 글들 보니 다시 쪽팔린다...


대체 언제쯤이면 내가 만족할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쓰기의 어려움

잡설 | 2015. 1. 27. 00:15
Posted by 메가퍼세크

요새 블로그를 들어와 이것저것을 확인하다 보면, 항상 신경쓰이는 숫자가 있다.


블로그 우측 상단쯤에 표시되는 총 글의 개수가, 로그인하기 전에는 20개였다가 어드민으로 로그인하는 순간  29개로 급격히 늘어나는 것.


늘어난 9개의 글은 모두 비공개로, 주로 한창 쓰던 중 더 이상 이어갈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다 썼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너무 개판이어서 블로그에 걸어놓기가 민망할 정도인 것들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공개로 놓은 글들에 문제가 없냐고 한다면 그건 또 전혀 아니지만, 29개나 되는 글 중에서 거진 3분의 1이나 비공개라는 건 뭔가 내 글쓰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이 블로그를 만들기 전, 페이스북이나 다른 온라인 사이트에 가끔 글을 쓸 때부터 글쓰기라는 건 항상 오랜 시간과 생각과 고통, 그리고 노가다를 동반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글로 써보고 싶다' 고 생각하게 만드는 소재가 나타나야 하고, 그 소재로 인한 모티베이션이 키보드 앞에 앉는 시점까지 유지되어야 하며,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그 소재에 대한 생각과 재해석을 전개하고, 부족한 필력으로 그 상세한 내용을 남김없이 풀어내면서 제대로 된 글로서의 짜임새와 완결성, 결론까지 갖춰야 한다는 것.


매 과정 하나 하나가 성립되기 엄청나게 어려운 조건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특히 글의 표현과 짜임새에 있어서는 점점 높아져만 가는 스스로의 기준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떨어지는 문장력이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무더기로 발견되는 어색한 문장과 스펀지마냥 구멍이 숭숭 뚫린 논리 전개,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의 반의 반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미숙한 문장을 보면 그냥 컨트롤 A-딜리트를 눌러버리기 일쑤였다.


그나마 페이스북을 할 때는 아무래도 SNS라는 특성상 여러 사람들이 자유롭게 떠드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 상대적으로 쓰기 어려운 주제라도 상대적으로 덜 깊이 생각하고 부담없이 올릴 수 있었는데

(그 때도 4~5시간 잡아먹는 건 예사였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글들은 하루 안에 끝났다)


글이 너무 길어지고 SNS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가 반복되는 것을 보고 티스토리로 이사한 이후에는 오히려 '글을 쓰기 위해 만든 공간' 이라는 터무니 없는 부담감 때문에 글을 쓰는 모든 과정에서 적용되는 기준이 현저히 올라가 버렸다.


그 결과로 몇 시간씩 쓰다가도 스스로에게 절망감을 느끼고 팽개쳐 버리는 글들이 늘어났고, 그렇게 비공개로 돌려진 글들은 그 절망을 떨쳐낼 만큼의 새로운 모티베이션이 생길 때까지 그대로 수감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 좀 어렵다 싶은 주제로 시작한 글은 비공개 상태에서만 몇 달이 넘는 기간을 보내면서 대여섯 번이 넘는 갈아엎기와 가필을 거치고서도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다 보니 블로그의 글 수는 올라갈 기미가 없고, 일부러 열어놓은 블로그를 몇 달 동안 방치해두기도 뭐해서 차선책으로 한두 개씩 쓰기 시작한 과자나 음악 리뷰들은 어느새 블로그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해 버린 지 오래다.


정말 쓰고 싶었던 내용들은 검증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비공개로 돌려지고, 취미 겸 가벼운 흥미로 시작했던 리뷰들은 별다른 제지 없이 블로그를 점령하는 이 상황.


대체 몇 년이나 글을 더 쓰면,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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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으로 배송된 후드 집업의 사연

잡설 | 2015. 1. 9. 00:15
Posted by 메가퍼세크

12월 초, 평소처럼 인터넷을 돌다가 어딘가에서 제법 괜찮아 보이는 후드 집업 하나를 발견했다.






(출처: http://www.shermancarter.com/products/two-tone-zipper-cardigan-hooded-double-pockets-long-sleeve-cotton-men-sweatshirt)


어새신 크리드라는 게임 느낌의 자켓이라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괜찮은 후드 집업이 필요했기에 별 생각 없이 확 질러버렸다.


Free Shipping인 대신 배송이 오래 걸린다길래 그냥 잊어버리고 2~3주일 있으면 알아서 오겠거니 했는데, 어째 시킨 지 몇 주일이 지나도 배송확인 이메일 이후에 새로 오는 게 하나도 없어...


뭔가 불안해서 후드 집업을 구입한 홈페이지에 들어가 상품 번호를 쳐넣고 배송 추적을 했더니, 난생 처음 보는 결과가 나왔다.






중국어도 모르고 한자도 젬병이라 대부분의 정보는 쓰잘 데 없었지만, 대문짝만하게 쓰여진 North Korea 와 배송 이력에 쓰여진 조선, KP 까지는 읽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용했던 해외 배송 택배들의 경우에는 어김없이 KR이라는 코드가 적혀 있었는데, KP는 또 뭘까 궁금하여 인터넷을 뒤져 봤다.





...그렇다고 합니다.


내 소중한 택배가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으로 날아가 버렸다는 소리였다.


세상에 북한에도 택배 수취하는 곳이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에서 시작해서, 내 택배를 가로채 가 버리면 어떡하지? 자본주의 느낌이 충만해서 어차피 못 입고 다니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나름 따뜻해 보이니 원래 용도처럼 집 근처에서 입고 다니려나? 애초에 북한에 내 사이즈에 맞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까지 도달하고 나니, 슬슬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인터넷을 뒤져 보니 이런 배송 오류 자체는 가끔 일어나는 일인 듯 했다. 외국에서는 딱히 우리 나라에 관심이 없고, 북한이 여러 가지로 국제 사회에서 유명하다 보니 가끔 이렇게 오배송되는 일이 종종 있다고. 근데 아무리 그래도, 발송지가 우리 나라 코 앞인 중국인 데다 주소도 South Korea로 제대로 입력했는데도 이 따위 상황이란 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하다.


아무튼 이 이상한 상황을 하루빨리 해결하고 후드 집업을 받기 위해, 구매처에 문의를 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기업인 거 같지만 어차피 중국어는 알지도 못하니 영어로, 영어도 프리토킹 따위는 꿈도 못 꾸는 저질 중의 저질이니 그나마 좀 나을 것 같은 메일 문의로. 어학 실력 때문에 문의 방법이 정해진다는 것도 참 슬픈 일이다.


그 후부터는 안 되는 영어 실력을 쥐어짜낸 고객 센터와의 사투의 연속.





: 12/12일에 너네 사이트에서 후드 재킷을 주문했고, 내 구매 정보는 이렇다.

근데 17track에서 배송 체크해보니까 내 택배가 북한으로 가고 있네?

가능한 빨리 체크하고 조치좀.


센터:? 니 택배는 아직 배달중이고, 정해진 배송 기간이 아직 안 지났음. 그 택배가 다른 나라에 잠시 배송 중 상태로 머물다가, 너네 나라로 갈 수도 있음.


: 아니 시발. 내가 중국 우정 많이 써봤다고.

근데 난 지금까지 배송 과정 중에 "Destination Country" 가 노스 코리아인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배송 중에 잠깐 노스 코리아를 거쳐가는 거면 적어도 저건 싸우스 코리아로 돼 있어야 되는 거 아님?

(첨부 파일로 배송조회 결과를 첨부함)


센터:?? 니 택배는 아직 배달중이고, 2주 안에 배달될 것임. 2주 지나서도 안 도착하면 우리한테 연락해. 그럼 우리가 재배송하거나 환불해줌.


(며칠 후): 12/22일부터 내 택배가 계속 북한에 짱박혀있는 걸로 보이는데.

너네가 전에 지껄인 대로 2주 지났으니 내 택배를 빨리 재발송해줘.


그리고 내가 알아본 바로는 택배 회사가 노스 코리아랑 사우스 코리아를 잘 구분 못하는 경우가 많다던데, 대충 그런 경우인 거 같으니까 전화 좀 해보는 게 좋을 거 같다.


센터: 그렇군! 우리가 실수로 사우스 코리아 대신 노스 코리아로 보냈구나. 추가 비용 없이 제대로 된 주소로 재배송 해 주겠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당신 주소는 이건데 확인하고 맞으면 답장좀.


: ㅇㅇ 맞음


센터: 당신한테 보낼 택배 이미 새로 싸놨고 배송 번호 받으려고 대기중임. 이거 배송 정보 뜨면 바로 다시 메일 보내겠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





대충 이런 흐름으로, 배송 문제가 모두 해결된 건 그저께 아침. 고객 센터는 그럭저럭 대답도 빠르고 나름대로 친절한 것 같은데, 내 괴멸적인 영어 실력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잡아먹은 것 같다. 혹시 나와 비슷한 문제로 이 글을 보시는 분이 있다면, 고객 센터에 문의할 때 "택배 회사가 북한과 남한을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는 사실을 고객 센터에 납득시키는 데 중점을 두는 게 좋을 듯.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분단 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깨닫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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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다 문득 든 생각.

잡설 | 2014. 11. 25. 10:06
Posted by 메가퍼세크

오늘, 아침 시간을 놓쳐 커피와 과자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단 과자를 먹고, 다시 쓴 커피로 입가심.


평소처럼 그렇게 반복하다 문득, 이 과정이 참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으면 입 안이 쓰지도 않았을 것을, 일부러 쓴 커피를 마셔 놓고서 단 과자로 그 쓴맛을 중화시키고. 입 안에 맴도는 엄청난 단맛을 다시 쓴 맛으로 씻어내려 커피를 마시고.


0에서 시작해 1을 더하고, 2를 뺴고, 다시 2를 더하는 무의미한 반복이 아닌가.


물론 한 순간 달았던 순간과 썼던 순간, 즉 1과 -1이었던 순간의 경험은 내 기억에 남았고 그 증거로 배에 들어간 과자와 커피의 포만감도 남아 있다.


과자의 단맛과 커피의 쓴맛이 +와 -라면, 포만감은 둘 다 +로 작용한다.

결국 내가 한 일은 포만감이라는 길을 걷기 위해, 왼쪽 앞으로 진행하는 과자라는 방법과 오른쪽 앞으로 진행하는 커피라는 방법을 번갈아 사용하며 지그재그로 걸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은 무수히 많다.

점심에 기름진 음식을 먹었으면 저녁에는 따뜻한 밥을 먹고 싶고

매일 잔잔한 음악만 듣다 보면 가끔 발랄하고 경쾌한 음악이 듣고 싶고

따뜻한 방 안에서 쉬다 보면 밖에 나가 산책하면서 바람을 쐬고 싶은 법이다.


이런 일들의 본질은 무엇일까?


사실 배를 채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밋밋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매일 먹으면 된다.

그럼에도 어떤 맛을 가진 음식을 먹는 것은 결국 맛이라는 '쾌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음악을 듣는 것, 휴식을 취하는 것도 결국 어떤 종류의 쾌감을 느끼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이렇듯 인간이 여러 종류의 쾌감을 느끼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항상 일정하지 않고, 전에 선택했던 행동과 반대되는 것을 선택하는 경향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쾌감이 '신선함' 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는 말이 아닐까?


커피의 첫 모금을 마실 때, 커피의 쓴맛은 분명 신선한 맛이지만

연속으로 두 모금, 세 모금을 마시면 아무래도 질리기 마련이다.

그 때 과자의 단맛이라는, 쓴맛과 대비되는 '신선한' 맛이 등장하여 커피의 쓴맛을 덮어주고

단맛이 쓴맛을 모두 없애고 혀를 지배할 때, 다시 커피를 마시면 반대의 과정이 일어난다.

서로를 '신선하게' 만드는 선택지들의 진자 운동이, 지속적으로 쾌감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약해졌다 강해지는 맛의 스펙트럼도, 쾌감의 한 요소가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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