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4. 2. 22. 22:37
Posted by 메가퍼세크

오랜만에 블로그를 돌아보다가, 옛날에 쓰다가 중간에 멈추고 남겨 둔 글을 발견했다.

2014년 12월 10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걸 보면 이미 9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오래된 글이다.

이 글을 처음 쓰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굉장히 많은 차이점이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공유하는 것도 있겠지.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옛날에 썼던 이 글을 완성하면서 과거의 나와 대화해 보았다. 어느 부분이 과거의 생각인지는 굳이 명시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면서 빈번하게 마주하는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한 질문이다. 온전히 자신의 의사로 스스로의 삶을 끝내는 것. 사전적 정의는 굉장히 간단하지만, 이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굉장히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자살이야말로 모든 것이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인 행위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직면하고 있는 세상사로부터 도망치는 비겁하고 치졸한 행위라고도 한다. 이런 상반된 행위에 대한 많은 사람의 생각에 더해, 내가 가진 생각들을 풀어내 보자. 

 

우선, 자살이라는 행위가 좋은 것인지에 대한 판단부터 시작하자. 자살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논리는, '사후세계' 라는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것이다. 생에서 겪고 있는 여러 고난과 어려움들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해도, 이 생의 다음에 오는 별도의 생이 있어 지금의 고통이 그대로 이어지거나, 때로는 더욱 증폭된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이 논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살에 대한 강한 억제력이 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지 않다. 사후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현재의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해 그런 피드백을 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지 등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있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그런 부분들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꺼려진다는 점도 있다. 내가 자살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전적으로 현생에 대한 나의 판단에 의한 것이고 싶다.

두 번째 논리는, 자살을 했을 때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겪을 여러 형태의 고통을 언급한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모와 가족들을 비롯해 친지와 동료 등, 자신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없음으로써 굉장히 큰 심리적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런 것은 도덕적이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이 논리는 자신이 죽은 후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한 굉장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살을 실제로 감행하고 난 후에는 어차피 자신이 죽고 없을 것인데 주변 사람들의 입장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되물을 수도 있다. 

이쯤에서 죽음이라는 것의 근본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아는 지식 안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서로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얼마나 강한 고통을 겪어도 죽음이라는 상태로 변하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살아 있는 사람들로 인해 겪는 이익이나 손해 등의 모든 상호작용도 함께 없어진다. 결국,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벽한 의미의 '탈출구' 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게임에서의 로그아웃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게임을 플레이함으로써 얻는 여러 형태의 이득(즐거움, 돈, 타임 킬링 등)이 충분히 있고, 그것이 게임을 하지 않을 때의 상태와 비교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생이라는 조금 더 복잡한 게임에 적용되지 않을 만한 이유가 없다. 삶이라는 것을 유지하는 동안 얻는 이득이 유지하지 않을 때보다 크다고 생각하면 삶을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로그아웃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게임이든 인생이든 자신의 로그아웃(죽음)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이 사냥하던 길드원, 낳아주신 부모님, 깊은 감정적 유대를 공유하는 친구들 등. 사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런 이유로 게임(인생)을 떠나지 않는 사람도 매우 많고, 이런 것들도 한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감정적인)에 들어갈 것이다. 결국 이런 종류의 이득에도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하거나, 그런 이득들을 합친 결과물이 마이너스가 된다면 로그아웃을 택할 수 있다.(또는 어차피 그런 감정들도 로그아웃과 함께 모두 사라진다는 생각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자살을 이미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담은 어떨까? 죽음 직전에서 돌아와 생의 기쁨을 느꼈다던가, 자살을 결심했던 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는 등. 이런 류의 경험담은 너무 흔하다 못해 클리셰가 된 지 오래고, 설득력도 높지 않다.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살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없는데,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담만을 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나마 자살이 극도로 실패하기 쉬운 일이라면 귀담아 들을 만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성의만으로도 100%에 가까운 성공률을 얻을 수 있는데 말이다. 

(투신 자살이라면 몇 층 더 높은 건물을 고르고, 음독 자살이라면 조금 더 강한 약을 선택하고, 총을 사용하겠다면 권총보다는 샷건을 선택하는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실패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조금만 사족을 붙이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을 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상태로 이동하기까지 겪는 중간 과정에 대한 공포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퓨처라마' 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것처럼, 길거리에 적은 금액을 넣으면 손쉽게 자살할 수 있는 부스를 만든다면? 자살률은 아무리 적어도 최소 두세 배 정도는 급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 자잘한 요소들을 제외하고 보면 자살이란 현실이라는 컨텐츠에 대한 긍정적 요소들에서 부정적 요소들을 뺀 것이 마이너스가 되었을 때 행하는 단순한 손익 계산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살률이 높은 국가의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그 국가에서의 삶에 대해 만족보다는 불만을 느끼고 있는 것이고, 자살률이 낮은 나라는 그 반대일 확률이 높겠지. 아니, 사실 만족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문화에 따른 가치관의 영향도 클 수 있다. 가족을 좀더 소중히 여기거나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성향이 큰 나라의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자살을 덜 할 것이고, 자신의 행복이 좀더 중요하고 두려움도 적은 사람들은 더 쉽게 자살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상황은 어떨까? 나는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현실과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뭔가 의미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인생이라는 것에서 즐기는 컨텐츠들은 충분히 계속 즐길 만한 재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만나거나 나를 아는 사람들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고,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내가 존중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또한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여기까지 나열한 것이 내가 자살할 생각 없이 살아있는 이유이고,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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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우아빠 사건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3. 2. 7. 22:30
Posted by 메가퍼세크

며칠 새 떠들썩한 일이 생겼다. 150만이 넘는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승우아빠 채널에서 아는 유튜버가 오픈한 식당에 찾아가 컨설팅을 하는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그 식당에서 사람을 당근마켓에서 뽑는다는 말을 듣자 '그런 데서 뽑으면 사람도 중고 같다', '정상적인 곳에서 뽑아라' 는 발언을 한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공격당한 당근마켓 측에서 오피셜 계정을 통해 위트있는 댓글로 받아쳤지만, 승우아빠는 라이브 방송에서 그 댓글을 두고 '무료광고 하지 마라' 면서 댓삭해야겠다, 좋은 말로 한 게 아니라며 더 큰 논란을 만들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 발생한 이 논란은 토요일 새벽부터 커뮤니티를 타고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사람들의 항의 댓글을 지웠다, 이번 행동과 모순되는 승우아빠의 과거 행적이 발굴되었다는 등의 떡밥이 계속 공급되며 화력이 끝없이 올라갔다. 뉴스기사까지 수없이 나오는 와중에 당사자인 승우아빠만이 계속 묵묵부답이다가, 논란 점화 후 3일이 지난 오늘에야 사과문이 올라왔다. 사과문에서는 계속 거론되는 자신의 잘못을 대부분 인정하되 잘못 퍼진 논란들에 대해서는 해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해명이 나오기까지 계속 끓어오르던 여론은 여전히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느낀 첫 감정은 '무섭다' 와 '빠르다' 였다. 논란이 되기 전에 해당 영상을 직접 봤지만 크게 많은 걸 느끼지는 못했는데, 어느 순간 그 영상의 한 포인트가 주목되더니 하루 이틀만에 커뮤니티에 퍼지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질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논란이 된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건과 관련된 이전의 행적, 사건과 관련 없지만 좋지 않게 보였던 이전 성격들까지 남김없이 발굴되어 공격에 힘을 보탰다. 심지어는 승우아빠가 캐나다 사람이라는 사실이나 승우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까지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사과문에도 용서는 없었다. 사건을 인지한 이후 바로 회사와 논의해 조치를 취했고 이미 빡빡하게 잡힌 해외일정을 수행하다가 당근 측의 연락을 받고 정황을 취합해서 사과문을 올렸다는 해명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논란을 그냥 묻어갈 생각이었다가 너무 판이 커지니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는 쪽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  물론 해명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고 사실 증명할 방법도 별로 없지만, 마찬가지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측도 심증 외에는 크게 근거가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불명확한 것을 근거로 비판하는 것은 굉장히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비난은 재판이 아니고 무죄 추정의 법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승우아빠가 말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걸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운 좋게 남아있지 않는 이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내려진 판결을 뒤집기는 힘들 것 같다. 회사에 바로 전화해서 조치를 취했다고 해도 그 전화를 녹음하지 않았다면 그걸 증명할 수 있을까? 일정이 충분히 바쁘고 피곤해서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 정말로 최선의 대처를 다했음에도 수십, 수백만 명에게 두들겨맞는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게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애초에 이미 논란이 된 시점에서 어떻게 행동해도 그 논란을 완전히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게 아닐까?

물론 이런 무서운 상황이 그 유튜버의 과거의 행적이나 잘못에 대한 업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뭐 형법에서도 초범보다는 재범의 처벌이 무겁고 이전의 행적이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정황들이 불명확한 근거의 자리를 대체하는 데까지 가서는 안되지 않을까. 그리고 과거의 행적이라고 말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승우아빠의 명확한 잘못이 아닌 호불호가 갈리는 방송 스타일과 성격에도 근거하고 있다. 많은 브랜드를 맛과 품질을 이유로 거침없이 비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 성격은 확실히 많은 사람들의 불호를 살 만하지만, 그것 또한 논란이 일어났을 때 불명확한 근거를 채우는 편향성으로 작용하는 건 이상한 것 같다. 언젠가 저렇게 한순간에 공격당할 수 있으니 나도 행동과 언행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잘못이 아닌데도 그로 인해 미래의 잘못을 곱절로 비판받는 것은 이상하다는 반감도 함께 든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걸 이해하고 맞춰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픈 일이다. 필요한 선에서는 남의 눈을 신경쓰되 나 자신이 비합리적인 눈으로 남을 보지는 않도록 끝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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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와 존중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18. 8. 20. 22:50
Posted by 메가퍼세크

사람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사람의 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없이 생각해 보았을,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을 만한 그런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살아가며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때로는 그 사람들과 더없이 친해지거나 극도로 미워하는 사이가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한 사람의 인간관계 전체를 아우른다고 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답과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문제에 답하는 과정이 으레 그렇듯, 이 문제에 답하는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가 다루는 대상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와 인식이다. 가장 윗 문장에 들어 있는 두 명의 '사람', 즉 '나'와 '타인'에 대한 해석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기본적인 공리와 같다. 나는 이 중요한 위치에, '나와 타인은 동등한 위치에 있고,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권리가 없다' 라는 문장을 넣어서 생각을 시작했다. 평등과 각자의 주권 존중이야말로 인권이라는 개념의 가장 근본적인 시작이고, 동시에 인간관계의 대전제로서 가장 적합한 위치를 가질 테니까.


일단 이 단순한 문장을 전제로 삼으면, 인간관계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마주치는 많은 상황들에 대한 대답과 새로운 질문들이 솟아난다. 예컨대 서로에 대한 권리가 없는 동등한 개인이 같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에게서 그럴 수 있는 권리를 얻어야 하고, 그렇기에 '부탁'과 승낙 혹은 거절이라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부탁의 범위 안에는 서로간의 의무를 규정하는 '계약'이나 '약속'이 포함되어 있고,의무를 포함하는 관계에 동의한다면 그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따라 서로간의 '신용' 또는 '신뢰' 가 생겨난다.


이렇게 생겨난 신용과 신뢰라는 개념은 결국 타인에 대한 믿음의 지표이고, 다르게 말하면 그 사람이 나의 시간이나 돈, 또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떤 약속에 10분 늦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10분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약속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할 테니까.


나에 대한 타인의 존중도를 손쉽게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표는 '예의'라는 개념이다. 이 또한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가 있을 법한 까다로운 개념이지만, 나에게 있어 예의란 '상대의 거리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싫어하는 행동을 고의로 하지 않고, 꺼리는 화제를 억지로 꺼내지 않는 것.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사람마다 거리와 피해의 기준이 천차만별이기에 제대로 지키는 건 어렵다. 백 가지 행동을 조심하더라도 한 가지 행동을 실수하면 예의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생각도 하지 못한 행동에서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 만큼. 


그렇게 까다로운 예의들 중에서도 가장 의견이 갈리고 지키기 어려운 것은, 각자의 감정을 어떻게 표출하는지에 대한 기준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문제 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단지 상대를 무시하며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는 무례한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관점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특히 분노의 원인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에게 짜증을 표출하는 행위야말로 무례함과 천박함의 극치라고 생각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라는 개념의 본질은 그런 까다로운 기준이나 미묘한 감정들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타인과의 거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의 기준으로 타인의 호불호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되겠지' 라는 지레짐작을 버리고, 언제든지 상대가 자신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자신의 거리를 침범당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역설적이지만, 어떤 사람을 정말로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최소한의 거리를 철저하게 지킬 때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상호 존중과 진심을 다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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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능력과 차별의 문제

자아성찰/가치관 | 2018. 6. 2. 08:37
Posted by 메가퍼세크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조던 피터슨이라는 교수가 페미니즘에 대해 인터뷰한 동영상을 봤다.

https://youtu.be/N7cf_DW5CQc

시종일관 정중하고 침착한 태도로 임하는 교수의 태도와 철저한 논리 속에서 근거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주장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인터뷰 내내 교과서적인 무례함과 편협함으로 일관했던 여자 앵커의 태도였다. 교수의 주장이 담고 있는 객관적 태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한 주장을 끝임없이 감정적으로 곡해해서 받아들이며, 상대의 말을 수없이 끊어대며 자기 할 말만 한없이 반복하는, 그야말로 극단적 페미니스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모습. 


인간의 합리성을 믿는 사람이라면 크나큰 좌절과 함께 화가 치밀어 오를 만한 광경이지만, 사실 그런 순간적인 감정이야말로 문제에 대한 심층적 접근을 막는 가장 큰 장벽 중의 하나다. 부질없는 화를 억제하고 영상을 다시 보면서, 그런 극단적인 태도가 왜 생겨났을지 고찰해 보았다.


인터뷰 내내 앵커의 말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전제는, '여자는 남자에 비해 크게 차별받고 있으며, 무슨 수를 써서든 이걸 없애야 한다' 라는 가정이다. 이 가정이 정말 맞는지, 옳은지에 대한 판단을 차치하고 '차별에 대한 피해의식' 이라는 짧은 단어로 요약해보면, 문제의 본질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여성들은 자신이 크게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할까?


물론 오직 성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차별도 존재하겠지만, 중점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터뷰에서 교수가 말한 것과 같은, '실재하지 않는 차별' 에 대한 혼동이다. 정말로 받고 있는 차별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지만, 차별이 아닌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엉뚱한 사람에 대한 폭력에 불과하니까. 어째서 많은 여성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차별에도 분노를 느낄까?


물론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매우 어렵고, 사람마다 수많은 견해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는 '능력의 차이에 대한 좌절감'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자기보다 무언가를 더 잘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무력감,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성취를 금방 뛰어넘어버리는 그 누군가에 대한 좌절과 분노라는 감정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예시는 체력과 근력이다. 누구나 알듯이 일반적인 남자와 여자는 체격부터가 크게 차이가 나고, 평균 근력을 따지면 60대가 넘은 할아버지도 20~30대 여자보다 월등히 강하며, 격투기의 영역에서는 아마추어 남자 선수가 프로 여자 선수를 이기는 경우도 흔할 정도다. 물론 여자도 노력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는 강해질 수 있다지만, 160cm 정도의 보통 여자가 웬만큼 노력해 봐야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평범한 성인 남자를 이기려면 대체 얼마나 걸릴지. 결국 평범한 여자들은 매일 길에서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자신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고 생각해 보면 무서워서 밖을 걸어다닐 수나 있을까 싶고, 상당한 피해의식을 느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런 피해와 불안이 단지 여성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 세상에는 보통 여자들과 체력이 비슷한 150cm의 왜소증 남자도 있고, 꽤 강한 남자들도 웬만해서는 이길 수 없는 190cm의 근육질 여성들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비율적으로 상당한 차이는 나겠지만, 중요한 것은 똑같은 약함을 가졌더라도 150cm짜리 남자는 자신의 왜소함을 탓하지만, 160cm짜리 여자는 자신이 여자인 것을 탓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두 경우 모두 근본적인 문제는 단지 '강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는 것 뿐인데도. 바로 이런 종류의 착각이야말로 여성들이 느끼는 왜곡된 피해의식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체력과 근력처럼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은 좀 낫지만, 차이가 조금이라도 애매하거나 모호해진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철저한 논리와 합리성이 요구되는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극도의 남초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프로그래머 자리가 나서 지원했다가 떨어진 남성은 자신의 실력밖에 탓할 게 없지만, 여자는 "내가 여자라서, 능력이 떨어질 것 같다는 편견으로 떨어뜨린 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 의구심이 합리적인 범위의 검증만으로 끝난다면 참 좋겠지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특성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길과 인정하지 않는 길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근거가 부족해도 후자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때로는 그 근거 없는 선택을 한 사람들이 뭉쳐, 아무 차별이 없었던 곳에 차별이 존재한다는 착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그런 왜곡된 의식을 가장 명확히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특정 분야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성 쿼터제다. 정치, 치안, 군사 등의 분야에 여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에 상관없이 상대적으로 낮은 허들로 여성을 일정 수 이상 뽑아야 된다는 제도. 개인적으로는 이런 제도야말로 "능력에 관계없이 성별만으로 혜택을 받는" 남녀차별의 정의에 아주 정확히 부합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도대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게 다른 남자와 여자라는 두 생물이 어떤 영역에서도 같은 능력과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발상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그런 제도를 통해 충분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데서 나오는 손해는 대체 누가 책임지는 것일까? 범죄자를 잡을 능력이 떨어지는 경찰이나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군인, 유권자를 대변하기는커녕 헛소리만 하는 여성 정치인들을 만드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차별을 없애기는커녕, 페미니즘과 여성 인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을 아주 확실하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거라는 데 돈을 걸 수도 있다.


결국 저번 글과 같은 논지로 돌아가는데, 여성 인권과 페미니즘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적은, 존재 여부조차 모호한 차별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게 만드는 피해의식과 그로 인한 분노라는 것이다. 남녀평등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정말로 이루고 싶다면 우선 그것이 "능력에 따른 공정한 차별" 이라는 말과 동치라는 것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오직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확실한 차별과 부조리들을 찾아 환부를 절개하는 의사처럼 정확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분노와 피해의식을 떠넘길 간편한 대상(남자)에 집중하는 순간, 본연의 목적은 멀리 사라지고 단지 분노와 비합리성에 찌든 광신자들의 집단만이 남을 뿐이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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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문제 해결

자아성찰/가치관 | 2017. 12. 25. 21:53
Posted by 메가퍼세크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부쩍 싸움이 늘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할 일 없는 어그로꾼들과 더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싸움은 새삼스레 언급할 만큼 특별한 것도 아니고, 만연하다 못해 이제는 당연한 풍경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지만, 언젠가부터 그와 조금은 다른 성격의 싸움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베와 메갈리아, 워마드, 급진적 동성애자 집단과 그 외 별별 욕먹을 만한 일을 하는 집단들에 대한 다수의 가열찬 비난을 주제로 일종의 '흐름' 이 만들어지고, 그 흐름의 방향에 부합하는 글들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상에 대한 분노를 공유하며 서로를 증폭시키고 뒷받침해 주며, 가끔 나타나는 해당 집단의 어그로들이 그 흐름에 기름을 붓는, 그런 종류의 싸움.


물론 대부분의 경우 비난받는 대상에 대한 검증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고, 그 나름의 조사와 논리를 통해 대상을 까야 할 이유는 꽤 확실해져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투기장에서 안심하고 대상에게 맹공을 퍼붓는 사람들의 논리와 문체를 보면, 그런 싸움의 목적이 까는 대상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해결점 모색 따위에 있지 않다는 것쯤은 누구라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인정할 만큼 사악하고, 아무리 욕해도 부족함이 없는 대상에 대한 목적 없는 분노의 표출, 조금 논지를 벗어나거나 성급한 연좌제를 적용해도 눈감아 주는 같은 편들 사이에서 느끼는 소속감과 자신이 나름대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편에 서 있다는 약간의 자부심이, 이런 가열찬 공격의 근본적인 목적과 동기이자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이런 거대하고 맹렬한 분노의 원천에 대한 성급한 추측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런 흐름이 맺을 결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고, 그에 대한 한 가지 답은 뜻밖에도 이 글의 세 번째 문단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정부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해 노무현과 그에 관련된 것들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로 전이된 일베, 여성이 겪는 아픔에 대한 몇 가지 타당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한국 남자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로 썩어버린 메갈리아와 워마드, 차별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해 오히려 거부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일부 게이 집단까지, 내부에서 계속 휘감아 돌다 결국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분노는 암세포와 같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에 대한 분노가 다시 소용돌이치는 이런 상황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맹목적인 분노의 흐름은 정작 그 분노의 대상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일차원적인 대응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고, 당장 눈에 보이는 분노의 대상과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크게 분리되어 있기 마련이다. 당장 메갈리아의 사례를 봐도,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어려움의 근원을 해결하기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한남' 이라는 명확한 목표에 대한 증오에 집중했지만, 그게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에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되었을까? 오히려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은 남자들의 분노를 불러,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 약화에나 크게 기여했을 뿐이다.


물론, 분노라는 감정 자체는 아래 글에서 언급했듯 문제 해결의 중요한 원동력이 될 수 있지만 그런 힘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분노를 벗어난 조금 더 넓은 시야와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핵심적인 요소들이 동반되지 않은 분노는 단지 찻잔 속의 태풍에서 그치거나, 가끔은 계속 돌다 썩어버려 또다른 괴물이 되는 결과만을 낳을 뿐. 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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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

자아성찰/가치관 | 2017. 9. 11. 21:23
Posted by 메가퍼세크

누구나, 살면서 많은 문제들을 마주하게 된다.


학교에서 푸는 좁은 의미의 문제 뿐 아니라 대인관계, 조직관리, 거시적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의견 수렴 과정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셀 수도 없이 많고도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런 문제들의 극히 일부는 짧은 시간 안에 풀 수 있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푸는 데 어떤 형태로든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고, 또 어떤 문제들은 평생에 걸친 노력에도 풀리지 않곤 한다. 특히 정해진 답이 없는 종류의 문제들이 그렇다. 어째서 대부분의 문제들은 풀기 어려울까?


내 생각은 이렇다.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이 문제를 풀어보고 싶다' 라는 감정에 의해 일어나고, 문제 해결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에너지도 역시 감정에서 유래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구체적인 과정에서는 철저한 이성적 사고가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감정에 의한 문제 인식의 과정에서 올바른 시기에 이성에 의한 문제 해결로 넘어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전환 자체도 어려울 뿐더러 전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감정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과정에서 문제 해결의 동기가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한 가지 감정에 의해 조종사가 되고 싶다는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종사가 되기 위한 과정에 대하여 열심히 조사하고, 공군 사관학교와 같은 기관에 들어가 구체적인 비행기 조종 스킬들을 배우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 나간 원동력은 열정이지만, 그 열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계기판을 외우고 조작 방법들을 익히며 힘든 체력 훈련을 통과하는 구체적이고 이성적인 해결 과정이 필요하다. 결국, 이 사람은 '하늘을 난다' 는 감정적인 목표를 위해서 감정을 죽이고 효율적으로 하늘을 나는 방법을 배우는 이성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잘 알듯 그런 구체적인 접근 과정은 문제 해결을 위한 초기의 감정적 동기를 꾸준히 소모시키고 저해하기 마련이고, 결국 동기를 모두 상실하고 문제 해결을 포기하거나 원래의 동기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문제만 해결하는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문제 해결에 다수의 힘을 필요로 할 때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는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문제에 대한 감정적인 인식에서 이성적인 해결책으로 올바르게 넘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 주변을 둘러봐도, 정치나 사회와 같은 거시적 문제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아도 실질적 해결을 모색하는 사람은 적지 않은가?


이런 경우 문제 해결을 원하는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의 단게로 나뉜다.


첫번째는, 오직 감정적인 시각만으로 문제 해결에 골몰하는 경우. 이는 일부 사람들의 문제 해결 의지를 고취시킬 수는 있지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보다는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책에 도달하도록 유도하거나, 때로는 완전히 틀린 방향으로 군중을 이끌기도 한다.


두번째는,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전적으로 이성적인 해결을 촉구하는 경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적 접근을 혐오하며, 이성적인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성향이다. 이들은 첫번째 단계보다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높지만, 사람들의 감정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문제 해결의 동기와 의지를 저해하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 단계는 사람들의 감정적인 측면에 충분히 공감하며 문제 해결의 원동력을 유지하고, 이성적이고 본질적인 해결책의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유도하여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이 세 단계는 불을 이용해 요리를 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사람들의 감정은 불에 해당하고 이성은 그 불을 이용해 요리를 하는 능력이다. 감정만이 앞선 집단은 강력한 화력을 가지지만 요령이 없어 요리의 겉만 태워먹기 십상이고, 이성만이 앞선 집단은 뛰어난 요리 실력이 있지만 화력이 부족해 결과를 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좋은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능력이 모두 필요하고, 따라서 세 단계의 사람들의 비율 또한 적당히 유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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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함이라는 것.

자아성찰/가치관 | 2016. 10. 24. 17:24
Posted by 메가퍼세크

대학교에 다닐 때, 토론 수업 중 상대편을 화나게 한 적이 있었다.


'인간은 이타적일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찬성과 반대 측으로 나뉘어 서로 주장을 펼치고 있었는데, 반대 측에 있었던 내가 그 즈음 일어났던 아이티 지진 사태를 주제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이티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직접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돕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구 반대편인 이곳에서 비싼 비행기 표값을 감수하며 날아가 얼마 안 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보다 그 돈을 직접 기부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람들이 타인을 도울 때 효율적인 방법보다 자신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이타적일 수 없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아닌가?"


벌써 꽤나 오래된 일이지만, 그 일이 아직도 기억나는 이유는 평소 봉사활동을 하던 상대편 토론자의 진심으로 빡친 표정과, 그 때의 내 말 속에 '선함' 이라는 개념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인식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어렸을 때, 아마 선함이라는 개념을 처음 인지했을 때부터, 나는 그 개념이 정말 불완전하고 애매함 투성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애초에 아이들에게 선함을 가르치기 위한 교본으로 주로 사용되는 동화나 위인전에서부터, 그 개념의 모순은 도저히 숨길 수 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난하고 힘없거나 성실하며 순박한 것으로 그려지는 선한 등장인물과 못생기고 탐욕적이며 강한 힘을 가진 악한 등장인물의 대립 구도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작위적이었고, 두루뭉실하게 무조건 착한 것으로 기술되던 선역들이 결말에 가서는 악역들이 그들의 행동에 대한 '업보' 를 받도록 방치하는 권선징악의 스토리라인 또한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과 악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결국 세상을 '착함'과 '악함' 이라는 두 편으로 가르고 한 편의 행동양식을 따라 살면 상을 받고 다른 편으로 살면 벌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예언으로 보였고, 그런 예언은 결국 한쪽 편에 대한 피해의식과 증오에 가득찬 푸념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선함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성실함과 끈기, 이타심과 겸손함 같은 특질들은 내 관점에서도 제법 일리있고 괜찮다고 생각되어, 어느 순간부터 선함이라는 개념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의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단순히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선함이 아닌, 나 자신이 한 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할 수 있는 확실하고 당당한 기준을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그 첫 걸음으로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타성의 문제였다. 내 이익에 관계없이 누군가를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선의 개념이지만, 과연 정말로 그런 것이 가능할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결국 사람의 행동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행동으로부터 얻거나 잃을 것에 대한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타적인 행동의 결정 또한 결국 이런 매커니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행이라면 타인에게 나의 선함을 보이고 싶다는 욕구의 발현일 수 있고, 완전히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행이라도 '선행을 했다' 는 사실에 대한 자기만족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무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면서 선행을 수행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행동의 동기는 '그 큰 고통과 손해보다 이 행동의 가치가 크다' 는 계산에 기반하지 않는가.


이런저런 생각의 흐름의 끝에 도달한 결론은, 선함과 악함이란 결국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의 리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단지 그 사람을 구해서 얻을 수 있는 자신의 만족감이,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위험성에 비해 크다고 판단되었을 때 행하는 행동일 뿐. 구하지 않는 것도 단지 그 반대의 경우일 뿐.


물론 그런 계산의 기준들은 사회적인 선함의 기준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 영향을 합쳐 자신이 수립한 기준들에 따라 계산을 수행할 것이다. 단지 나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 그런 관념과 당위성에 의거하고 있다고 말하기보다 그저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는 좀더 솔직한 기준들에 의거하는 것이 좀 더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곤란해하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과, 차가 오랫동안 오지 않는 횡단보도를 빨간불에 건너는 행동은 모두 단순히 '내가 그러고 싶어서' 라는 제멋대로인 이유에 의한 것이고, 그 행동에 대한 뿌듯함이나 죄책감 같은 건 딱히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 나로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논리적이고, 당당하고, 당연한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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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선택의 문제에 대하여

자아성찰/가치관 | 2016. 9. 26. 23:16
Posted by 메가퍼세크

언제나 선거철이 되면,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 투표해라, 누구를 찍어라, 찍을 사람이 없으면 무효표라도 던지라는 외침. 낮은 투표율과 선거일을 놀러 가는 날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다.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불만스러운 생각이 든다.


 물론 전체 사회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서 투표하고, 결과적으로 최적의 지도자들 뽑아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겠지만, 언제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고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인류에게 필연적인 것이 아닌 이상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 판단의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정할 권리 또한 있다.


 생각해 보자. 개인의 입장에서 투표란 복잡한 행동이다. 후보자 각각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가치 판단을 내리고, 투표장에 직접 가기까지 참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된다.


 반면 그로 인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작아도 최소 수천, 수만 표에서 수백만 표가 왔다갔다하는 일반적인 투표에서 한 사람의 표가 차지하는 비중은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내려가야 한다. 아주 적게 만 명이라고만 가정해도 한 사람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0.01%.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고, 결국 개인의 입장에서 투표라는 행위가 주는 실질적인 이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투표를 할까? 누구나 알다시피, 이것은 의미 부여의 문제다. 세상에는 아주 작은 영향력이나마 자신이 행사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이나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스스로에게 별 이득이 없고 투자해야 하는 것만 있는 일이라도, 스스로 당위성이나 의무감, 행위에 따른 의무감 등을 느낄 수 있다면 기꺼이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특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특질이 결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할 필요 또한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할 필요가 없고, 단순히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의미 부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심지어 법으로 보장된 투표의 권리가 '국민의 의무' 같은 거창한 구호와 함께 사회적 선으로 취급되고,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식이 그 반대급부로 나빠지는 현재의 세태는 과연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충분한 투표율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구성원들의 관심으로 지탱되는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무관심의 자유' 라는, 또 다른 가치 또한 존중되는 세상을 원하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개인적으로는, 내가 투표를 하는 행동의 결정이 그 행동의 사회적 인식이나 투표 안 한 사람에 대한 주변의 싸늘한 눈길에 의해서보다는 투표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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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카페의 조건

자아성찰/취향 | 2016. 4. 7. 00:35
Posted by 메가퍼세크

나에게 있어, 카페라는 건 참 특별한 장소다.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카페는 단순히 만남과 이야기를 위한 장소일 뿐이지만, 혼자서 가는 카페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외부와는 전혀 다른 고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잠시 동안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는 나만의 특별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 몰두하는 대상은 지금과 같은 글쓰기나 독서, 공부 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몰두하는 대상이 아니라 한 가지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매일의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쌓이는 스트레스나 피곤함이 극에 도달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좋은 카페에 찾아가 잠시 동안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으면 스트레스나 피곤함이 눈 녹듯 사라진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좋은 카페는 무엇보다 중요한 공간 중의 하나이고, 다른 어떤 장소보다 심사숙고해 선택해야 할 대상에 속한다. 그런 심사의 과정에서 고려하게 되는 나만의 기준들을, 이 글을 통해 정리해 보려고 한다.


1.채광과 조명


-카페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빛과 음악이다. 바깥 세상과 카페 내부 사이의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채광이 너무 잘 되거나 바깥에서 안이 훤히 보이는 카페는 그다지 좋지 않다. 최소한 대낮이라도 불을 껐을 때 카페 안이 어두워질 정도는 되어야 한다. 외부의 자연광을 차단하고 조명의 불빛만으로 카페를 새로 칠했을 때, 카페 내부의 고유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조명의 선택도 중요하다. 햇빛의 백색광과는 다르고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약간의 어둑어둑함, 형광등보다는 전구의 은은함이 더 마음에 든다. 펜을 들고 무언가를 쓸 때 종이에 비치는 손의 그림자는, 카페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이자 좋은 조명을 판단하는 척도 중의 하나다.


2.음악


-두 번째 요소는 조금 더 까다롭다. 카페의 원래 목적 때문에라도 카페 내에서 완전히 소음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카페 바깥의 소리를 막고 내부를 음악으로 칠하는 것은 카페의 분위기를 조성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작업이다. 각각 고유의 특색을 가진 음악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이 부분에서는 특히 취향이 많이 갈리겠지만, 주로 내가 선호하는 것은 잔잔하면서 약간 활발한 분위기의 음악. 가사가 전혀 없는 현악 계열의 연주곡이 베스트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떤 곡이라도 카페의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면 상관은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것은, 카페의 인테리어, 조명과 음악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하는 것. 정말로 잘 선곡된 음악은 신경쓰지 않으면 음악이 재생되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고, 귀를 기울이면 언제든지 선율에 빠져들 수 있다. 어쩌면 카페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음료 다음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이 아닌가 싶다.


같은 맥락에서, 사실 모든 경우에 방음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카페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카페 내부에서의 집중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만, 가끔씩 그 법칙을 깨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예전에 방문했던 한 카페는, 기찻길 옆에 위치해 있어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소리가 들렸다. 얼핏 보면 상당히 시끄러울 것 같았지만 다행히 기찻길에서의 거리는 꽤 멀었고, 오히려 가끔씩 멀리서 들려오는 은은한 기차소리는 그 카페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다. 카페의 정면은 도로에 인접해 있었지만, 이중 문 구조로 도로의 소음은 문을 열고 닫을 때까지도 거의 완벽히 차단되었다. 나쁜 소리는 막고 좋은 소리는 끌어들인, 아주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3.실내 디자인


-조명과 음악이 카페를 바깥과 다른 공간으로 만드는 밑그림과 채색이라면, 실내 인테리어는 세부 묘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카페의 분위기와 컨셉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수단이면서, 카페 내부를 감상의 대상으로까지 격상시킬 수 있는 가장 예술적인 부분이기도 하기에 실내 인테리어의 수준은 카페 주인의 미적 감각과 센스를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간단한 액자나 픽셀 아트, 방향제 같은 소품도 멋지지만 멋진 장식장이나 벽화, 쿠션감 좋은 클래식한 의자도 좋고. 실내 디자인의 컨셉은 워낙 극과 극이기에 좋아하는 스타일을 딱 판단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음악의 경우처럼 크게 튀지 않고 카페의 분위기에 잘 녹아든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감이기에.


4.메뉴


-주로 '커피 맛' 으로 대표되는 메뉴의 질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항목이 어째서 이렇게 아래에 위치해 있는지 의아해햘 수 있겠다. 물론 카페의 메뉴 구성과 맛은 상당히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카페를 판단하는 제 1기준으로 작용하곤 한다. 하지만 카페의 이용 목적은 사람마다 셀 수 없이 다양하고, 나처럼 분위기와 공간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에게 메뉴는 카페의 분위기를 구성하는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카페의 음료 퀄리티가 심각할 정도로 좋지 않다면 그건 큰 문제겠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카페의 메뉴 구성과 맛은 카페 분위기의 형성에 마지막 방점을 찍는 플러스 요인이 될 수는 있어도 마이너스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물론 조명과 음악,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는 카페 주인이 메뉴에 신경을 쓰지 않기도 어렵고.


그렇다면 좋은 메뉴란 무엇일까. 카페 메뉴에 오를 수 있는 음료와 음식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고, 하나 하나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나름대로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주류가 되는 것은 보통 커피와 차의 양대산맥으로 나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카페 음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커피이고, 카페라는 말 자체가 프랑스어로 커피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온 만큼 커피 하나라고 하는 것이 맞겠으나, 역사적인 이유에서든 개인적인 선호에서든 카페를 말할 때 차를 떼놓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제대로 만든 커피나 차에서 느껴지는 깊은 향과 맛은 카페라는 공간이 왜 생겼는지, 어째서 필요한지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 중 하나고, 그만큼 두 음료에 쏟는 조사와 공부, 노력이야말로 카페 주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커피를 메인으로 삼는다면 최소한 원두의 품질과 로스팅, 다양한 추출 방법에 대해 공부하고, 차를 판매하고 싶다면 원산지와 브랜드별로 찻잎들을 구입해서 시음해 보는 정도? 굳이 최고의 바리스타가 된다거나 영혼을 울리는 차 맛을 낼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그 깊은 세계에 대한 나름의 감상과 노력하는 자세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민과 노력이야말로, 좋은 카페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이기 때문에.

 

군중심리와 동기의 순수성

자아성찰/가치관 | 2015. 11. 15. 14:54
Posted by 메가퍼세크

며칠 새 큰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파리에서는 테러가 일어나고,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와 그에 대한 강경진압이 이슈가 되고. 페이스북에서는 온통 그 두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뿐이다. 뭐 그런다보다 하고 스크롤을 내리는데,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이는 프로필 사진들. 테러를 겪은 프랑스와 파리 시민들을 응원한다는 뜻에서, 페이스북에서 프로필에 프랑스 국기를 덧씌우는 기능을 만들었다고 한다.


분명 좋은 의도에서 시작했겠지만, 어쩐지 못마땅한 기분이 드는 건 내가 삐딱해서일까. 예전 아이티 지진 때부터 세월호, 아이스버킷, 오바마의 동성애 지지 법안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슈'나 '캠페인' 등이 SNS와 매스컴을 점령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동참할 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약간의 불편함이 항상 내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대중 매체를 통해 어떤 이슈를 접하고, 그 이슈에 대한 의견을 가지고, 그 의견을 표현하는 과정은 과연 순수할 수 있을까. 예컨대 어떤 국가적인 참사가 일어났다고 하면, 아무리 큰 참사라고 해도 결국 자신과 상관 없는 타인의 일인 이상 딱히 감정을 느끼지 않거나 관심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슬픔을 느끼거나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면, 그 안에서 '나는 슬프지 않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나 분위기도 파악 못하는 푼수로 취급받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이 흔한 현상에는 큰 문제가 있다. 우선, 나와 아무 관계도 없고, 내 주변에도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단지 텍스트 몇 줄과 사진, 또는 동영상을 통해 알게 된 사건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당장 내가 아프리카에서 여러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정확한 통계 그래프와 숫자들을 들고 와서 여기에 첨부한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심하게 동요하고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돈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아이의 스토리를 담은 영상을 첨부한다면, 이전의 경우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동정심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감정은 순수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듯 현실의 심각성과 객관성에서 유리된 시각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 강한 감정을 느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위의 예시 속에서 불쌍한 어린아이에게 동정심을 느낀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찾아 실천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그런 사람들에 비해 잠깐 생각하다가 몇 분 안에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최소한 천 배는 될 거라는 데 돈을 걸겠다.


결국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단지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이슈에 대해, 실제로 행동으로 이어지지도 않을 어떤 감정을 가진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그 이슈에 대해 눈꼽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할 작은 행동으로 그 일시적인 감정을 표출하며 자기만족하는 건, 또 어떤 의미가 있을가? 이것이 나에게 있어 이번 페이스북의 프랑스 국기 프로필이 못마땅한 이유다. 


끝으로, 세월호와 아이스 버킷 챌린지, 파리 테러 같은 여러 사건들을 처음 접하고 내가 느낀 솔직한 생각들을, 가감없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어차피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불합리한 이유로 매 초마다 죽어가고 있을 텐데, 단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대규모의 인명이 죽었다고 해서 굳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터무니없는 위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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