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5. 7. 14. 03:44
Posted by 메가퍼세크

나는 살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감정에 둔감한 편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삶의 여러 장면들에서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들을 또렷하게 느끼는 일이 남들보다는 드물고, 설령 그런 감정을 느끼더라도 그 감정에 온전히 휩쓸리기보다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려고 노력해 왔다.

감정이란 건 도대체 뭘까. 감정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그것이 이성과 대비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의 여러 현상들을 보고 느끼는 것들을 원인과 결과의 논리적 연결로 설명하려는 이성적 접근과 달리, 감정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즉각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성에 대해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개념을 엄밀히 따지기 시작하면 복잡해지겠지만, 내게 있어 이성은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에 기반한 하나의 세계관에 가깝다. 외부의 정보가 들어왔을 때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섣불리 원인을 단정하지 않고, 모른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 만약 그 정보에 대해 어떤 의견을 말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 한 철저히 조사하고 그 판단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태도 같은 것이다. 사람마다 의견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방식을 고수하려 노력하는 것이 이성적 사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감정은 무엇인가. 그런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를 잠시 접어두고,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무언가 행동하게 만드는 방향성, 또는 충동을 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 어떤 사건을 저질렀다는 뉴스를 봤을 때,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 그런 판단은 중립적이어야 할 사고의 흐름에 방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감정의 개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좋고 나쁨의 문제라기보다는, 감정이 이성적 사고를 편향시키는 하나의 경향성이라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인간의 사고를 컴퓨터와 같은 계산 기계로 생각한다면, 이런 대립적 요소들은 더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사고를 수행하는 방식은, 외부에서 들어온 자극들을 일정한 구조 안에서 처리하는 일종의 운영체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이성이라는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고, 때때로 그 흐름을 방해하거나 우회시키는 별도의 신호들, 즉 감정적 요소들이 있다. 그것들은 단순한 오류일 수도, 외부로부터 주입된 악성 코드일 수도, 혹은 애초에 커널에 새겨진 근본 설정일 수도 있다. 종류를 막론하고 그런 감정이 활성화되는 순간, 이성이라는 프로그램은 더 이상 정보를 객관적으로 모으고 분석하는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불충분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거나, 입력된 정보를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일 등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사고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이상, 감정 그 자체도 근본적으로는 분석 가능한 범위 안에 있을 것이다. 예컨대 내가 분노라는 감정을 느꼈다면, 그 감정을 유발한 조건은 무엇인지, 그것이 내 사고 구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나아가 그런 감정의 개입이 전체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는지 등을 하나씩 따져볼 수 있다. 감정이 객관화되고 분석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무언가가 아니라 일정 정도 관리 가능한 신호로 바뀐다. 심리학이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명상, 혹은 메타인지는 바로 그런 능력과 태도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분석하고 통제하는 것이 언제나 바람직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이성이란 결국 현실에서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그것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가능한 선택지를 평가해 그중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프레임워크일 뿐이다. 그것은 사고의 도구이지, 사고의 방향성이나 목적 자체는 아니다. 내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거나,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를 추구하는 사고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성적 사고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성의 방향을 설정하는 더 상위의 감정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감정이란 것은 때때로 이성의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성이 어떤 목표를 향해 작동하게 만드는 원천적 동기이기도 하다.

결국 사람의 사고 구조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활용하게 되는 가장 큰 기계이고, 그것을 잘 써먹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단순한 구분을 뛰어넘어 스스로의 사고 구조 전체를 깊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예컨대 내 경우에는 누군가의 주장에서 이성적인 허점을 발견했을 때 반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는 지적 겸손과 회의주의를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차적으로는 내가 가진 그런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통해 원칙을 지키는 자기 자신을 뽐내거나 스스로 만족하고 싶은 감정적 욕구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감정적 동기는 보통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고,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합리화하는 데 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캐내는 일은 굉장히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그나마 나의 경우에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싶다는 원천적 욕구가 있기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동기’조차 감정의 산물인 이상, 내가 느끼는 것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감정을 파헤치는 데 사용한 이성은 또 다른 감정에 의해 동작하는 것이고, 그 감정을 해석하려는 시도 또한 결국은 다른 감정의 영향 아래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순환할 뿐이라면, 나의 정신세계와 감정적 동기를 완전히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듯 스스로의 운영체제를 완전히 분석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더라도 그 사실을 온전히 마주하고, 가능한 한 정직하게 스스로를 고찰하려는 태도는 여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적 욕구 중 하나가 ‘이성적이고자 하는 욕망’이라면, 그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스스로를 계속해서 진실하게 고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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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4. 2. 22. 22:37
Posted by 메가퍼세크

오랜만에 블로그를 돌아보다가, 옛날에 쓰다가 중간에 멈추고 남겨 둔 글을 발견했다.

2014년 12월 10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걸 보면 이미 9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오래된 글이다.

이 글을 처음 쓰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굉장히 많은 차이점이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공유하는 것도 있겠지.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옛날에 썼던 이 글을 완성하면서 과거의 나와 대화해 보았다. 어느 부분이 과거의 생각인지는 굳이 명시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면서 빈번하게 마주하는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한 질문이다. 온전히 자신의 의사로 스스로의 삶을 끝내는 것. 사전적 정의는 굉장히 간단하지만, 이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굉장히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자살이야말로 모든 것이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인 행위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직면하고 있는 세상사로부터 도망치는 비겁하고 치졸한 행위라고도 한다. 이런 상반된 행위에 대한 많은 사람의 생각에 더해, 내가 가진 생각들을 풀어내 보자. 

 

우선, 자살이라는 행위가 좋은 것인지에 대한 판단부터 시작하자. 자살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논리는, '사후세계' 라는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것이다. 생에서 겪고 있는 여러 고난과 어려움들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해도, 이 생의 다음에 오는 별도의 생이 있어 지금의 고통이 그대로 이어지거나, 때로는 더욱 증폭된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이 논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살에 대한 강한 억제력이 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지 않다. 사후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현재의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해 그런 피드백을 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지 등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있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그런 부분들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꺼려진다는 점도 있다. 내가 자살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전적으로 현생에 대한 나의 판단에 의한 것이고 싶다.

두 번째 논리는, 자살을 했을 때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겪을 여러 형태의 고통을 언급한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모와 가족들을 비롯해 친지와 동료 등, 자신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없음으로써 굉장히 큰 심리적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런 것은 도덕적이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이 논리는 자신이 죽은 후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한 굉장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살을 실제로 감행하고 난 후에는 어차피 자신이 죽고 없을 것인데 주변 사람들의 입장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되물을 수도 있다. 

이쯤에서 죽음이라는 것의 근본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아는 지식 안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서로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얼마나 강한 고통을 겪어도 죽음이라는 상태로 변하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살아 있는 사람들로 인해 겪는 이익이나 손해 등의 모든 상호작용도 함께 없어진다. 결국,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벽한 의미의 '탈출구' 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게임에서의 로그아웃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게임을 플레이함으로써 얻는 여러 형태의 이득(즐거움, 돈, 타임 킬링 등)이 충분히 있고, 그것이 게임을 하지 않을 때의 상태와 비교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생이라는 조금 더 복잡한 게임에 적용되지 않을 만한 이유가 없다. 삶이라는 것을 유지하는 동안 얻는 이득이 유지하지 않을 때보다 크다고 생각하면 삶을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로그아웃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게임이든 인생이든 자신의 로그아웃(죽음)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이 사냥하던 길드원, 낳아주신 부모님, 깊은 감정적 유대를 공유하는 친구들 등. 사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런 이유로 게임(인생)을 떠나지 않는 사람도 매우 많고, 이런 것들도 한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감정적인)에 들어갈 것이다. 결국 이런 종류의 이득에도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하거나, 그런 이득들을 합친 결과물이 마이너스가 된다면 로그아웃을 택할 수 있다.(또는 어차피 그런 감정들도 로그아웃과 함께 모두 사라진다는 생각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자살을 이미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담은 어떨까? 죽음 직전에서 돌아와 생의 기쁨을 느꼈다던가, 자살을 결심했던 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는 등. 이런 류의 경험담은 너무 흔하다 못해 클리셰가 된 지 오래고, 설득력도 높지 않다.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살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없는데,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담만을 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나마 자살이 극도로 실패하기 쉬운 일이라면 귀담아 들을 만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성의만으로도 100%에 가까운 성공률을 얻을 수 있는데 말이다. 

(투신 자살이라면 몇 층 더 높은 건물을 고르고, 음독 자살이라면 조금 더 강한 약을 선택하고, 총을 사용하겠다면 권총보다는 샷건을 선택하는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실패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조금만 사족을 붙이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을 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상태로 이동하기까지 겪는 중간 과정에 대한 공포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퓨처라마' 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것처럼, 길거리에 적은 금액을 넣으면 손쉽게 자살할 수 있는 부스를 만든다면? 자살률은 아무리 적어도 최소 두세 배 정도는 급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 자잘한 요소들을 제외하고 보면 자살이란 현실이라는 컨텐츠에 대한 긍정적 요소들에서 부정적 요소들을 뺀 것이 마이너스가 되었을 때 행하는 단순한 손익 계산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살률이 높은 국가의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그 국가에서의 삶에 대해 만족보다는 불만을 느끼고 있는 것이고, 자살률이 낮은 나라는 그 반대일 확률이 높겠지. 아니, 사실 만족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문화에 따른 가치관의 영향도 클 수 있다. 가족을 좀더 소중히 여기거나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성향이 큰 나라의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자살을 덜 할 것이고, 자신의 행복이 좀더 중요하고 두려움도 적은 사람들은 더 쉽게 자살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상황은 어떨까? 나는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현실과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뭔가 의미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인생이라는 것에서 즐기는 컨텐츠들은 충분히 계속 즐길 만한 재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만나거나 나를 아는 사람들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고,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내가 존중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또한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여기까지 나열한 것이 내가 자살할 생각 없이 살아있는 이유이고,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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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우아빠 사건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3. 2. 7. 22:30
Posted by 메가퍼세크

며칠 새 떠들썩한 일이 생겼다. 150만이 넘는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승우아빠 채널에서 아는 유튜버가 오픈한 식당에 찾아가 컨설팅을 하는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그 식당에서 사람을 당근마켓에서 뽑는다는 말을 듣자 '그런 데서 뽑으면 사람도 중고 같다', '정상적인 곳에서 뽑아라' 는 발언을 한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공격당한 당근마켓 측에서 오피셜 계정을 통해 위트있는 댓글로 받아쳤지만, 승우아빠는 라이브 방송에서 그 댓글을 두고 '무료광고 하지 마라' 면서 댓삭해야겠다, 좋은 말로 한 게 아니라며 더 큰 논란을 만들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 발생한 이 논란은 토요일 새벽부터 커뮤니티를 타고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사람들의 항의 댓글을 지웠다, 이번 행동과 모순되는 승우아빠의 과거 행적이 발굴되었다는 등의 떡밥이 계속 공급되며 화력이 끝없이 올라갔다. 뉴스기사까지 수없이 나오는 와중에 당사자인 승우아빠만이 계속 묵묵부답이다가, 논란 점화 후 3일이 지난 오늘에야 사과문이 올라왔다. 사과문에서는 계속 거론되는 자신의 잘못을 대부분 인정하되 잘못 퍼진 논란들에 대해서는 해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해명이 나오기까지 계속 끓어오르던 여론은 여전히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느낀 첫 감정은 '무섭다' 와 '빠르다' 였다. 논란이 되기 전에 해당 영상을 직접 봤지만 크게 많은 걸 느끼지는 못했는데, 어느 순간 그 영상의 한 포인트가 주목되더니 하루 이틀만에 커뮤니티에 퍼지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질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논란이 된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건과 관련된 이전의 행적, 사건과 관련 없지만 좋지 않게 보였던 이전 성격들까지 남김없이 발굴되어 공격에 힘을 보탰다. 심지어는 승우아빠가 캐나다 사람이라는 사실이나 승우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까지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사과문에도 용서는 없었다. 사건을 인지한 이후 바로 회사와 논의해 조치를 취했고 이미 빡빡하게 잡힌 해외일정을 수행하다가 당근 측의 연락을 받고 정황을 취합해서 사과문을 올렸다는 해명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논란을 그냥 묻어갈 생각이었다가 너무 판이 커지니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는 쪽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  물론 해명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고 사실 증명할 방법도 별로 없지만, 마찬가지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측도 심증 외에는 크게 근거가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불명확한 것을 근거로 비판하는 것은 굉장히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비난은 재판이 아니고 무죄 추정의 법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승우아빠가 말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걸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운 좋게 남아있지 않는 이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내려진 판결을 뒤집기는 힘들 것 같다. 회사에 바로 전화해서 조치를 취했다고 해도 그 전화를 녹음하지 않았다면 그걸 증명할 수 있을까? 일정이 충분히 바쁘고 피곤해서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 정말로 최선의 대처를 다했음에도 수십, 수백만 명에게 두들겨맞는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게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애초에 이미 논란이 된 시점에서 어떻게 행동해도 그 논란을 완전히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게 아닐까?

물론 이런 무서운 상황이 그 유튜버의 과거의 행적이나 잘못에 대한 업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뭐 형법에서도 초범보다는 재범의 처벌이 무겁고 이전의 행적이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정황들이 불명확한 근거의 자리를 대체하는 데까지 가서는 안되지 않을까. 그리고 과거의 행적이라고 말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승우아빠의 명확한 잘못이 아닌 호불호가 갈리는 방송 스타일과 성격에도 근거하고 있다. 많은 브랜드를 맛과 품질을 이유로 거침없이 비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 성격은 확실히 많은 사람들의 불호를 살 만하지만, 그것 또한 논란이 일어났을 때 불명확한 근거를 채우는 편향성으로 작용하는 건 이상한 것 같다. 언젠가 저렇게 한순간에 공격당할 수 있으니 나도 행동과 언행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잘못이 아닌데도 그로 인해 미래의 잘못을 곱절로 비판받는 것은 이상하다는 반감도 함께 든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걸 이해하고 맞춰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픈 일이다. 필요한 선에서는 남의 눈을 신경쓰되 나 자신이 비합리적인 눈으로 남을 보지는 않도록 끝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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