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문제 해결

자아성찰/가치관 | 2017. 12. 25. 21:53
Posted by 메가퍼세크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부쩍 싸움이 늘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할 일 없는 어그로꾼들과 더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싸움은 새삼스레 언급할 만큼 특별한 것도 아니고, 만연하다 못해 이제는 당연한 풍경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지만, 언젠가부터 그와 조금은 다른 성격의 싸움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베와 메갈리아, 워마드, 급진적 동성애자 집단과 그 외 별별 욕먹을 만한 일을 하는 집단들에 대한 다수의 가열찬 비난을 주제로 일종의 '흐름' 이 만들어지고, 그 흐름의 방향에 부합하는 글들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상에 대한 분노를 공유하며 서로를 증폭시키고 뒷받침해 주며, 가끔 나타나는 해당 집단의 어그로들이 그 흐름에 기름을 붓는, 그런 종류의 싸움.


물론 대부분의 경우 비난받는 대상에 대한 검증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고, 그 나름의 조사와 논리를 통해 대상을 까야 할 이유는 꽤 확실해져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투기장에서 안심하고 대상에게 맹공을 퍼붓는 사람들의 논리와 문체를 보면, 그런 싸움의 목적이 까는 대상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해결점 모색 따위에 있지 않다는 것쯤은 누구라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인정할 만큼 사악하고, 아무리 욕해도 부족함이 없는 대상에 대한 목적 없는 분노의 표출, 조금 논지를 벗어나거나 성급한 연좌제를 적용해도 눈감아 주는 같은 편들 사이에서 느끼는 소속감과 자신이 나름대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편에 서 있다는 약간의 자부심이, 이런 가열찬 공격의 근본적인 목적과 동기이자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이런 거대하고 맹렬한 분노의 원천에 대한 성급한 추측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런 흐름이 맺을 결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고, 그에 대한 한 가지 답은 뜻밖에도 이 글의 세 번째 문단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정부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해 노무현과 그에 관련된 것들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로 전이된 일베, 여성이 겪는 아픔에 대한 몇 가지 타당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한국 남자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로 썩어버린 메갈리아와 워마드, 차별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해 오히려 거부감을 증폭시키고 있는 일부 게이 집단까지, 내부에서 계속 휘감아 돌다 결국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분노는 암세포와 같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에 대한 분노가 다시 소용돌이치는 이런 상황은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맹목적인 분노의 흐름은 정작 그 분노의 대상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일차원적인 대응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고, 당장 눈에 보이는 분노의 대상과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크게 분리되어 있기 마련이다. 당장 메갈리아의 사례를 봐도,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어려움의 근원을 해결하기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한남' 이라는 명확한 목표에 대한 증오에 집중했지만, 그게 실질적인 문제의 해결에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되었을까? 오히려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은 남자들의 분노를 불러,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 약화에나 크게 기여했을 뿐이다.


물론, 분노라는 감정 자체는 아래 글에서 언급했듯 문제 해결의 중요한 원동력이 될 수 있지만 그런 힘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분노를 벗어난 조금 더 넓은 시야와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런 핵심적인 요소들이 동반되지 않은 분노는 단지 찻잔 속의 태풍에서 그치거나, 가끔은 계속 돌다 썩어버려 또다른 괴물이 되는 결과만을 낳을 뿐. 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자아성찰 > 가치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의와 존중에 대한 생각  (0) 2018.08.20
페미니즘:능력과 차별의 문제  (1) 2018.06.02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  (2) 2017.09.11
선함이라는 것.  (0) 2016.10.24
투표: 선택의 문제에 대하여  (0) 2016.09.26
 

블로그 이미지

메가퍼세크

왠지 모르게 말하고 싶어진 것들을 쌓아두는 곳.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8)
자아성찰 (13)
취미 (31)
경험 (4)
잡설 (14)
보관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