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4. 2. 22. 22:37
Posted by 메가퍼세크

오랜만에 블로그를 돌아보다가, 옛날에 쓰다가 중간에 멈추고 남겨 둔 글을 발견했다.

2014년 12월 10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걸 보면 이미 9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오래된 글이다.

이 글을 처음 쓰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굉장히 많은 차이점이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공유하는 것도 있겠지.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옛날에 썼던 이 글을 완성하면서 과거의 나와 대화해 보았다. 어느 부분이 과거의 생각인지는 굳이 명시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면서 빈번하게 마주하는 것은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한 질문이다. 온전히 자신의 의사로 스스로의 삶을 끝내는 것. 사전적 정의는 굉장히 간단하지만, 이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굉장히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자살이야말로 모든 것이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주체적인 행위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직면하고 있는 세상사로부터 도망치는 비겁하고 치졸한 행위라고도 한다. 이런 상반된 행위에 대한 많은 사람의 생각에 더해, 내가 가진 생각들을 풀어내 보자. 

 

우선, 자살이라는 행위가 좋은 것인지에 대한 판단부터 시작하자. 자살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는 논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논리는, '사후세계' 라는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것이다. 생에서 겪고 있는 여러 고난과 어려움들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해도, 이 생의 다음에 오는 별도의 생이 있어 지금의 고통이 그대로 이어지거나, 때로는 더욱 증폭된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이 논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살에 대한 강한 억제력이 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지 않다. 사후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현재의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해 그런 피드백을 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지 등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있고,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그런 부분들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꺼려진다는 점도 있다. 내가 자살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전적으로 현생에 대한 나의 판단에 의한 것이고 싶다.

두 번째 논리는, 자살을 했을 때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겪을 여러 형태의 고통을 언급한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모와 가족들을 비롯해 친지와 동료 등, 자신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없음으로써 굉장히 큰 심리적 고통을 겪을 것이고, 그런 것은 도덕적이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이 논리는 자신이 죽은 후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한 굉장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살을 실제로 감행하고 난 후에는 어차피 자신이 죽고 없을 것인데 주변 사람들의 입장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되물을 수도 있다. 

이쯤에서 죽음이라는 것의 근본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아는 지식 안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과 서로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얼마나 강한 고통을 겪어도 죽음이라는 상태로 변하는 순간 모두 사라지고, 살아 있는 사람들로 인해 겪는 이익이나 손해 등의 모든 상호작용도 함께 없어진다. 결국,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벽한 의미의 '탈출구' 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게임에서의 로그아웃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게임을 플레이함으로써 얻는 여러 형태의 이득(즐거움, 돈, 타임 킬링 등)이 충분히 있고, 그것이 게임을 하지 않을 때의 상태와 비교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생이라는 조금 더 복잡한 게임에 적용되지 않을 만한 이유가 없다. 삶이라는 것을 유지하는 동안 얻는 이득이 유지하지 않을 때보다 크다고 생각하면 삶을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로그아웃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게임이든 인생이든 자신의 로그아웃(죽음)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이 사냥하던 길드원, 낳아주신 부모님, 깊은 감정적 유대를 공유하는 친구들 등. 사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런 이유로 게임(인생)을 떠나지 않는 사람도 매우 많고, 이런 것들도 한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감정적인)에 들어갈 것이다. 결국 이런 종류의 이득에도 별 가치를 느끼지 못하거나, 그런 이득들을 합친 결과물이 마이너스가 된다면 로그아웃을 택할 수 있다.(또는 어차피 그런 감정들도 로그아웃과 함께 모두 사라진다는 생각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는 자살을 이미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담은 어떨까? 죽음 직전에서 돌아와 생의 기쁨을 느꼈다던가, 자살을 결심했던 것을 후회하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는 등. 이런 류의 경험담은 너무 흔하다 못해 클리셰가 된 지 오래고, 설득력도 높지 않다.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살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없는데, 실패한 사람들의 경험담만을 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나마 자살이 극도로 실패하기 쉬운 일이라면 귀담아 들을 만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성의만으로도 100%에 가까운 성공률을 얻을 수 있는데 말이다. 

(투신 자살이라면 몇 층 더 높은 건물을 고르고, 음독 자살이라면 조금 더 강한 약을 선택하고, 총을 사용하겠다면 권총보다는 샷건을 선택하는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실패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조금만 사족을 붙이면,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을 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이라는 상태로 이동하기까지 겪는 중간 과정에 대한 공포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퓨처라마' 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것처럼, 길거리에 적은 금액을 넣으면 손쉽게 자살할 수 있는 부스를 만든다면? 자살률은 아무리 적어도 최소 두세 배 정도는 급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런 자잘한 요소들을 제외하고 보면 자살이란 현실이라는 컨텐츠에 대한 긍정적 요소들에서 부정적 요소들을 뺀 것이 마이너스가 되었을 때 행하는 단순한 손익 계산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살률이 높은 국가의 국민들은 일반적으로 그 국가에서의 삶에 대해 만족보다는 불만을 느끼고 있는 것이고, 자살률이 낮은 나라는 그 반대일 확률이 높겠지. 아니, 사실 만족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문화에 따른 가치관의 영향도 클 수 있다. 가족을 좀더 소중히 여기거나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성향이 큰 나라의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자살을 덜 할 것이고, 자신의 행복이 좀더 중요하고 두려움도 적은 사람들은 더 쉽게 자살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상황은 어떨까? 나는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현실과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뭔가 의미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인생이라는 것에서 즐기는 컨텐츠들은 충분히 계속 즐길 만한 재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일 만나거나 나를 아는 사람들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고,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내가 존중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또한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여기까지 나열한 것이 내가 자살할 생각 없이 살아있는 이유이고, 당분간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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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우아빠 사건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23. 2. 7. 22:30
Posted by 메가퍼세크

며칠 새 떠들썩한 일이 생겼다. 150만이 넘는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승우아빠 채널에서 아는 유튜버가 오픈한 식당에 찾아가 컨설팅을 하는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그 식당에서 사람을 당근마켓에서 뽑는다는 말을 듣자 '그런 데서 뽑으면 사람도 중고 같다', '정상적인 곳에서 뽑아라' 는 발언을 한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공격당한 당근마켓 측에서 오피셜 계정을 통해 위트있는 댓글로 받아쳤지만, 승우아빠는 라이브 방송에서 그 댓글을 두고 '무료광고 하지 마라' 면서 댓삭해야겠다, 좋은 말로 한 게 아니라며 더 큰 논란을 만들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 발생한 이 논란은 토요일 새벽부터 커뮤니티를 타고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사람들의 항의 댓글을 지웠다, 이번 행동과 모순되는 승우아빠의 과거 행적이 발굴되었다는 등의 떡밥이 계속 공급되며 화력이 끝없이 올라갔다. 뉴스기사까지 수없이 나오는 와중에 당사자인 승우아빠만이 계속 묵묵부답이다가, 논란 점화 후 3일이 지난 오늘에야 사과문이 올라왔다. 사과문에서는 계속 거론되는 자신의 잘못을 대부분 인정하되 잘못 퍼진 논란들에 대해서는 해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해명이 나오기까지 계속 끓어오르던 여론은 여전히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느낀 첫 감정은 '무섭다' 와 '빠르다' 였다. 논란이 되기 전에 해당 영상을 직접 봤지만 크게 많은 걸 느끼지는 못했는데, 어느 순간 그 영상의 한 포인트가 주목되더니 하루 이틀만에 커뮤니티에 퍼지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질타의 대상이 된 것이다. 논란이 된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건과 관련된 이전의 행적, 사건과 관련 없지만 좋지 않게 보였던 이전 성격들까지 남김없이 발굴되어 공격에 힘을 보탰다. 심지어는 승우아빠가 캐나다 사람이라는 사실이나 승우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까지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사과문에도 용서는 없었다. 사건을 인지한 이후 바로 회사와 논의해 조치를 취했고 이미 빡빡하게 잡힌 해외일정을 수행하다가 당근 측의 연락을 받고 정황을 취합해서 사과문을 올렸다는 해명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논란을 그냥 묻어갈 생각이었다가 너무 판이 커지니 어쩔 수 없이 사과했다는 쪽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  물론 해명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고 사실 증명할 방법도 별로 없지만, 마찬가지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측도 심증 외에는 크게 근거가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불명확한 것을 근거로 비판하는 것은 굉장히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비난은 재판이 아니고 무죄 추정의 법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승우아빠가 말한 것들이 모두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걸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운 좋게 남아있지 않는 이상 사람들의 머릿속에 내려진 판결을 뒤집기는 힘들 것 같다. 회사에 바로 전화해서 조치를 취했다고 해도 그 전화를 녹음하지 않았다면 그걸 증명할 수 있을까? 일정이 충분히 바쁘고 피곤해서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은? 최악의 경우 정말로 최선의 대처를 다했음에도 수십, 수백만 명에게 두들겨맞는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게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애초에 이미 논란이 된 시점에서 어떻게 행동해도 그 논란을 완전히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게 아닐까?

물론 이런 무서운 상황이 그 유튜버의 과거의 행적이나 잘못에 대한 업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뭐 형법에서도 초범보다는 재범의 처벌이 무겁고 이전의 행적이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정황들이 불명확한 근거의 자리를 대체하는 데까지 가서는 안되지 않을까. 그리고 과거의 행적이라고 말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승우아빠의 명확한 잘못이 아닌 호불호가 갈리는 방송 스타일과 성격에도 근거하고 있다. 많은 브랜드를 맛과 품질을 이유로 거침없이 비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 성격은 확실히 많은 사람들의 불호를 살 만하지만, 그것 또한 논란이 일어났을 때 불명확한 근거를 채우는 편향성으로 작용하는 건 이상한 것 같다. 언젠가 저렇게 한순간에 공격당할 수 있으니 나도 행동과 언행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잘못이 아닌데도 그로 인해 미래의 잘못을 곱절로 비판받는 것은 이상하다는 반감도 함께 든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고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걸 이해하고 맞춰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픈 일이다. 필요한 선에서는 남의 눈을 신경쓰되 나 자신이 비합리적인 눈으로 남을 보지는 않도록 끝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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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와 핏줄에 대한 생각

카테고리 없음 | 2021. 11. 7. 22:08
Posted by 메가퍼세크

 나는 예전부터 가족이나 가문, 핏줄 같은 것들의 가치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나 그런 인연을 통해 이어진 친척들에 대한 친근감 같은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애매한 범위의 집단에 대한 생각보다는 나 자신이라는 작은 범위와 세상의 보편적 법칙이라는 넓은 범위에 대해서 좀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왔다. 하지만 살면서 자신의 가족이나 혈연에 대해 강한 소속감을 가지거나 거기에서 행복을 얻는 사람들을 보고, 내 가족들과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이런 주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과 친척, 그리고 그들을 포함하는 가문과 혈연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먼저, 생물학적으로 생각하면 혈연은 단지 자손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유전자 염기서열의 자가복제 과정일 뿐이다. 수많은 종류의 형질 중에서 현재 주어진 환경에 적합한 것을 발현하는 특정한 개체들이 성공을 이루고, 더 많은 자손을 통해 자기 유전자의 복제품을 남기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 태초부터 모든 개체들이 자신의 복제품을 남기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단지 더 많은 복제를 남기려는 이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기에 모두가 자손 번식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과학은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나에게서 위로 쭉 이어지는 가계도의 줄기와 어쩌면 아래로 이어질 가지들은 모두 아무런 목적 없는 자연적인 연쇄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런 본능에 순응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누군가는 자신이 유전자의 본능에 따라 짝을 찾아 헤매는 동물이라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본능을 초월한 이성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런 나름대로의 철학은 그 사람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는 것을 방해하겠지만, 사실 굳이 유전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후세에 흔적을 남기는 방법은 적지 않다. 수백 년에서 수천 년까지 자신의 생각을 세계에 남긴 수많은 철학자와 성인, 예술가, 과학자, 기술자를 생각해 보면, 굳이 유전자를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무언가를 지속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결국, 유전자의 역할을 후세에 자신의 구성 성분을 전달하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미 그것을 일정 부분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을 손에 넣은 것이다. 도킨스가 말한 밈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유전자와 밈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유전자라는 정교한 정치는 번식이라는 귀찮고 번거로운 과정을 부추기는 매커니즘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짝을 찾고 자신과 닮은 자손을 남기는 행위에 대해 생물학적 본성에 뿌리를 둔 다양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과 살을 맞대고, 자신과 배우자의 얼굴을 닮은 귀여운 아이를 안아보는 것과 같은 경험에서 느끼는 강렬한 행복감은 가계도를 아래로 끝없이 이어나가는 원동력이고, 몇몇 가계도가 끊기더라도 다른 가계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인간이라는 종을 오랫동안 유지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반면 밈이라는 정신적인 요소가 가져오는 행복감은 조금 더 복잡하다. 글이나 그림이나 철학, 과학적 이론과 같은 무언가를 보면서 창작자의 다양한 감정과 정서, 생각을 전달받고, 그것이 주로 미적 감각이나 재미, 공감을 느끼는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함으로써 그런 생각을 후세로 전하고 싶은 욕구와 행복감을 유발한다. 문학을 보며 작가의 내면세계에서 감동받은 작가는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것이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 감독이 의도한 흔적을 남긴다.

 

 나는 여태껏 논리적, 감성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밈의 전달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영역에서 느낀 것들이 유전적 본능에 의한 일차적 쾌락보다 좀더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물론 그 둘에 우열은 없다. 300년 전 과학자의 저술을 보며 그 당시 그가 느꼈을 생각에 공감하는 마음이나, 누군가 자기 아이를 안고서 느끼는 행복감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 자잘한 문제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둘이 다양한 영역에서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합주와 변주들이다. 인간의 결혼과 출산과 양육이 동물의 그것보다 따뜻하게 보이는 것은, 단순히 짝을 찾고 번식하는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그것이 과거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내려온 수많은 밈들과 엮이면서 만들어낸 정서적 의미들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동물의 그것과 같다면 모든 매체는 번식행위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을 통해 본성을 자극하는 포르노만을 내보내겠지만, 연인의 사랑이나 부모의 희생과 같은 정서적 주제들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들은 매년 천문학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렇게 인간의 원시적 본능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확장된 정서적 의미 부여의 여러 갈래 중에서, 요즘 가장 흥미가 가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혈연의 연쇄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체를 막론하고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소재 가운데 하나이고, 대단한 능력과 의지로 영웅적 업적을 이뤄낸 인물들이 자신과 무언가의 관계로 엮여 있다는 기분은 사람들 각자의 삶에도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나의 유전자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사람들의 가계도를 이어 보면 가깝게는 조선과 고려, 멀게는 중국, 몽골과 어쩌면 중앙아시아와 유럽에 이를 수도 있겠지. 그 시작이 어디까지 도달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에서 수백만 명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나라의 흥망을 걸고 적국과 맞서 싸운 병사나 장군, 관료나 왕으로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골몰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하루하루 먹고 살 일을 걱정하거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던 걸인도 있겠지만,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인생에 어느 시점에서 성공적으로 자손을 남김으로써 나에게 유전자의 일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내 몸의 각 부분을 이루는 설계도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수많은 사람 중 누군가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고, 이런 생각을 미래의 나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어 포기했을 수도 있겠지.

 

 이런 식으로 과거의 조상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밈을 전파하는 창작자들에 대해 갖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그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내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보고 그의 생각에 공감하며 한번 만나 대화해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던 것처럼, 수백 년 전에 개울가에서 나와 같은 상념에 빠졌을 조상을 만나 이런 근원적인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생각을 교류한다면 얼마나 짜릿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나는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할 것 같지만, 누군가 비슷한 생각을 할 미래의 생물학적 or 정신적 자손을 위해 이런 글들을 남겨두는 것은 나름대로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이 글을 볼 미래의 나 또한 어떤 관점에서는 지금의 내가 낳은 정신적 자손일 수 있겠지.

 

'사진에 대하여' 를 읽고

취미/책 | 2020. 8. 18. 18:14
Posted by 메가퍼세크

 

이것도 예전에 참여했던 독서모임에서 봤던 책이다. 사진 기법이나 기술적인 면을 다룰 것 같은 제목과는 달리, 사진을 찍는 행위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다룬 책이다. 생소한 주제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골몰하다 보니 떠오르는 게 많아 보람찼던 기억이 난다. 이런 식으로 혼자서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주제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보는 게 독서모임의 가장 큰 순기능 중 하나가 아닐지.

 

이하 스포일러.

 

 

 

예전에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루이스 C.K 라는 코미디언의 스탠딩 코미디를 본 적이 있다. 딸의 학교에서 단체로 춤을 추는 행사를 보러 갔는데, 거기 있는 부모들이 모두 핸드폰으로 아이들의 춤을 찍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눈)을 놔두고 핸드폰 카메라로 눈을 가리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이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공연을 했고, 정작 그렇게 찍어 올린 영상도 어차피 아무도 안 볼 SNS에 올라가 영혼 없는 칭찬이나 들을 게 뻔하다고 코미디언은 말했다. 웃기지만 나름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영상을 끝까지 봤고, 한 며칠 동안 그 사람의 말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아마도 그게 무언가를 찍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의 출발점이었던 것 같다.


사진이란 무엇일까. 이 책에서 대답하고자 하는 물음은 이렇게도 단순한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만, 언제나 그렇듯 단순하고 포괄적인 질문일수록 제대로 된 답변을 하는 것은 어렵다. 누군가는 '사진' 이라는 단어를 영화나 동영상 등과 엮어 '촬영하는 것' 으로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회의록이나 금융 기록, 증거사진과 같은 '기록물'로 보고, 누군가는 회화와 같은 '예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렇듯 다양한 정의와 관점이 공존하는 '사진' 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저자는 어떤 구도에서 담아냈을까.


책의 첫머리는 '찍는다는 것' 의 의미에서부터 출발한다. 사진을 찍는 것은 연속된 시간 속에서 지나가는 수많은 장면 중의 하나를 담아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현실에서 매 순간의 이미지는 그 다음 순간에 지나가는 새로운 이미지에 의해 즉시 덮어씌워지지만, 카메라에 포착된 순간 그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별도의 프레임 속에 고정되어 남는다. 이렇게 고정된 이미지는 피사체의 다양한 양태 중 일부분만을 골라 강조할 수 있고, 증명하고 싶은 것의 원형을 남길 수 있고,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나중에 회상하는 매개체로 사용될 수도 있다. 사진은 실제 있었던 장면을 원형에 가깝게 재현하는 사실성을 가지면서도 사진사의 마음에 드는 장면만을 남기는 해석적인 측면 또한 가지며, 그렇기에 사진을 찍는 행위는 폭력적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진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이미지의 복제물을 쏟아냄으로써 사람들은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실감을 느끼고, 경험과 현실에 대한 고양감을 느낀다는 말도 덧붙인다.


책의 다음 부분은 사진이 가지는 도덕적 의미에 대해 다룬다. 처음에는 무언가 아름답고 세련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던 사진은 이윽고 다양하고 동등한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만인이 공유하는 인간의 조건이나 본성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고, 이윽고 고통스럽고 추한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사람들의 정신적 경험을 넓히는 목적을 위해 쓰였다. 단지 무언가를 강조하는 힘을 가졌을 뿐인 사진이 세상의 다양한 측면을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과 도덕의 경계를 드러내고 불편한 것을 꺼내놓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우리의 잡동사니가 예술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부스러기가 역사가 되어버렸다" 라는 말이 이런 시각에 대한 불편함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다음 두 장에서는 사진의 예술적 측면에 대해 다룬다. 단지 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추하거나 별볼일 없는 것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냈고, 어떤 식으로 기존에 없었던 것을 표현하고자 애썼고, 예술이라는 관념에 대해 어떤 식으로 집착하고 어떤 식으로 떨쳐내려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을 통해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표현할 가치가 있는 사물과 장면은 무엇인지, 표현상의 제약과 표준에 대한 집착을 통해 사진을 예술의 경지로 올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진작가들의 고민은 인상깊었지만, 회화나 기존 예술에 대한 비뚤어진 열등감의 발로로 보이기도 했다.


마지막 장에서는 사진을 통한 이미지의 범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장씩 찍을 수 있는 사진과 영상 매체의 발달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보다 현실에 대한 이미지로 세상을 접한다. SNS에 올려둔 어제의 음식 사진을 통해 어제의 이미지와 마주하고, 오늘 찍은 자기 사진을 통해 스스로의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다.끝없이 복잡해지는 현실에 지친 사람들은 현실의 단면적인 이미지의 총합으로 현실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다시 이미지로 재생산하고 소비하며 매일을 살아간다. 하지만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얻은 이미지가 정말로 현실일까. 시간이 지나면 바래고 잊혀지는 기억 속의 이미지에 비해 사진 속의 과거는 언제나 생생하지만, 가끔은 그런 지나친 생생함이 물을 주지 않아도 항상 푸른 조화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진과 동영상이 무엇보다 현실과 가깝다고 하지만, 애초에 그 현실이라는 건 대체 뭘까. 그 어떤 매체도 어떤 순간의 모든 느낌과 생각, 오감의 정보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이상, 사진을 통한 기록 또한 현실의 온전한 기록이 아니라 기억과 재생을 돕는 하나의 가공품일 뿐이다.

 

비록 사진을 통한 기억과 재생이 다른 매체에 비해 생생해 보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런 부분적인 생생함이 현실이라는 복잡한 실체의 다른 측면들을 빛바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사진과 동영상에 담긴 생생한 기록보다는 자연스럽게 잊혀지고 가끔씩 떠오르는 경험과 기억들을 선호하는 편이라, '사진은 아름다움을 창조하지만 고갈시키기도 한다' 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갔다. 지나치게 선명한 색들로만 칠해진 그림이 눈을 피로하게 하는 것처럼, 범람하는 이미지 속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 희미하고 잊혀지는 자연스러운 기억의 이미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사진 하나 없는 일기장에 짧은 글 몇 줄로 하루의 인상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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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를 읽고

취미/책 | 2020. 8. 18. 18:04
Posted by 메가퍼세크

 

평소 별 생각 없이 쓰는 개소리라는 단어에 대해, 철학적 차원에서 고찰한 특이한 책이다.

 

예전에 어떤 독서클럽에서 읽고 후기를 썼는데, 오랜만에 보니 괜찮아 보여서 여기에 보관해 둔다.

물론 평소처럼 스포일러 포함.

 

 

 

 

 

선동과 개소리의 위력

서점의 교양 코너에 있는 많은 책들의 도입부는 그 책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논의의 주제가 되는 단어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탐구하는 것은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며, 동시에 다루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이끌어내는 좋은 출발점이기도 하다.

목차가 필요없을 정도로 짧은 이 책의 전개도 그런 전형적인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분석의 대상이 되는 단어는 조금 독특하다. 개소리라는 일상적이고 친근한 단어는 얼핏 진지한 이야기의 주제로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책의 다면적이고 섬세한 분석은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많은 개념들을 파헤쳐 드러낸다.

비슷한 단어와의 비교, bull과 shit이라는 두 단어의 역사적, 의미적 고찰과 실제적 사용례 분석 등을 통해 저자가 최종적으로 내리는 결론은, 개소리라는 단어가 '진리값을 신경쓰지 않는 주장'을 의미한다는 것. 자신이 아는 진실을 고의로 왜곡해서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주장을 꾸며내는 것은 개소리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개소리는 진실에 연연하지 않는 특성 때문에 거짓말보다 큰 진실의 적이라고 말한다.

개소리에 대한 이 책의 정의에 따르면, 그 개념에 가장 잘 들어맞고 비슷한 단어는 아마 '선동'이 아닐까. 남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의 주장으로, 진실의 여부보다 설득력을 기준으로 구성된 선동의 개념은 책에서 이야기하는 개소리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멀게는 나치 독일에서부터 가깝게는 일베와 워마드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배타적인 집단들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신경쓰지 않는 이런 '선동적인' 개소리들이 힘을 발휘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준다는 점일 것이다. 히틀러는 1차 대전의 패배에 좌절한 독일인들에게 '우리는 잘 싸웠지만,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졌다' 는 말을 들려주어 인기를 얻었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지지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믿는 것이 자국과 자신의 무너진 자존심을 세워줄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고, 개소리에서 자존감을 공급받는 순간부터 그 말을 부정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진실에 신경써야 한다는 제약이 없으므로, 개소리로 묶인 집단의 사람들은 더 편하고 거리낌없이 자신이 믿는 것을 부르짖을 수도 있다.

반면 진실을 추구하는 길은 험난하다. 거의 모든 지식의 영역에서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한 분야에서 정립된 가장 정확한 진실을 깊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한 소수의 학자들뿐인 경우가 많다. 결국 일반인이 가급적 정확한 정보에 접근하려면 그 분야의 믿을만한 책이나 논문, 기사 등을 찾아보며 끊임없는 비판적 수용을 거쳐야 하고, 그렇게 얻은 지식마저도 회의주의에 따라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으므로 과도하게 맹신하거나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도 없다. 게다가 개소리를 믿을 때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이나 자존감 같은 것은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둘의 싸움에서 승패는 명확하다. 소수의 전문가와 지식인들이 철저하게 검증해 조금씩 내놓은 진실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람들이 쉴새없이 늘어놓는 개소리에 파묻히기 마련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가짜 정보와 선동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어딘가에는 이 근본적인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만약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해도, 수많은 개소리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반드시 있다' 고 하면 개소리가 될 테니, '있었으면 한다' 정도로 끝내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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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tao&nami

취미/음악 | 2019. 8. 13. 20:19
Posted by 메가퍼세크

나는 새로운 음악을 잘 듣지 않는 편이다. 한때는 내 취향을 찾겠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한번 좋다고 느낀 음악은 기본적으로 몇 주일씩 듣고 어느 정도 질리면 예전에 꽂혔던 곡을 듣는 성향 탓에 어느새 꽂힌 음악들의 레퍼토리만으로 이 사이클을 한 바퀴 돌릴 수 있게 되어버렸다. 이쯤 되니 슬슬 새로운 곡을 모으는 게 귀찮아지기도 했고, 취향도 꽤 확실해져서 듣던 곡만 돌려 들으며 매일을 보내고 있다. 나이 든 어르신들이 아직도 7080 음악을 찾는 것처럼, 어쩌면 나도 평생 동안 지금 좋아하는 음악들만을 반복해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나 매일 반복하면서 같은 노래들을 수십 번씩 듣다 보면 가끔은 각 곡들에 처음 빠졌던 순간부터 마음에 드는 소절, 가사와 곡에 얽힌 경험들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쩌면 음악이 아니라 그런 기억들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오늘도 그런 기억의 모음집들을 더듬다가, 문득 떠올랐던 특히 강렬했던 기억을 하나 풀어놓으려 한다.

 

 

 

hatao&nami는 일본의 2인조.. 밴드?라고 하기는 조금 애매하고, 합주단?이나 듀오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nami는 아이리쉬 하프와 피아노를, hatao는 다양한 종류의 관악기를 연주하는 전문 연주자다. 장르는 기본적으로는 아일랜드 음악이지만 북유럽 계열의 민속 음악도 연주하며, 일본 내에서의 공연을 위주로 활동하는 것 같다. 공식 홈페이지도 일본어로만 되어 있고, 유튜브에서도 hatao의 개인 계정에서 가끔씩 공연 영상을 올리는 정도다. 

 

내가 이 밴드를 알게 된 건 평소 좋아하던 아일랜드 음악 밴드 '바드'와의 합동 공연 덕분이었는데, 예매할 때는 누군지도 몰랐지만 막상 찾아가 연주를 듣고서는 순식간에 빠져버렸던 기억이 난다. 경쾌함과 서정성을 모두 갖춘 아일랜드 음악의 매력을 잘 살려 주는 아이리쉬 하프와 피아노의 선율도 좋았고, 다양한 종류의 관악기들에서 나오는 독특한 톤과 음색들, 보컬은 없지만 마치 이야기하는 듯한 멜로디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정말 예술적이었다. 

 

공연 중간중간 들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는데, 관악기를 맡고 있는 hatao 씨는 그야말로 일본의 장인 정신을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사람이었다. 젊을 때부터 관악기와 포크 음악에 빠져 십수 년 이상의 세월 동안 다양한 관악기들을 섭렵하고, 아일랜드와 북유럽을 오가며 각지의 악기와 연주 기법에 대해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공연 중에 사용했던 관악기만 대여섯 개가 넘었는데, 그중 하나는 북유럽의 작은 마을에서 구한 소나무 피리라면서 세계에 몇 없는 귀중한 악기라고 했다. 관악기에 대한 열정만큼 그의 연주는 시종일관 완벽하면서도 정열적이었고, 스피커로는 다 전할 수 없는 두터우면서도 섬세한 선율로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진지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고, 멘트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숨길 수 없는 유쾌함과 해맑은 미소를 보면서 진심으로 자기 일을 즐기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분의 멋진 실력이 잘 드러났던 곡은 수없이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Night flight라는 곡이 참 마음에 들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도 야간비행이라는 제목의 분위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조용함과 경쾌함이라는 상반된 분위기의 굴곡이 멋지게 표현된 느낌.

 

(공식 채널에 좋은 음질의 영상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CD에서 추출한 음원을 업로드했다. 영상 설명에 공식 채널과 홈페이지를 링크했으니 참조)

 

하프와 피아노를 맡은 nami 씨도 그 못지않게 해맑고 유쾌하면서도 차분한 면을 가진 사람이었다. 첫인사부터 시작해서 시종일관 쾌활한 분위기로 멘트를 진행하다가도, 연주에 몰입할 때면 표정이 확 바뀌면서 곡의 리듬에만 집중하는 모습이 멋있었다. 연주 레퍼토리 중간에 Time flow라는 곡이 있었는데, 시작하기 전에 이 곡을 작곡할 때의 심정에 대해 이야기했던 게 기억난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나가고 나서 오랫동안 슬픔에 빠져 있다가, 문득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언젠가는 잊히겠지 하는 달관한 마음이 들어 작곡한 곡이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실제로 음악을 들을 때도 6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다양한 감정들이 흐르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초반에는 흐느끼는 듯하다가 방황하고, 무언가를 읊조리고, 체념하는 듯한 선율들. 분명 가사가 없음에도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다 알 것 같은, 음악이 왜 만국 공통의 언어인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곡이다.

 

 

 

그 외에도 소개하고 싶은 곡은 수없이 많지만, 너무 많은 것을 말하려다 하나도 제대로 말하지 못할까 싶어 일단 이쯤에서 접는다. 위의 두 곡이 마음에 드는 분들은 유튜브에 hatao nami를 검색해 보시기를. 이 글에서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멋진 듀오와,. 그들의 좋은 곡 두 개를 소개한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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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익에 대한 생각

잡설 | 2018. 10. 3. 21:16
Posted by 메가퍼세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이른바 '뜨거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실과 의견, 입장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입장을 찾는 것은 급류 속에서 중심을 잡는 것과도 비슷하고, 충분히 생각하고 정리해 표현한 생각도 나중에 사태가 정리되고 천천히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것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번 사건에 대한 수많은 말들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지만 결국 사람 마음이란 게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여러 글들과 인터뷰, 영상, 댓글들을 보며 나름의 생각과 의견들이 쌓여가니, 어딘가에 갈무리라도 해 두고 싶은 마음에 여기에 글을 쓰게 되었다.


황교익이라는 사람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계기는, 한국 천일염의 문제에 대해 다룬 기사에서였다. 별 생각 없이 쓰던 천일염이 사실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지고,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를 불순물들이 포함되어 있는 위험한 조미료라는 주장을 폈는데, 그 근거로 염전 생산환경에서 쓰는 장판의 재질이나, 한국의 천일염 불순물 허용치 등을 들었다. 적어도 내가 찾아본 기사와 인터뷰들에서 황교익은 충분한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으며, 과거에 자신이 천일염을 옹호했던 일에 대해서도 사과할 줄 아는 지적 양심을 갖춘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비정상회담과 알쓸신잡, 수요미식회 등의 프로그램에서 황교익이 했던 말들을 보기 시작하면서다. 방송에서 나온 말들이야 으레 앞뒤 잘리고 돌아다니기 마련인지라 크게 신용하지 않는 편이지만, 거기에 나온 몇몇 말들의 수위가 꽤 높은 것 같아서 좀더 긴 버전의 발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한정식이 기생요릿집에서 유래한 최근의 문화라거나, 불고기의 이름이 야키니쿠에서 온 말이라거나 하는 많은 쟁점들은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고, 혹시 틀린 부분이 있다고 해도 나에게는 크게 관심이 가는 분야가 아니다. 하지만, 맛이라는 분야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명확히 문제였던 것은, 방송에서 언급하는 '사실' 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그 사실을 가지고 어떤 '가치'들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단정하는 황교익의 태도였다.


알쓸신잡에서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는 건 사람들의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 착각이라면서 실제로 차이가 존재한다는 유시민을 '불쌍해 보인다', '맛있는 걸 안 먹고 자란 것 같다' 라며 조롱한다든가, 비정상회담에서 일본 요리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면서 중국과 이탈리아 요리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비하한다든가, 쌈은 한국 음식을 맛없게 만들고 재료의 분별력을 없애는 방법 중 하나라든가 하는, 타인의 취향과 가치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폄하하는 그 발언들은 황교익이라는 사람에 대한 정나미를 완전히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황교익이라는 사람은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으로 보나, 실제 방송에서의 역할로 보나, 한 분야에서의 지식을 전달해 주는 '전문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식을 탐구하고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일까? 의견이 많이 갈리겠지만, 나는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만 이야기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한 분야를 대표해 대중 앞에 나온 이상 대중은 그 분야에 대해 전문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고, 명확히 검증된 사실들 사이에 그 전문가의 가치 판단이나 왜곡된 해석이 포함되어도 그걸 걸러낼 능력이 없다. 이런 역학관계 속에서 자신이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대중에게 설파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전문가가 아닌 '선동가'와 '사기꾼' 이 되고, 진실을 전달하는 사람의 자격을 잃는다.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달고, 어떤 음식이 '맛없는 음식' 라고 단정하는 것이 정확히 그런 행위다.


좀더 쉬운 이해를 위해 잠시 맛의 영역을 벗어나 보자. 어떤 음악 평론가가 방송에서 방탄소년단의 음악에 대해 '이런 음악은 가치가 없고, 이걸 듣는 사람들은 음악도 모르는 바보들이다' 라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그 평론가가 대중음악을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클래식 전문이라면? 그 후에 어떤 반응이 이어질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한 가지에 대해 객관적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타인의 주관적 경험의 영역에 끼어들 자격을 주는 것은 아니니까. 전문가의 권위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지키는 동안에만 유효한 것이다.

 

예의와 존중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18. 8. 20. 22:50
Posted by 메가퍼세크

사람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사람의 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없이 생각해 보았을,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을 만한 그런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살아가며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때로는 그 사람들과 더없이 친해지거나 극도로 미워하는 사이가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한 사람의 인간관계 전체를 아우른다고 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답과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문제에 답하는 과정이 으레 그렇듯, 이 문제에 답하는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가 다루는 대상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와 인식이다. 가장 윗 문장에 들어 있는 두 명의 '사람', 즉 '나'와 '타인'에 대한 해석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기본적인 공리와 같다. 나는 이 중요한 위치에, '나와 타인은 동등한 위치에 있고,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권리가 없다' 라는 문장을 넣어서 생각을 시작했다. 평등과 각자의 주권 존중이야말로 인권이라는 개념의 가장 근본적인 시작이고, 동시에 인간관계의 대전제로서 가장 적합한 위치를 가질 테니까.


일단 이 단순한 문장을 전제로 삼으면, 인간관계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마주치는 많은 상황들에 대한 대답과 새로운 질문들이 솟아난다. 예컨대 서로에 대한 권리가 없는 동등한 개인이 같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에게서 그럴 수 있는 권리를 얻어야 하고, 그렇기에 '부탁'과 승낙 혹은 거절이라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부탁의 범위 안에는 서로간의 의무를 규정하는 '계약'이나 '약속'이 포함되어 있고,의무를 포함하는 관계에 동의한다면 그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따라 서로간의 '신용' 또는 '신뢰' 가 생겨난다.


이렇게 생겨난 신용과 신뢰라는 개념은 결국 타인에 대한 믿음의 지표이고, 다르게 말하면 그 사람이 나의 시간이나 돈, 또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떤 약속에 10분 늦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10분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약속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할 테니까.


나에 대한 타인의 존중도를 손쉽게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표는 '예의'라는 개념이다. 이 또한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가 있을 법한 까다로운 개념이지만, 나에게 있어 예의란 '상대의 거리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싫어하는 행동을 고의로 하지 않고, 꺼리는 화제를 억지로 꺼내지 않는 것.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사람마다 거리와 피해의 기준이 천차만별이기에 제대로 지키는 건 어렵다. 백 가지 행동을 조심하더라도 한 가지 행동을 실수하면 예의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생각도 하지 못한 행동에서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 만큼. 


그렇게 까다로운 예의들 중에서도 가장 의견이 갈리고 지키기 어려운 것은, 각자의 감정을 어떻게 표출하는지에 대한 기준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문제 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단지 상대를 무시하며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는 무례한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관점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특히 분노의 원인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에게 짜증을 표출하는 행위야말로 무례함과 천박함의 극치라고 생각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라는 개념의 본질은 그런 까다로운 기준이나 미묘한 감정들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타인과의 거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의 기준으로 타인의 호불호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되겠지' 라는 지레짐작을 버리고, 언제든지 상대가 자신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자신의 거리를 침범당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역설적이지만, 어떤 사람을 정말로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최소한의 거리를 철저하게 지킬 때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상호 존중과 진심을 다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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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능력과 차별의 문제

자아성찰/가치관 | 2018. 6. 2. 08:37
Posted by 메가퍼세크

유튜브를 돌아다니다, 조던 피터슨이라는 교수가 페미니즘에 대해 인터뷰한 동영상을 봤다.

https://youtu.be/N7cf_DW5CQc

시종일관 정중하고 침착한 태도로 임하는 교수의 태도와 철저한 논리 속에서 근거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주장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인터뷰 내내 교과서적인 무례함과 편협함으로 일관했던 여자 앵커의 태도였다. 교수의 주장이 담고 있는 객관적 태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한 주장을 끝임없이 감정적으로 곡해해서 받아들이며, 상대의 말을 수없이 끊어대며 자기 할 말만 한없이 반복하는, 그야말로 극단적 페미니스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모습. 


인간의 합리성을 믿는 사람이라면 크나큰 좌절과 함께 화가 치밀어 오를 만한 광경이지만, 사실 그런 순간적인 감정이야말로 문제에 대한 심층적 접근을 막는 가장 큰 장벽 중의 하나다. 부질없는 화를 억제하고 영상을 다시 보면서, 그런 극단적인 태도가 왜 생겨났을지 고찰해 보았다.


인터뷰 내내 앵커의 말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전제는, '여자는 남자에 비해 크게 차별받고 있으며, 무슨 수를 써서든 이걸 없애야 한다' 라는 가정이다. 이 가정이 정말 맞는지, 옳은지에 대한 판단을 차치하고 '차별에 대한 피해의식' 이라는 짧은 단어로 요약해보면, 문제의 본질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여성들은 자신이 크게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할까?


물론 오직 성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차별도 존재하겠지만, 중점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터뷰에서 교수가 말한 것과 같은, '실재하지 않는 차별' 에 대한 혼동이다. 정말로 받고 있는 차별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지만, 차별이 아닌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엉뚱한 사람에 대한 폭력에 불과하니까. 어째서 많은 여성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차별에도 분노를 느낄까?


물론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매우 어렵고, 사람마다 수많은 견해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는 '능력의 차이에 대한 좌절감'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자기보다 무언가를 더 잘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무력감,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성취를 금방 뛰어넘어버리는 그 누군가에 대한 좌절과 분노라는 감정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예시는 체력과 근력이다. 누구나 알듯이 일반적인 남자와 여자는 체격부터가 크게 차이가 나고, 평균 근력을 따지면 60대가 넘은 할아버지도 20~30대 여자보다 월등히 강하며, 격투기의 영역에서는 아마추어 남자 선수가 프로 여자 선수를 이기는 경우도 흔할 정도다. 물론 여자도 노력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는 강해질 수 있다지만, 160cm 정도의 보통 여자가 웬만큼 노력해 봐야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평범한 성인 남자를 이기려면 대체 얼마나 걸릴지. 결국 평범한 여자들은 매일 길에서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자신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고 생각해 보면 무서워서 밖을 걸어다닐 수나 있을까 싶고, 상당한 피해의식을 느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런 피해와 불안이 단지 여성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 세상에는 보통 여자들과 체력이 비슷한 150cm의 왜소증 남자도 있고, 꽤 강한 남자들도 웬만해서는 이길 수 없는 190cm의 근육질 여성들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비율적으로 상당한 차이는 나겠지만, 중요한 것은 똑같은 약함을 가졌더라도 150cm짜리 남자는 자신의 왜소함을 탓하지만, 160cm짜리 여자는 자신이 여자인 것을 탓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두 경우 모두 근본적인 문제는 단지 '강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는 것 뿐인데도. 바로 이런 종류의 착각이야말로 여성들이 느끼는 왜곡된 피해의식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체력과 근력처럼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은 좀 낫지만, 차이가 조금이라도 애매하거나 모호해진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철저한 논리와 합리성이 요구되는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극도의 남초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프로그래머 자리가 나서 지원했다가 떨어진 남성은 자신의 실력밖에 탓할 게 없지만, 여자는 "내가 여자라서, 능력이 떨어질 것 같다는 편견으로 떨어뜨린 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 의구심이 합리적인 범위의 검증만으로 끝난다면 참 좋겠지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특성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길과 인정하지 않는 길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근거가 부족해도 후자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때로는 그 근거 없는 선택을 한 사람들이 뭉쳐, 아무 차별이 없었던 곳에 차별이 존재한다는 착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그런 왜곡된 의식을 가장 명확히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특정 분야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성 쿼터제다. 정치, 치안, 군사 등의 분야에 여성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에 상관없이 상대적으로 낮은 허들로 여성을 일정 수 이상 뽑아야 된다는 제도. 개인적으로는 이런 제도야말로 "능력에 관계없이 성별만으로 혜택을 받는" 남녀차별의 정의에 아주 정확히 부합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도대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게 다른 남자와 여자라는 두 생물이 어떤 영역에서도 같은 능력과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발상은 어디에서 나왔으며, 그런 제도를 통해 충분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데서 나오는 손해는 대체 누가 책임지는 것일까? 범죄자를 잡을 능력이 떨어지는 경찰이나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군인, 유권자를 대변하기는커녕 헛소리만 하는 여성 정치인들을 만드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차별을 없애기는커녕, 페미니즘과 여성 인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을 아주 확실하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거라는 데 돈을 걸 수도 있다.


결국 저번 글과 같은 논지로 돌아가는데, 여성 인권과 페미니즘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적은, 존재 여부조차 모호한 차별을 맹목적으로 비판하게 만드는 피해의식과 그로 인한 분노라는 것이다. 남녀평등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정말로 이루고 싶다면 우선 그것이 "능력에 따른 공정한 차별" 이라는 말과 동치라는 것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오직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확실한 차별과 부조리들을 찾아 환부를 절개하는 의사처럼 정확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분노와 피해의식을 떠넘길 간편한 대상(남자)에 집중하는 순간, 본연의 목적은 멀리 사라지고 단지 분노와 비합리성에 찌든 광신자들의 집단만이 남을 뿐이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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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티 워 후기

취미/영화 | 2018. 4. 30. 23:57
Posted by 메가퍼세크

최고였다.


여태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니고, 그 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마블 스튜디오의 이번 작품은 충분히 오래도록 기억할 가치가 있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무게를 가진 영화도 아니고, 개봉 전부터 수많은 팬들의 관심과 주목을 한몸에 받아온 작품이 이 정도의 완성도와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유명 히어로들을 마구 내보내고도 낮은 기대치와 그보다 더한 실망을 안겨줬던 저스티스 리그를 생각해 보면, 날로 커져만 가는 기대와 어려운 조건들 속에서도 이름값에 맞는 수준의 영화를 계속 뽑아내는 마블의 능력이 신기하기만 하다.


영화의 기획을 본 순간, 누구나 생각했을 만한 이 영화의 난점은 대략 세 가지.



1.수많은 히어로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2.그들이 맞서 싸울 빌런을 어떻게 매력적으로 연출할 것인가?


3.영화 두 개에 걸친 장대한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첫 번째 문제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축에 속한다. 10년의 세월 동안 쌓아온 20여 명의 다양한 히어로들을 배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두 번의 어벤저스와 시빌 워를 만들며 쌓인 노하우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어벤저스처럼 다양한 잡졸을 등장시켜 상대적으로 약한 영웅들이 활약할 기회를 주면서도, 충분히 강력한 빌런들과의 싸움을 통해 힘과 힘이 부딪히는 시빌 워의 쾌감 또한 놓치지 않았다. 더 발전한 것이 있다면 특히 강력한 히어로들인 헐크, 토르, 비전을 빠르게 무력화시켜 전체적인 파워 밸런스를 빠르게 맞춘 것과, 소수 빌런에 대한 다수 히어로들의 화려하고 개성적인 연계 공격 구도를 만들어낸 정도? 암살자들의 활약이 적은 것은 조금 아쉽지만, 전체적인 분량 배분은 사실상 완벽하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두 번째 문제는... 초기의 마블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아킬레스건 중 하나였다. 멋진 영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밋밋하고, 억지로 넣은 것 같은 평면적인 빌런들.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했던 울트론이나 킬리언은 그나마 양반이고, 그냥 능력이 없던 말레키스나 똥폼만 잡던 위플래시, 로난처럼 의미조차 알 수 없는 막장도 꽤 많았었다. 그러던 것이 윈터 솔저를 시작으로 제모 남작과 벌쳐를 거치며 점점 빌런의 매력이 살아나고, 이번 작품의 타노스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이게 바로 멋진 빌런이다' 라고 말할 만한 최고의 매력과 카리스마, 개성이 폭발했다는 느낌이 든다.


우선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아스가르드의 피난선을 박살내고, 강력한 힘을 가진 토르와 로키 형제는 물론 여태껏 힘의 상징이었던 헐크를 정면으로 박살내버리는 압도적인 육체적 강함을 보여주고, 그러면서도 몇 번인가 가볍게라도 한방씩 먹는 모습을 통해 아주 손이 닿지 않는 존재는 아니라는 인상을 주며, 그러면서도 강인한 의지와 점점 늘어나는 스톤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묵묵히 관철해 나가는 카리스마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희생을 불사하지만 목표를 이룬 후에는 미련없이 사라지는 깔끔함까지. 이 정도면 여태 나왔던 매력적인 빌런들의 모든 매력을 합쳐 놓았다고 해도 무리는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마블 영화 빌런 중 최초로 표면적으로라도 '신념'과 '공익'을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 여태껏 자신의 이익이나 복수, 기껏해야 야망 정도였던 빌런들의 소박한 스케일을 넘어 '전 우주적 균형' 이라는 목표를 위해 한시도 멈추지 않는 모습이, 타노스에게 숭고함과 인간미라는 입체적인 매력을 부여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쇼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주가 인구과잉이라고 모든 행성의 인구를 반으로 줄인다는 발상 자체가 좀 단순무식하기는 한데.. 행성별로 적정인구에 맞춰 인구를 줄인다던가, 있는 사람은 냅두고 인구의 반을 불임으로 만든다던가 하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대안보다, 자기 행성에서 실현하지 못한 폭력적인 정책을 우주 전체에 적용하는 데 목을 매는 태도 자체가 타노스의 내적 동기를 부각시키는 데는 더 효과적이기는 하다.)


수양딸인 가모라를 대하는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한데, 영화 초반부터 엄청난 수의 생명을 죽이면서 압도적인 포스를 내뿜던 최종보스가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초록색 딸의 땡깡을 받아주며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딸한테 꼼짝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고 할까? 어찌 보면 조금 작위적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 전까지 쉴틈 없이 몰아붙였던 타노스의 포스를 완화시켜 주는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마지막 요소인 스토리라인의 배분은, 모든 난점 중 마블이 여태껏 직면해보지 못한 가장 큰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여태까지의 마블 영화들이 세계관을 공유한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모든 영화가 기승전결의 완결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고, 이번처럼 반쪽짜리 스토리만을 담고 있는 작품을 개봉하는 모험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시작된 이후 완전히 처음이다. 게다가 평범한 영화도 아닌,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준비해 온 복선의 결정판. 만약 첫 영화가 예상외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다면 일 년 후에나 나올 어벤저스 4의 운명이야 뻔할 뻔자고,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두 번이나 날려버릴 수도 있는 판이었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리스크에 대해 고민한 결과인지, 어벤저스3의 스토리 배분은 충분히 뛰어나고 상당히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영웅들이 서로 만나 싸운다는 원초적인 재미를 상당 부분 충족시키면서도 모든 영웅을 만나게 하지는 않고, 캡틴과 아이언맨의 해묵은 갈등이나 아직 등장하지 않은 영웅들과 같은 여러 요소들을 다음 편을 위해 남겨둔다. 그에 더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려는 헐크나 닥터 스트레인지의 예언, 수많은 히어로들의 사망을 통해 다음 편의 스토리를 아주 대략적으로는 예측할 수 있지만 자세히는 알 수 없도록 절묘하게 조절했다.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은 알려주지만 흥미를 잃을 만큼은 알려주지 않는, 그 미묘한 선을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부분에서는 시빌 워에서 관객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루소 형제의 역량이 많이 작용하지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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