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티 워 후기

취미/영화 | 2018. 4. 30. 23:57
Posted by 메가퍼세크

최고였다.


여태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본 것도 아니고, 그 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마블 스튜디오의 이번 작품은 충분히 오래도록 기억할 가치가 있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무게를 가진 영화도 아니고, 개봉 전부터 수많은 팬들의 관심과 주목을 한몸에 받아온 작품이 이 정도의 완성도와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유명 히어로들을 마구 내보내고도 낮은 기대치와 그보다 더한 실망을 안겨줬던 저스티스 리그를 생각해 보면, 날로 커져만 가는 기대와 어려운 조건들 속에서도 이름값에 맞는 수준의 영화를 계속 뽑아내는 마블의 능력이 신기하기만 하다.


영화의 기획을 본 순간, 누구나 생각했을 만한 이 영화의 난점은 대략 세 가지.



1.수많은 히어로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2.그들이 맞서 싸울 빌런을 어떻게 매력적으로 연출할 것인가?


3.영화 두 개에 걸친 장대한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첫 번째 문제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축에 속한다. 10년의 세월 동안 쌓아온 20여 명의 다양한 히어로들을 배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두 번의 어벤저스와 시빌 워를 만들며 쌓인 노하우가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어벤저스처럼 다양한 잡졸을 등장시켜 상대적으로 약한 영웅들이 활약할 기회를 주면서도, 충분히 강력한 빌런들과의 싸움을 통해 힘과 힘이 부딪히는 시빌 워의 쾌감 또한 놓치지 않았다. 더 발전한 것이 있다면 특히 강력한 히어로들인 헐크, 토르, 비전을 빠르게 무력화시켜 전체적인 파워 밸런스를 빠르게 맞춘 것과, 소수 빌런에 대한 다수 히어로들의 화려하고 개성적인 연계 공격 구도를 만들어낸 정도? 암살자들의 활약이 적은 것은 조금 아쉽지만, 전체적인 분량 배분은 사실상 완벽하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두 번째 문제는... 초기의 마블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아킬레스건 중 하나였다. 멋진 영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밋밋하고, 억지로 넣은 것 같은 평면적인 빌런들.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했던 울트론이나 킬리언은 그나마 양반이고, 그냥 능력이 없던 말레키스나 똥폼만 잡던 위플래시, 로난처럼 의미조차 알 수 없는 막장도 꽤 많았었다. 그러던 것이 윈터 솔저를 시작으로 제모 남작과 벌쳐를 거치며 점점 빌런의 매력이 살아나고, 이번 작품의 타노스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이게 바로 멋진 빌런이다' 라고 말할 만한 최고의 매력과 카리스마, 개성이 폭발했다는 느낌이 든다.


우선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아스가르드의 피난선을 박살내고, 강력한 힘을 가진 토르와 로키 형제는 물론 여태껏 힘의 상징이었던 헐크를 정면으로 박살내버리는 압도적인 육체적 강함을 보여주고, 그러면서도 몇 번인가 가볍게라도 한방씩 먹는 모습을 통해 아주 손이 닿지 않는 존재는 아니라는 인상을 주며, 그러면서도 강인한 의지와 점점 늘어나는 스톤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묵묵히 관철해 나가는 카리스마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희생을 불사하지만 목표를 이룬 후에는 미련없이 사라지는 깔끔함까지. 이 정도면 여태 나왔던 매력적인 빌런들의 모든 매력을 합쳐 놓았다고 해도 무리는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마블 영화 빌런 중 최초로 표면적으로라도 '신념'과 '공익'을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 여태껏 자신의 이익이나 복수, 기껏해야 야망 정도였던 빌런들의 소박한 스케일을 넘어 '전 우주적 균형' 이라는 목표를 위해 한시도 멈추지 않는 모습이, 타노스에게 숭고함과 인간미라는 입체적인 매력을 부여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쇼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주가 인구과잉이라고 모든 행성의 인구를 반으로 줄인다는 발상 자체가 좀 단순무식하기는 한데.. 행성별로 적정인구에 맞춰 인구를 줄인다던가, 있는 사람은 냅두고 인구의 반을 불임으로 만든다던가 하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대안보다, 자기 행성에서 실현하지 못한 폭력적인 정책을 우주 전체에 적용하는 데 목을 매는 태도 자체가 타노스의 내적 동기를 부각시키는 데는 더 효과적이기는 하다.)


수양딸인 가모라를 대하는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한데, 영화 초반부터 엄청난 수의 생명을 죽이면서 압도적인 포스를 내뿜던 최종보스가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초록색 딸의 땡깡을 받아주며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딸한테 꼼짝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고 할까? 어찌 보면 조금 작위적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 전까지 쉴틈 없이 몰아붙였던 타노스의 포스를 완화시켜 주는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마지막 요소인 스토리라인의 배분은, 모든 난점 중 마블이 여태껏 직면해보지 못한 가장 큰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여태까지의 마블 영화들이 세계관을 공유한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모든 영화가 기승전결의 완결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고, 이번처럼 반쪽짜리 스토리만을 담고 있는 작품을 개봉하는 모험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시작된 이후 완전히 처음이다. 게다가 평범한 영화도 아닌,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준비해 온 복선의 결정판. 만약 첫 영화가 예상외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다면 일 년 후에나 나올 어벤저스 4의 운명이야 뻔할 뻔자고,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두 번이나 날려버릴 수도 있는 판이었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리스크에 대해 고민한 결과인지, 어벤저스3의 스토리 배분은 충분히 뛰어나고 상당히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영웅들이 서로 만나 싸운다는 원초적인 재미를 상당 부분 충족시키면서도 모든 영웅을 만나게 하지는 않고, 캡틴과 아이언맨의 해묵은 갈등이나 아직 등장하지 않은 영웅들과 같은 여러 요소들을 다음 편을 위해 남겨둔다. 그에 더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려는 헐크나 닥터 스트레인지의 예언, 수많은 히어로들의 사망을 통해 다음 편의 스토리를 아주 대략적으로는 예측할 수 있지만 자세히는 알 수 없도록 절묘하게 조절했다.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은 알려주지만 흥미를 잃을 만큼은 알려주지 않는, 그 미묘한 선을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부분에서는 시빌 워에서 관객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루소 형제의 역량이 많이 작용하지 않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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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사이드 스쿼드 후기

취미/영화 | 2016. 8. 7. 00:41
Posted by 메가퍼세크

최악을 예상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뇌를 비우고 액션만 보면 적당히 볼만하긴 한데, 부자연스러운 부분이나 바보같은 장면들이 자꾸 눈에 띄어서 한 번씩 헛웃음이 나오는 그런 정도?


신기한 건 예전에 명량을 봤을 때 느낀 실망감과 비슷한 느낌이었다는 거다. 영화의 주제에 맞는 씬(명량:전쟁 자살특공대:전투, 광기)에 집중하기보다 감성팔이에만 치중했다고 할까? 아무 필요없이 나오는 눈물짜기 연출에 억지로 집어넣은 백병전 연출(이순신 무쌍, 최종부 인챈트리스 쌈질)까지. 전체적으로 흥행하고 싶어서 억지로 집어넣은 장면들이 개연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런 게 싫어서 한국 영화를 안 보는데 DC까지 이러고 자빠지다니.


게다가 이런 류의 영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캐릭터 디자인과 개성도 생각보다 개판이었다. 존재감도 없는 부메랑 던지는 놈이나 나올 때마다 오글거리고 어색하기만 한 일본 여자 칼잡이를 시작으로, 광기의 끝을 보여주기는커녕 그냥 총 좀 잘 쏘고 쌈 좀 잘하는 주연 캐릭터로 바뀐 할리퀸과 조커에, 하수구에 사는 괴물 주제에 너무 인간답고 마음에 그늘도 없고 심지어 어디가 나쁜지조차 잘 모르겠는 킬러 크록. 그나마 데드샷이나 엘 디아블로는 좀 멋졌지만 이 둘도 전혀 악당같지는 않다. 유일한 악역인 인챈트리스가 그 절정인데, 넝마 쪼가리 걸치고 순간이동으로 기밀문서 셔틀이나 하다가 빡치니까 오빠 불러서 징징거리기나 하고. 나중에는 세상을 멸망시킬 무기를 만든답시고 엉덩이나 흔들다가 뜬금없이 또 내려와서 쌈질 좀 하다가 갑자기 또 염력을 쓰는가 하면 마지막엔 폭탄 한 방에 가고.. 캐릭터의 강렬한 매력이라는 건 분장 좀 세게 하고 cg 떡칠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애초에 영화 내에서 애네가 나쁜 짓을 하는 장면이라는 거 자체가 번갯불에 콩 볶듯 몇 초로 끝나는데 나쁜 놈이라고 인식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그냥 인상 좀 더럽고 말 좀 미친놈처럼 하면 다 나쁜놈인가? 이건 '나쁜놈들' 을 모은 게 아니라, '쌈 좀 잘하는 놈들' 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쌈 잘하고 총 잘쏴서 대단하다는 평을 들었나? 


하긴 애초에 미친놈들을 모아서 부대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광기와 난폭함, 빌런의 미덕과 같은 여러 특성들은 결국 예측 불가능성과 자유로움에 기반을 두고 있을진대, 목에는 폭탄이 심어지고 자기 목숨을 내놓고 강한 적과 싸우는 판에 광기 표현한답시고 이상한 짓 하다간 죽기밖에 더 할까?(실제로 한 놈 죽었고) 개인 영화들이 한 개씩 있는 상황이었다면 몰라도, 다 처음 나오는 듣보잡들인데 개성을 보여줄 시간도 없이 쌈박질만 하니 이게 히어로 영환지 악당 영환지.


시작부터 캐릭터성을 존나 강하게 표현하겠다는 의도를 너무 대놓고 풍기는 감옥 씬들로 시작해서 뭔 카탈로그마냥 빌런들 하나씩 능력과 사연을 소개하고, 모아서 쌈박질 하러 가는 극도로 뻔하고 예측 가능하고 평면적인 전개나, 아주 개판은 아니지만 묘하게 조금씩 모자라고 공감 잘 안 가는 연출이나 모자란 개그 센스까지. 세세한 부분들까지 참 꼼꼼하게 개판인 영화다.


그래도 뭐, 데드샷이나 할리퀸의 액션은 나름 괜찮았으니 그냥 그거 본 걸로 만족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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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pped 감상.

취미/영화 | 2015. 9. 6. 01:05
Posted by 메가퍼세크

사람들과 서로의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가끔 내가 감상하지 않은 무언가를 추천받을 때가 있다.

물론 항상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추천이라는 행동에는 내가 추천의 대상을 좋아할 것이라는 누군가의 판단이 담겨 있기에 적중률은 꽤 높고, 가끔은 그런 추천을 통해 혼자서는 영원히 알지 못했을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낯선 곳을 여행하다 다른 여행자를 만나, 아직 가보지 않은 어딘가에 대한 견문을 쌓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번에 추천받은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을 그린 영화다. 정말 말 그대로 두 사람의 사랑과 상황, 심리 묘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담백한 영화. 유명한 영화 중에서는, 건축학개론이나 once 정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담백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특별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가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사랑은 결국 두 사람의 만남이고, 두 사람이 지금까지 살면서 쌓아온 인생의 경험과 가치관, 그리고 그 외의 여러 가지를 공유하고 공감하는 과정이라는 것.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청소년기까지, 인격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런 본질적인 측면을 아주 효과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극중 나타나는 브라이스와 줄리의 생각은 단지 서로에게만 영향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상황과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며, 그런 인간적인 성장을 통해 둘은 서로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먼저 성장하는 줄리와, 그녀에게 조금씩 공감하면서도 계속 엇갈리면서 다른 길로 나아가는 브라이스. 두 인물의 성장이 같이 이루어졌다면 너무 뻔했겠지만, 이런 엇갈림이 있었기에 영화가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는 독특하면서도 매끄러운 연출도 한 몫 했다. 일반적인 시점과 두 인물의 주관적 시점을 자유롭게 오가며,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생각을 드러내는 연출은 인물의 내면과 성격을 표현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에서도 브라이스와 줄리는 항상 다른 사건을 보고, 같은 사건을 볼 때도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리며, 다른 것을 기억한다는 것. 이것만큼 영화의 주제를 잘 표현하는 방법이 있을까? 


특히 가장 인상깊었던 건 배스킷 보이 선발 이후의 장면들이다. 브라이스와 줄리와 모두 자기 앞의 파트너에 집중하지 못하고 서로를 보고 있었음에도, 브라이스는 줄리의 시선을 포착하지 못하고 단지 줄리의 웃음에만 집중하다가 결국 돌발적인 행동을 취한다. 계속 일치하고 있었던 둘의 마음과 어긋날 대로 어긋난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그 순간 한 번에 폭발했고, 파국으로 끝났다. 그러나 결국 그 파국을 회복시킨 건 무화과 나무라는 공감의 증표. 결국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공감을 통해 극복된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높았지만,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에 이렇게 많은 것을 담았다는 사실이 보는 내내 놀라웠던 영화였다고 할까. 검색해보니 우리나라에서는 개봉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대체 어째서인지 도저히 이해되지가 않는다. 앞으로는 누군가 내가 본 사랑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이 영화의 이름을 말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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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시 리뷰

취미/영화 | 2015. 4. 24. 23:07
Posted by 메가퍼세크

모진 훈련으로 거장을 키워낼 것인가, 너그러운 교육으로 평범한 제자를 키워낼 것인가.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스승들의 골치를 썩이고, 지금도 썩이고 있는 질문일 것이다.


이 영화, '위플래쉬' 는 그 중 첫번째 극단을 선택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연주자를 담금질하기 위하여 비인간적 경쟁과 체벌, 인격 모독까지 서슴치 않는 플래처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피가 날 때까지 드럼을 치는 네이먼은 무서울 만큼 닮았고, 반목과 갈등을 거듭하면서도 결국은 서로의 철학과 열정에 공감하여 펼치는 마지막 신의 열정적인 연주는 첫번째 극단이 꿈꾸는 이상적인 결과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 이상적인 무대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네이먼과 다른 학생들이 겪었던 잔인할 정도의 고통은, 관객이 플래처의 교육방침과 네이먼의 열정에 단순히 감동할 수 없게 만든다.


과연 채찍질을 통해 만들어진 한 명의 위대한 연주자는, 그 채찍에 맞아 다친 수많은 사람들의 상처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는 매우 복잡하고, 또한 중요하며, 어려운 질문이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플래처의 교육 방식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제자의 자존심이나 인권, 명예와 같은 가치는 타인이 함부로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런 핵심적인 가치들을 무참히 짓밟는 플래처의 교육은 결과에 상관없이 잘못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얼핏 보면 이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 그런 가혹한 교육을 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극중의 네이먼도 부분적으로는 그렇고, 여러 운동선수들이 스스로 혹은 코치, 트레이너들을 통해 자신을 극한까지 몰아넣는 훈련을 추구한다는 것이 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더 가까운 예로는, 야간자율학습에 자율적으로 참가하여 스스로를 공부하도록 하는 고등학생들도 있고.


물론 위의 사례들은 플래처 교수의 가혹한 수업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면서 높은 성과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고, 때로는 자유를 빼앗긴 채로 얻은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플래처 교수의 방식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이 문제의 답은 간단하다. 플래처 교수의 교육 방침은 분명 잘못되었으나, 그 잘못은 가혹한 교육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플래처 교수가 자신의 팀에 들어오기로 한 한 모든 모든 학생에게 자신의 교육 방침과 스타일을 사전에 공지하고, 충분히 그에 공감한 학생들만으로 팀을 꾸렸다면 어땠을까? 극중 나타난 대부분의 문제들은 발생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그쳤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신과 공감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한, 소통의 문제였던 것이다.


 

킹스맨 리뷰(스포)

취미/영화 | 2015. 3. 10. 12:58
Posted by 메가퍼세크


킹스맨은 최고였다.


정장간지와 액션, 정신나간 스토리 전개가 합쳐져 형용할 수 없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양복입고 총쏘는 액션과  B급스러운 절단 연출 등은 이퀄리브리엄이 생각나는데, 거기에서 정장간지와 약간의 첨단장비를 더한 느낌?


스토리 자체도 뻔하디 뻔한 액션물의 과대망상증 최종보스, 무력파 중간보스, 찐따였다가 어떤 계기로 강해져서 악당을 물리치는 주인공, 강력하고 현명한 멘토라는 아주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프레임을 따왔다.


하지만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 같은 요리도 다른 사람이 만들면 맛이 달라지듯이, 그 프레임에 씌워진 살들은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영국식 정통 정장을 입고 첨단 장비를 곳곳에 숨긴 채 절제된 액션으로 적을 해치우는 등장인물들.

심지어 그들이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을 따온, 오래전부터 내려온 소수정예 첩보원이라니.


'신사', '기사', '스파이', '정장', '권총', '격투'


대부분의 사람들이 멋지다고 느끼는 '멋의 물감' 들을 잘 선별하고, 그들을 전형적인 스토리의 프레임 안에서 완벽하게 조화시켜 하나의 완성된 멋의 그림을 그렸다는 느낌이다.


물론 완성도나 영화의 전체적인 짜임새에서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왜 의족을 달고 있는지, 어떻게 격투를 그리도 잘 하는지 끝까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중간보스라던가. 주인공과의 경합 끝에 랜슬롯 자리를 차지하고도 인공위성 격추하고 전화 한 통 거는 단조로운 역할만 맡은 안습한 여자 기사. 그 어떤 의심도 없이 공짜 유심을 받아 자기 스마트폰에 꽂는 전 세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런 자잘한 단점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이 영화가 뿜어낸 멋과 임팩트가 충분했기 때문에. 결국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액션과 멋이었고, 스토리와 설정, 완성도와 같은 요소들은 모두 그것을 위한 부가적인 도구로만 작용했다.(그리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후반부에 나오는 폭죽 장면과 난데없는 스칸디나비아 공주의 섹드립. 액션과 멋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했던 약간의 시리어스함을 중화시키고, 아직도 이 영화의 성격에 대해 긴가민가했던 관객들에게 확실한 쐐기를 박는 좋은 도구였다. 맛을 살리려다 보니 너무 느끼해진 고기 요리에 뿌리는 몇 방울의 식초라고 할까?


이런 류의 영화를 원체 좋아하기도 했지만, 멋을 내는 데 쓴 재료들 자체도 개인적인 취향에 딱 들어맞아서 전체적인 감상은 퍼펙트. 속편이 나온다고 해도 같은 감독의 작품이라면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물론 나만 느끼는 감상은 아니겠지만, 머릿속에 콜린 퍼스의 간지나는 정장 차림은 당분간 클래식 정장에 대한 지름신을 일으키게 될 것 같다.


 

이번에 개봉한 '인터스텔라' 에는, 놀란 감독이 직접 설명하지 않거나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많은 물리학적 바탕 이론들이 숨겨져 있다.


물론 이런 과학적 바탕을 전혀 모른다고 해서 영화를 즐기는 데 큰 지장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배경적인 부분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보면 조금 더 깊이 있는 영화감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간단하게나마 영화에 관련된 물리학 지식들을 모아보았다.


이해가 쉽도록 모든 복잡한 내용과 수식들을 제거하고 직관적으로만 설명하다 보니 아무래도 내용의 일관성이나 깊이에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틀린 부분도 있을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조금 더 심도있는 상대성 이론 책들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하겠다.




1.차원


차원이란, 간단히 말해서 물체의 상태를 나타내는 데 필요한 지표(기준점을 제외하고)이다.


예컨대, 30cm 자 위에 아주 작은 벌레가 한 마리 올라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자 위에서 벌레가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어떤 숫자가 필요할까? 물론 자의 눈금 하나만 알면 된다.


반면, 네모난 색종이 위에 올라가 있는 벌레의 위치를 나타내는 데는 몇 개의 숫자가 필요할까? 여기에 사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ⅰ 색종이의 모서리 한 점(왼쪽 아래)부터 시작해서 가로와 세로로 눈금을 새기고, 벌레가 가로 방향으로 몇 센티미터, 세로 방향으로 몇 센티미터에 위치하는 지 나타낸다.(직교 좌표계) 


ⅱ 색종이의 왼쪽 아래 모서리 끝점에서 벌레까지 직선을 하나 긋고 그 직선과 색종이의 아랫변과의 각도, 직선의 길이(벌레와 모서리 끝점의 거리)를 나타낸다.(극좌표계)


두 가지 방법 모두, 두 개의 숫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예시에서 직선이나 색종이는 벌레가 있을 수 있는 '공간' 이라고 하고, 그 공간에서 벌레의 위치를 나타내는 데 필요한 숫자의 수를 '차원수' 라고 한다. 즉 직선은 1차원, 색종이는 2차원이다. 위의 설명을 확장하면 3차원 공간의 이미지도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3차원인가? 라고 묻는다면,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시간' 이라는 마지막 차원이 남았기 때문이다.


시간도 하나의 차원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위에 제시한 차원의 개념을 조금만 확장하면 된다.

색종이 위에 벌레 두 마리가 기어다닌다고 치자. 이 두 벌레가 자유롭게 기어다니다가 우연히 만났다면, 벌레의 위치를 나타내는 두 개의 숫자는 분명 일치할 것이다. 그런데 '만났다' 라는 건 뭘까? 결국 같은 '시간' 에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결국 현실 세계에서 물체에 대한 모든 정보를 나타내려면 위치에 대한 숫자들에 더해 시간이라는 숫자 하나가 더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을 위의 공간의 개념을 확장시켜 '시공간' 이라고 부른다.



2.시간 지연


시간이 공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차원이라는 것을 이해했다면, 그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재미있는 성질이 하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색종이 위를 기어다니는 벌레의 예시를 생각해 보자. 색종이의 왼쪽 아래 모서리에서 출발한 벌레가, 갑자기 어떤 방향을 정해 직선으로 계속 기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직선으로 기어간다' 는 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운동이고, 방향과 속도만 알면 손쉽게 나타낼 수 있다. 더 단순하게 하기 위해, 벌레가 기어가는 속도는 초당 10cm라고 먼저 가정하자.


이제 방향을 나타내야 하는데, 먼저 벌레가 색종이의 아랫변 방향으로 기어간다고 생각해 보자.

벌레가 기어갈 때 벌레의 위치를 나타내는 숫자 두 개는 어떻게 변할까?(2차원이므로) 당연하게도, 아랫변 방향으로는 초당 10cm로 이동하고, 세로 방향으로는 이동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벌레가 아랫변에서 약간 벗어난 방향으로 기어가기 시작한다면?

아랫변 방향으로의 속도는 초당 10cm에서 약간 적어지고, 세로 방향으로의 속도가 조금 생길 것이다.


'속도'가, 두 방향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도 비슷한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어떤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이 자동차는 시간 방향으로만 일정한 빠르기로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자동차가 갑자기 시속 100km로 달리기 시작한다면?

시간 방향으로만 움직이던 이 자동차는, 공간 방향으로의 속도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시간 방향으로의 빠르기와 공간 방향으로의 빠르기를 합한 것은 항상 일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자동차는 어쩔 수 없이 시간 방향으로는 조금 느리게 가야 하고, 결국 자동차에 실려 있던 시계는 더 느려지게 된다. 아~~~~~~주 약간.


그리고 그 자동차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당연하게도 조금이나마 나이를 느리게 먹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동차가 빠르게 움직일수록 더욱 많이.


(물론 현실에서 자동차 좀 타고 다닌다고 나이를 늦게 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데, 이런 현상이 충분히 느낄 만큼 일어나려면 빛의 속도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빛의 속도인가 하면, 상대성 이론에서 물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 속도가 빛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 지연' 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 중에는 '쌍둥이 역설' 이라는 게 있다.


완전히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가 있을 때, 둘 중 한 명이 우주선을 타고 매우 빠른 속도로 충분히 여행을 하고 오면 여행하고 돌아온 쪽의 시간이 더 늦게 흘러 쌍둥이의 나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시간이라는 게 사실 각자에게 다른 속도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한 가지 오해하기 쉬운 점은, 어떤 공간의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이 그 효과를 느낄 수는 없다.


시간을 느끼는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도 결국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느려진 만큼 인식하는 속도도 느려져서 결국 스스로의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른다고 느끼게 된다. 갑자기 어떤 사람의 키가 2배로 커져도, 주변의 모든 것이 2배로 커지면 자신이 커진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3.질량과 중력


2번까지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 속하는 내용들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 항목에서는  약간 더 발전된 '일반 상대성 이론' 에 속하는 부분들을 조금만 살펴보겠다.


1번 항목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실 4차원이고, 시간과 공간이 합쳐서 '시공간'이라는 것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2번 항목에서 언급한 시간 지연 효과는, 이 시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지된 사람과 움직이는 사람이 똑같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아도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은, 결국 시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관점이 변하지 않아도 시간 지연 효과가 일어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시공간을 억지로 잡아늘리는 것이다.


시공간을 늘린다니 무슨 소린지 감도 잘 안 잡히겠지만, 개념 자체는 간단하다. 평평한 고무판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 무거운 쇠공을 올려놓으면, 판은 움푹 패인다. '왜곡' 이 일어난 것이다. 시공간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왜곡된다. 그럼 시공간을 휘게 하는 쇠공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질량' 이다.


※어째서 하필 질량이 공간을 휘게 하는지에 대한 서술은 이 글의 수준을 벗어나므로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일단 이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중력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앞의 쇠공의 비유에서, 쇠공으로 인해 휘어진 고무판 위에 구슬을 굴렸다고 생각해보자. 구슬은 고무판의 평평한 곳을 지날 때는 직선으로 굴러가겠지만, 쇠공 주변에 다다르면 쇠공(정확히는 쇠공이 만든 구덩이) 쪽으로 휘어져서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중력의 정체다.


그렇기에 무거운 질량이 있는 or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공간이 심하게 휘어져 있을 것이고, 그 주변을 지나는 물체는 위에 언급한 시간 지연 현상과, 휘어진 공간에서 일어나는 여러 신기한 현상들을 체감할 수 있다.



4.블랙홀과 웜홀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블랙홀과 웜홀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블랙홀에 대한 설명은 3번에서 바로 이어진다. 쇠공 주변을 지나가는 구슬의 경로가 휘어진다면, 가끔 너무 휘어져서 쇠공에 부딫히는 구슬도 있지 않을까?


간단히 예상할 수 있듯이, 구슬이 휘어지는 정도는 쇠공이 얼마나 무거운지, 구슬이 얼마나 무겁고 느리게 움직이는지, 구슬의 경로가 얼마나 쇠공과 먼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그 얼마나 가볍고 빠른 구슬을 옆으로 굴려도 전부 삼켜버리는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쇠공도 있지 않을까?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빠른 구슬은 빛이다. 결국 빛이라는 구슬을 옆으로 굴려도 무조건 집어삼킬 만큼 무거운 쇠공(질량)이 있다면, 그 쇠공의 주변은 그 어떤 구슬(물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마의 구덩이, 모든 물체의 개미지옥이 될 것이다. 빛도 빠져나올 수 없는 이 구덩이의 이름은 바로 '블랙홀' 이다.


블랙홀의 가공할 만한 질량은 주변의 시공간을 거의 찢어질 만큼 극도로 왜곡시키고, 한 번 들어간 물체는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 이라는 경계를 만든다. 이 경계 안으로 들어간 물체는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기에, 블랙홀의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고도로 발전된 현대 물리학으로도 규명할 수 없는 이른바 '특이점' 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블랙홀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기에, 물리학자들은 블랙홀의 알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라도 많은 연구를 수행했다. 블랙홀은 사실 '검지 않다' 는 것도, 그런 물리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진 사실이다.


빛도 빠져나올 수 없는데 어떻게 검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당연한 물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진공 청소기'를 생각해 보면 된다. 진공 청소기의 흡입구에 가까운 물건들은 모두 빨려 들어가지만, 흡입구에서 10cm만 떨어져도 흡입하는 힘은 훨씬 떨어지고, 30cm 정도 떨어지면 청소기의 영향력은 산들바람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는 블랙홀도 사실은, 모든 물체를 빨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중력이라는 힘의 특성 때문에, 만약 태양이 지금 이 순간 질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블랙홀로 쪼그라든다고 해도 지구에 미치는 중력은 변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근처에서는, 주로 가스로 이루어진 가벼운 물질들이 블랙홀의 주변을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다. 이런 물질들은 너무 엄청난 속도로 돌기에 서로 마찰해서 열을 내고, 그 열이 워낙 막대하기 때문에 백열 전구처럼 강한 빛을 낸다. 멀리서 보면 이런 빛은 블랙홀에서 직접 나오는 것처럼 보이고, 블랙홀의 중력에 의해 빛이 여러 방향으로 휘어지고 왜곡되어 특이한 형태를 띤다. 그 결과 일반적인 블랙홀은 그 이름과는 다르게 실제로 '검지 않다'


웜 홀은 '벌레구멍' 이라는 이름대로, 시공간에 뚫린 구멍을 말한다. 지금까지 지겹게도 우려먹은 고무판의 비유를 마지막으로 써먹도록 하자. 고무판이 너무 구부러지다 못해 아예 C자 모양으로 굽어버렸다고 생각하자, C자의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이동하려면 왼쪽 벽을 따라 긴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C자의 위쪽과 아래쪽 벽을 뚫어 통로로 이어버리면?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라는 오래된 공리에 의해, 훨씬 빠른 이동이 가능해진다. C자의 왼쪽 벽을 따라 이동하는 데 빛의 속도로 1년이 걸렸는데, 웜 홀을 뚫으면 단 5초 만에 이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웜 홀의 활용도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위에서 구멍을 뚫은 고무판은 공간이 아니라 '시공간' 이었기에, 구멍(웜 홀)을 통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넘나들 수 있다. 구멍의 한쪽 편은 2014년의 지구인데, 건너편은 4012년의 프록시마 센타우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연구가 이루어진 블랙홀에 비해 웜 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지지부진하기만 하지만, 그 놀라운 특성으로 인해 많은 SF장르나, 인류의 미래에 대한 구상에서는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장 아무리 가까운 별도 광년 단위로 세어야 하는 우주에서, 거의 속도제한 없이 바로바로 이동할 수 있는 웜 홀의 존재는 치트키와 다를 바 없으니까. 인류가 언젠가 드넓은 우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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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을 보고 실망하다(스포일러)

취미/영화 | 2014. 8. 6. 02:26
Posted by 메가퍼세크

※이 글은 모두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한 마디로, '최악' 이었다.


영화를 볼 때 내가 싫어하는 모든 요소들을 한 데 버무려 섞어놓은 종합 선물 세트에 가까웠다.


얼마나 개판이냐 하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원래 없던 '영화' 카테고리를 만들어서까지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정도로 개판이다.


나 자신도 지금의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역설적으로 명량이라는 영화에서 '꽤 괜찮다고 느꼈던' 몇 가지 점부터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장점-


1.최민식의 연기


극중 이순신의 복잡한 심경을 정말 잘 묘사해냈다고 생각한다. 대척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구루시마' 류승룡은 억지 설정과 표정의 제약 때문인지 오글거리기만 했기에 더욱 돋보였다.


2.'나름'의 고증 노력(아주 조금)


...적어도 명량 해협에 철쇄를 깔았다던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없었고, 전투 초기에 이순신의 대장선만이 혼자서 싸웠다던가, 포격전으로 왜군의 배를 요격했다거나 하는 부분들은 감독 나름대로 눈꼽만큼이라도 고증을 고려한 연출로 보였다. 대신 어쩌면 그보다도 심할 수 있는 엄청난 오류들을 추가로 저질렀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무시한다.


3.'나름' 멋진 해전 묘사


바다와 물살의 CG라던가, 포격전에 관련된 묘사가 매우 멋있었다.(고증은 모르겠지만) 왜구와 백병전하는 장면도 전체적으론 식상했지만 딱 두 장면, 창을 일제히 위로 세우고 왜구들의 접근을 막는다거나 근접거리 포격으로 적을 날려버리는 부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단점-


1.그냥 아예 말조차 안 되는(개연성이 부재중인) 전개들.


고증이고 뭐고 운운하기 전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분들이 산재해 있다.

슥 자르면 피도 별로 없이 뚝 떨어지는 목이라거나, 멀리서 곡사로 쐈는데 팔이나 머리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화승총 정도는 애교로 봐준다고 해도 말이다.


-보급도 개 딸릴 상황에 최소한 부하들의 개인 물자, 소중한 물건, 미처 나오지 못한 사람까지도 있을 수 있는 마을에 큰 불을 내버리고 자랑스럽게 연설하는 이순신 장군이라던가(불이 번지면 어쩌려고?)


-'작용 반작용의 법칙' 도 모른 채, 졸라 큰 배에 작은 배 십수 척을 밧줄로 연결해 '인력' 으로 끌어당기려는 똥멍청한 민중들과, 심지어 작은 배는 미동도 없이 큰 배가 끌려오는 뉴턴 할아버지가 지옥에서 통탄할 만한 병신같은 현상이라던가(회오리까지 있었는데!)


-후반에 배 몇 척한테 포위돼서, 이미 상륙한 인원이 갑판의 반절이 넘는 절체절명의 백병전 상황에서 포로 근접 샷 한 방으로 왜군 배들을 날려버리니 갑자기 수적 열세였던 조선 병사들이 스팀팩이라도 빨았는지 왜군 병사들을 순식간에 도륙내버리는 병신같음과(심지어 어깨에 용가리 두 마리 붙여서 눈에도 겁나게 잘 띄는 이순신 장군님은 난전 와중에도 절대 노리는 일이 없는 눈병신 왜군들도 포함)


-신기전인지 뭔지 화살에 무슨 통 달아놓고 분명 도화선인지 뭔지에 불을 붙였는데, 그걸 또 수십 초 이상 기다리다가 별다른 기폭 장치 조작도 없이 쏘는 장면에서는 그냥 실소만이 나올 뿐이었다.


-전시상황인데 쓰잘데기없이 더럽게 세밀하고 거대한 용대가리를 붙여 넣은 쌔삥 거북선도 혹자의 눈에는 긴장감을 박살내주는 피식의 대상이 될 수 있었겠고.


극의 기본 중의 기본인 개연성 자체가 박살나 있기에, 몰입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계속 진지하다가 어이 털리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상황상 개그는 또 아닌 것 같고. 뭐 어쩌라고?


2.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닌데 졸라 식상하거나 재미없거나 쓰잘데없는 장면들.


이 쪽은 훨씬 심각했다.


1번의 이유로 극의 메인 전개 자체도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는데, 거기에 가장 전형적이고 뻔하고 재미도 의미도 감동도 없는 병신같은 잔가지들을 수없이 쳐 놨다.


-시작부터 끝까지 저걸 왜 넣었는지 이해도 안 가는 눈 먼 부인과 백성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백성들이 배 끌어주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오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간간히 복선 깔아주면서 비장의 카드로 쓰일 거 같더니, 그냥 부하 한 명의 자폭과 백성들의 억지 신파극으로 존재를 알게 되어 터져버린 자폭선.


-판옥선의 높이가 세키부네보다 2미터 가까이나 높았다는 고증을 무시하면서까지 집어넣은, 우리나라 사극에 안 나오는 걸 도통 볼 수가 없는 쓰레기같은 백병전.


-현대로 치면 모자에 별이 서너 개는 달려 있을 이순신 장군님께서 친히 내려와 훨윈드를 돌아주시거나, 배에 올라와 난봉을 피우는 라이벌(?) 구루시마를 여럿이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리는 판에 박힌 연출은 너무나도 지겨웠다. 물론 화살 몇 방 쳐맞고도 좀비새끼같이 걸어가는 신도 대체 왜 넣은 건지 참.


-애초에, 해전 영화에 라이벌 따위를 만들어야 하는지부터가 의문이기도 하다. 대체 어째서, 구루시마 따위를 이순신의 라이벌로 끼워 맞춰야 했는가? 이순신한테 허구한 날 털려서 뭐 포장할 것도 없는 마당에, 중간에 합류한 해적 출신 장군과 기존 수군 장군들 사이의 갈등이라는 별 쓰레기같은 이벤트를 억지로 넣어주면서까지 말이다.


-그것도 없던 설정을 끼워넣을 거였으면 연출이라도 잘 해 줄 것이지, 장면도 개판에다 괜히 근거 없는 카리스마나 만들어보려고 일본 장수 목에 칼을 들이대기나 하질 않나, 눈은 항상 부릅뜨고 다니니 더 오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이건 연기력 문제일지도)


-아 물론, 무슨 게이새끼같이 얼굴에 허옇게 화장하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강선도 없는 조총으로 저격질하다 화살로 역저격맞고 뒤진 멍청한 저격수도 빼놓을 수 없고.


-마지막으로 후일담에 나오는 대화도 너무 영양가가 없었다. 이긴 다음에 별안간 뜬구름이나 잡고 앉아있으니.


원래 기본 바탕이 좋았으면 모르겠는데, 기본 줄기부터가 막장인데 뻔한 클리셰들을 마구마구 쳐넣은데다, 몇 안 되는 떡밥들조차 애매하거나 찌질하게 마무리지어 버리니 그냥 말이 안 나오더라.


쓰잘데기 없는 등장인물들만 컷트해도 얼추 전체의 1/3은 빠졌을 거 같은데, 그 돈으로 메인 스토리를 더욱 완성도있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총평-


그 누구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영화다.


무엇보다 가장 맘에 들지 않는 점은 명량 대첩이라는, 삼국지로 치자면 적벽 대전쯤 될 신화적인 전투를 이런 식으로밖에 풀어내지 못했다는 것 . 최고급 횟감으로 매운탕을 끓인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적 연출과 극적 장치, 클리셰라는 갖은 양념으로 소재를 빛나게 하는 것도 좋지만, 이미 찬란하게 빛나는 최고급의 소재를 다룰 때만은 양념을 자제하고 그 본연의 맛을 극도로 살리는 데 집중하는 절제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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