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와 존중에 대한 생각
사람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사람의 바다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없이 생각해 보았을,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을 만한 그런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살아가며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때로는 그 사람들과 더없이 친해지거나 극도로 미워하는 사이가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한 사람의 인간관계 전체를 아우른다고 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의 답과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문제에 답하는 과정이 으레 그렇듯, 이 문제에 답하는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가 다루는 대상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와 인식이다. 가장 윗 문장에 들어 있는 두 명의 '사람', 즉 '나'와 '타인'에 대한 해석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기본적인 공리와 같다. 나는 이 중요한 위치에, '나와 타인은 동등한 위치에 있고,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권리가 없다' 라는 문장을 넣어서 생각을 시작했다. 평등과 각자의 주권 존중이야말로 인권이라는 개념의 가장 근본적인 시작이고, 동시에 인간관계의 대전제로서 가장 적합한 위치를 가질 테니까.
일단 이 단순한 문장을 전제로 삼으면, 인간관계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마주치는 많은 상황들에 대한 대답과 새로운 질문들이 솟아난다. 예컨대 서로에 대한 권리가 없는 동등한 개인이 같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에게서 그럴 수 있는 권리를 얻어야 하고, 그렇기에 '부탁'과 승낙 혹은 거절이라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부탁의 범위 안에는 서로간의 의무를 규정하는 '계약'이나 '약속'이 포함되어 있고,의무를 포함하는 관계에 동의한다면 그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에 따라 서로간의 '신용' 또는 '신뢰' 가 생겨난다.
이렇게 생겨난 신용과 신뢰라는 개념은 결국 타인에 대한 믿음의 지표이고, 다르게 말하면 그 사람이 나의 시간이나 돈, 또는 나라는 사람 자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떤 약속에 10분 늦는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10분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약속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할 테니까.
나에 대한 타인의 존중도를 손쉽게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표는 '예의'라는 개념이다. 이 또한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정의가 있을 법한 까다로운 개념이지만, 나에게 있어 예의란 '상대의 거리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싫어하는 행동을 고의로 하지 않고, 꺼리는 화제를 억지로 꺼내지 않는 것.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사람마다 거리와 피해의 기준이 천차만별이기에 제대로 지키는 건 어렵다. 백 가지 행동을 조심하더라도 한 가지 행동을 실수하면 예의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생각도 하지 못한 행동에서 피해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 만큼.
그렇게 까다로운 예의들 중에서도 가장 의견이 갈리고 지키기 어려운 것은, 각자의 감정을 어떻게 표출하는지에 대한 기준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화를 낼 만한'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화를 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문제 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단지 상대를 무시하며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는 무례한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관점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특히 분노의 원인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에게 짜증을 표출하는 행위야말로 무례함과 천박함의 극치라고 생각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라는 개념의 본질은 그런 까다로운 기준이나 미묘한 감정들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타인과의 거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의 기준으로 타인의 호불호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되겠지' 라는 지레짐작을 버리고, 언제든지 상대가 자신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자신의 거리를 침범당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역설적이지만, 어떤 사람을 정말로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최소한의 거리를 철저하게 지킬 때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상호 존중과 진심을 다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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