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4. 2. 22. 22:37
Posted by 메가퍼세크

오랜만에 블로그를 돌아보다가, 옛날에 쓰다가 중간에 멈추고 남겨 둔 글을 발견했다.

2014년 12월 10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걸 보면 이미 9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오래된 글이다.

이 글을 처음 쓰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굉장히 많은 차이점이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공유하는 것도 있겠지.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옛날에 썼던 이 글을 완성하면서 과거의 나와 대화해 보았다. 어느 부분이 과거의 생각인지는 굳이 명시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면서 빈번하게 마주하는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한 질문이다. 온전히 자신의 의사로 스스로의 삶을 끝내는 것. 사전적 정의는 굉장히 간단하지만, 이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굉장히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자살이야말로 모든 것이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인 행위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직면하고 있는 세상사로부터 도망치는 비겁하고 치졸한 행위라고도 한다. 이런 상반된 행위에 대한 많은 사람의 생각에 더해, 내가 가진 생각들을 풀어내 보자. 

 

우선, 자살이라는 행위가 좋은 것인지에 대한 판단부터 시작하자. 자살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논리는, '사후세계' 라는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것이다. 생에서 겪고 있는 여러 고난과 어려움들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해도, 이 생의 다음에 오는 별도의 생이 있어 지금의 고통이 그대로 이어지거나, 때로는 더욱 증폭된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이 논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살에 대한 강한 억제력이 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지 않다. 사후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현재의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해 그런 피드백을 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지 등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있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그런 부분들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꺼려진다는 점도 있다. 내가 자살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전적으로 현생에 대한 나의 판단에 의한 것이고 싶다.

두 번째 논리는, 자살을 했을 때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겪을 여러 형태의 고통을 언급한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모와 가족들을 비롯해 친지와 동료 등, 자신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없음으로써 굉장히 큰 심리적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런 것은 도덕적이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이 논리는 자신이 죽은 후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한 굉장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살을 실제로 감행하고 난 후에는 어차피 자신이 죽고 없을 것인데 주변 사람들의 입장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되물을 수도 있다. 

이쯤에서 죽음이라는 것의 근본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아는 지식 안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서로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얼마나 강한 고통을 겪어도 죽음이라는 상태로 변하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살아 있는 사람들로 인해 겪는 이익이나 손해 등의 모든 상호작용도 함께 없어진다. 결국,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벽한 의미의 '탈출구' 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게임에서의 로그아웃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게임을 플레이함으로써 얻는 여러 형태의 이득(즐거움, 돈, 타임 킬링 등)이 충분히 있고, 그것이 게임을 하지 않을 때의 상태와 비교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생이라는 조금 더 복잡한 게임에 적용되지 않을 만한 이유가 없다. 삶이라는 것을 유지하는 동안 얻는 이득이 유지하지 않을 때보다 크다고 생각하면 삶을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로그아웃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게임이든 인생이든 자신의 로그아웃(죽음)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이 사냥하던 길드원, 낳아주신 부모님, 깊은 감정적 유대를 공유하는 친구들 등. 사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런 이유로 게임(인생)을 떠나지 않는 사람도 매우 많고, 이런 것들도 한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감정적인)에 들어갈 것이다. 결국 이런 종류의 이득에도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하거나, 그런 이득들을 합친 결과물이 마이너스가 된다면 로그아웃을 택할 수 있다.(또는 어차피 그런 감정들도 로그아웃과 함께 모두 사라진다는 생각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자살을 이미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담은 어떨까? 죽음 직전에서 돌아와 생의 기쁨을 느꼈다던가, 자살을 결심했던 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는 등. 이런 류의 경험담은 너무 흔하다 못해 클리셰가 된 지 오래고, 설득력도 높지 않다.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살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없는데,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담만을 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나마 자살이 극도로 실패하기 쉬운 일이라면 귀담아 들을 만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성의만으로도 100%에 가까운 성공률을 얻을 수 있는데 말이다. 

(투신 자살이라면 몇 층 더 높은 건물을 고르고, 음독 자살이라면 조금 더 강한 약을 선택하고, 총을 사용하겠다면 권총보다는 샷건을 선택하는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실패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조금만 사족을 붙이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을 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상태로 이동하기까지 겪는 중간 과정에 대한 공포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퓨처라마' 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것처럼, 길거리에 적은 금액을 넣으면 손쉽게 자살할 수 있는 부스를 만든다면? 자살률은 아무리 적어도 최소 두세 배 정도는 급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 자잘한 요소들을 제외하고 보면 자살이란 현실이라는 컨텐츠에 대한 긍정적 요소들에서 부정적 요소들을 뺀 것이 마이너스가 되었을 때 행하는 단순한 손익 계산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살률이 높은 국가의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그 국가에서의 삶에 대해 만족보다는 불만을 느끼고 있는 것이고, 자살률이 낮은 나라는 그 반대일 확률이 높겠지. 아니, 사실 만족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문화에 따른 가치관의 영향도 클 수 있다. 가족을 좀더 소중히 여기거나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성향이 큰 나라의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자살을 덜 할 것이고, 자신의 행복이 좀더 중요하고 두려움도 적은 사람들은 더 쉽게 자살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상황은 어떨까? 나는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현실과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뭔가 의미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인생이라는 것에서 즐기는 컨텐츠들은 충분히 계속 즐길 만한 재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만나거나 나를 아는 사람들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고,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내가 존중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또한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여기까지 나열한 것이 내가 자살할 생각 없이 살아있는 이유이고,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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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우아빠 사건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3. 2. 7. 22:30
Posted by 메가퍼세크

며칠 새 떠들썩한 일이 생겼다. 150만이 넘는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승우아빠 채널에서 아는 유튜버가 오픈한 식당에 찾아가 컨설팅을 하는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그 식당에서 사람을 당근마켓에서 뽑는다는 말을 듣자 '그런 데서 뽑으면 사람도 중고 같다', '정상적인 곳에서 뽑아라' 는 발언을 한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공격당한 당근마켓 측에서 오피셜 계정을 통해 위트있는 댓글로 받아쳤지만, 승우아빠는 라이브 방송에서 그 댓글을 두고 '무료광고 하지 마라' 면서 댓삭해야겠다, 좋은 말로 한 게 아니라며 더 큰 논란을 만들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 발생한 이 논란은 토요일 새벽부터 커뮤니티를 타고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사람들의 항의 댓글을 지웠다, 이번 행동과 모순되는 승우아빠의 과거 행적이 발굴되었다는 등의 떡밥이 계속 공급되며 화력이 끝없이 올라갔다. 뉴스기사까지 수없이 나오는 와중에 당사자인 승우아빠만이 계속 묵묵부답이다가, 논란 점화 후 3일이 지난 오늘에야 사과문이 올라왔다. 사과문에서는 계속 거론되는 자신의 잘못을 대부분 인정하되 잘못 퍼진 논란들에 대해서는 해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해명이 나오기까지 계속 끓어오르던 여론은 여전히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느낀 첫 감정은 '무섭다' 와 '빠르다' 였다. 논란이 되기 전에 해당 영상을 직접 봤지만 크게 많은 걸 느끼지는 못했는데, 어느 순간 그 영상의 한 포인트가 주목되더니 하루 이틀만에 커뮤니티에 퍼지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질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논란이 된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건과 관련된 이전의 행적, 사건과 관련 없지만 좋지 않게 보였던 이전 성격들까지 남김없이 발굴되어 공격에 힘을 보탰다. 심지어는 승우아빠가 캐나다 사람이라는 사실이나 승우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까지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사과문에도 용서는 없었다. 사건을 인지한 이후 바로 회사와 논의해 조치를 취했고 이미 빡빡하게 잡힌 해외일정을 수행하다가 당근 측의 연락을 받고 정황을 취합해서 사과문을 올렸다는 해명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논란을 그냥 묻어갈 생각이었다가 너무 판이 커지니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는 쪽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  물론 해명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고 사실 증명할 방법도 별로 없지만, 마찬가지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측도 심증 외에는 크게 근거가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불명확한 것을 근거로 비판하는 것은 굉장히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비난은 재판이 아니고 무죄 추정의 법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승우아빠가 말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걸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운 좋게 남아있지 않는 이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내려진 판결을 뒤집기는 힘들 것 같다. 회사에 바로 전화해서 조치를 취했다고 해도 그 전화를 녹음하지 않았다면 그걸 증명할 수 있을까? 일정이 충분히 바쁘고 피곤해서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 정말로 최선의 대처를 다했음에도 수십, 수백만 명에게 두들겨맞는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게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애초에 이미 논란이 된 시점에서 어떻게 행동해도 그 논란을 완전히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게 아닐까?

물론 이런 무서운 상황이 그 유튜버의 과거의 행적이나 잘못에 대한 업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뭐 형법에서도 초범보다는 재범의 처벌이 무겁고 이전의 행적이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정황들이 불명확한 근거의 자리를 대체하는 데까지 가서는 안되지 않을까. 그리고 과거의 행적이라고 말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승우아빠의 명확한 잘못이 아닌 호불호가 갈리는 방송 스타일과 성격에도 근거하고 있다. 많은 브랜드를 맛과 품질을 이유로 거침없이 비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 성격은 확실히 많은 사람들의 불호를 살 만하지만, 그것 또한 논란이 일어났을 때 불명확한 근거를 채우는 편향성으로 작용하는 건 이상한 것 같다. 언젠가 저렇게 한순간에 공격당할 수 있으니 나도 행동과 언행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잘못이 아닌데도 그로 인해 미래의 잘못을 곱절로 비판받는 것은 이상하다는 반감도 함께 든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걸 이해하고 맞춰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픈 일이다. 필요한 선에서는 남의 눈을 신경쓰되 나 자신이 비합리적인 눈으로 남을 보지는 않도록 끝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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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와 핏줄에 대한 생각

카테고리 없음 | 2021. 11. 7. 22:08
Posted by 메가퍼세크

 나는 예전부터 가족이나 가문, 핏줄 같은 것들의 가치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나 그런 인연을 통해 이어진 친척들에 대한 친근감 같은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애매한 범위의 집단에 대한 생각보다는 나 자신이라는 작은 범위와 세상의 보편적 법칙이라는 넓은 범위에 대해서 좀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왔다. 하지만 살면서 자신의 가족이나 혈연에 대해 강한 소속감을 가지거나 거기에서 행복을 얻는 사람들을 보고, 내 가족들과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이런 주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과 친척, 그리고 그들을 포함하는 가문과 혈연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먼저, 생물학적으로 생각하면 혈연은 단지 자손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유전자 염기서열의 자가복제 과정일 뿐이다. 수많은 종류의 형질 중에서 현재 주어진 환경에 적합한 것을 발현하는 특정한 개체들이 성공을 이루고, 더 많은 자손을 통해 자기 유전자의 복제품을 남기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 태초부터 모든 개체들이 자신의 복제품을 남기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단지 더 많은 복제를 남기려는 이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기에 모두가 자손 번식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과학은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나에게서 위로 쭉 이어지는 가계도의 줄기와 어쩌면 아래로 이어질 가지들은 모두 아무런 목적 없는 자연적인 연쇄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런 본능에 순응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누군가는 자신이 유전자의 본능에 따라 짝을 찾아 헤매는 동물이라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본능을 초월한 이성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런 나름대로의 철학은 그 사람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는 것을 방해하겠지만, 사실 굳이 유전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후세에 흔적을 남기는 방법은 적지 않다. 수백 년에서 수천 년까지 자신의 생각을 세계에 남긴 수많은 철학자와 성인, 예술가, 과학자, 기술자를 생각해 보면, 굳이 유전자를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무언가를 지속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결국, 유전자의 역할을 후세에 자신의 구성 성분을 전달하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미 그것을 일정 부분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을 손에 넣은 것이다. 도킨스가 말한 밈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유전자와 밈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유전자라는 정교한 정치는 번식이라는 귀찮고 번거로운 과정을 부추기는 매커니즘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짝을 찾고 자신과 닮은 자손을 남기는 행위에 대해 생물학적 본성에 뿌리를 둔 다양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과 살을 맞대고, 자신과 배우자의 얼굴을 닮은 귀여운 아이를 안아보는 것과 같은 경험에서 느끼는 강렬한 행복감은 가계도를 아래로 끝없이 이어나가는 원동력이고, 몇몇 가계도가 끊기더라도 다른 가계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인간이라는 종을 오랫동안 유지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반면 밈이라는 정신적인 요소가 가져오는 행복감은 조금 더 복잡하다. 글이나 그림이나 철학, 과학적 이론과 같은 무언가를 보면서 창작자의 다양한 감정과 정서, 생각을 전달받고, 그것이 주로 미적 감각이나 재미, 공감을 느끼는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함으로써 그런 생각을 후세로 전하고 싶은 욕구와 행복감을 유발한다. 문학을 보며 작가의 내면세계에서 감동받은 작가는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것이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 감독이 의도한 흔적을 남긴다.

 

 나는 여태껏 논리적, 감성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밈의 전달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영역에서 느낀 것들이 유전적 본능에 의한 일차적 쾌락보다 좀더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물론 그 둘에 우열은 없다. 300년 전 과학자의 저술을 보며 그 당시 그가 느꼈을 생각에 공감하는 마음이나, 누군가 자기 아이를 안고서 느끼는 행복감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 자잘한 문제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둘이 다양한 영역에서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합주와 변주들이다. 인간의 결혼과 출산과 양육이 동물의 그것보다 따뜻하게 보이는 것은, 단순히 짝을 찾고 번식하는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그것이 과거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내려온 수많은 밈들과 엮이면서 만들어낸 정서적 의미들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동물의 그것과 같다면 모든 매체는 번식행위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을 통해 본성을 자극하는 포르노만을 내보내겠지만, 연인의 사랑이나 부모의 희생과 같은 정서적 주제들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들은 매년 천문학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렇게 인간의 원시적 본능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확장된 정서적 의미 부여의 여러 갈래 중에서, 요즘 가장 흥미가 가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혈연의 연쇄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체를 막론하고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소재 가운데 하나이고, 대단한 능력과 의지로 영웅적 업적을 이뤄낸 인물들이 자신과 무언가의 관계로 엮여 있다는 기분은 사람들 각자의 삶에도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나의 유전자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사람들의 가계도를 이어 보면 가깝게는 조선과 고려, 멀게는 중국, 몽골과 어쩌면 중앙아시아와 유럽에 이를 수도 있겠지. 그 시작이 어디까지 도달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에서 수백만 명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나라의 흥망을 걸고 적국과 맞서 싸운 병사나 장군, 관료나 왕으로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골몰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하루하루 먹고 살 일을 걱정하거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던 걸인도 있겠지만,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인생에 어느 시점에서 성공적으로 자손을 남김으로써 나에게 유전자의 일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내 몸의 각 부분을 이루는 설계도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수많은 사람 중 누군가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고, 이런 생각을 미래의 나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어 포기했을 수도 있겠지.

 

 이런 식으로 과거의 조상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밈을 전파하는 창작자들에 대해 갖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그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내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보고 그의 생각에 공감하며 한번 만나 대화해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던 것처럼, 수백 년 전에 개울가에서 나와 같은 상념에 빠졌을 조상을 만나 이런 근원적인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생각을 교류한다면 얼마나 짜릿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나는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할 것 같지만, 누군가 비슷한 생각을 할 미래의 생물학적 or 정신적 자손을 위해 이런 글들을 남겨두는 것은 나름대로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이 글을 볼 미래의 나 또한 어떤 관점에서는 지금의 내가 낳은 정신적 자손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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