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와 핏줄에 대한 생각

카테고리 없음 | 2021. 11. 7. 22:08
Posted by 메가퍼세크

 나는 예전부터 가족이나 가문, 핏줄 같은 것들의 가치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나 그런 인연을 통해 이어진 친척들에 대한 친근감 같은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애매한 범위의 집단에 대한 생각보다는 나 자신이라는 작은 범위와 세상의 보편적 법칙이라는 넓은 범위에 대해서 좀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왔다. 하지만 살면서 자신의 가족이나 혈연에 대해 강한 소속감을 가지거나 거기에서 행복을 얻는 사람들을 보고, 내 가족들과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이런 주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과 친척, 그리고 그들을 포함하는 가문과 혈연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먼저, 생물학적으로 생각하면 혈연은 단지 자손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유전자 염기서열의 자가복제 과정일 뿐이다. 수많은 종류의 형질 중에서 현재 주어진 환경에 적합한 것을 발현하는 특정한 개체들이 성공을 이루고, 더 많은 자손을 통해 자기 유전자의 복제품을 남기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 태초부터 모든 개체들이 자신의 복제품을 남기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단지 더 많은 복제를 남기려는 이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기에 모두가 자손 번식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과학은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나에게서 위로 쭉 이어지는 가계도의 줄기와 어쩌면 아래로 이어질 가지들은 모두 아무런 목적 없는 자연적인 연쇄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런 본능에 순응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누군가는 자신이 유전자의 본능에 따라 짝을 찾아 헤매는 동물이라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본능을 초월한 이성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런 나름대로의 철학은 그 사람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는 것을 방해하겠지만, 사실 굳이 유전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후세에 흔적을 남기는 방법은 적지 않다. 수백 년에서 수천 년까지 자신의 생각을 세계에 남긴 수많은 철학자와 성인, 예술가, 과학자, 기술자를 생각해 보면, 굳이 유전자를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무언가를 지속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결국, 유전자의 역할을 후세에 자신의 구성 성분을 전달하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미 그것을 일정 부분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을 손에 넣은 것이다. 도킨스가 말한 밈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유전자와 밈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유전자라는 정교한 정치는 번식이라는 귀찮고 번거로운 과정을 부추기는 매커니즘을 다양하게 갖추고 있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짝을 찾고 자신과 닮은 자손을 남기는 행위에 대해 생물학적 본성에 뿌리를 둔 다양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과 살을 맞대고, 자신과 배우자의 얼굴을 닮은 귀여운 아이를 안아보는 것과 같은 경험에서 느끼는 강렬한 행복감은 가계도를 아래로 끝없이 이어나가는 원동력이고, 몇몇 가계도가 끊기더라도 다른 가계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인간이라는 종을 오랫동안 유지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반면 밈이라는 정신적인 요소가 가져오는 행복감은 조금 더 복잡하다. 글이나 그림이나 철학, 과학적 이론과 같은 무언가를 보면서 창작자의 다양한 감정과 정서, 생각을 전달받고, 그것이 주로 미적 감각이나 재미, 공감을 느끼는 뇌의 특정 부분을 자극함으로써 그런 생각을 후세로 전하고 싶은 욕구와 행복감을 유발한다. 문학을 보며 작가의 내면세계에서 감동받은 작가는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것이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 감독이 의도한 흔적을 남긴다.

 

 나는 여태껏 논리적, 감성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밈의 전달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영역에서 느낀 것들이 유전적 본능에 의한 일차적 쾌락보다 좀더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물론 그 둘에 우열은 없다. 300년 전 과학자의 저술을 보며 그 당시 그가 느꼈을 생각에 공감하는 마음이나, 누군가 자기 아이를 안고서 느끼는 행복감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 자잘한 문제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둘이 다양한 영역에서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합주와 변주들이다. 인간의 결혼과 출산과 양육이 동물의 그것보다 따뜻하게 보이는 것은, 단순히 짝을 찾고 번식하는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그것이 과거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내려온 수많은 밈들과 엮이면서 만들어낸 정서적 의미들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동물의 그것과 같다면 모든 매체는 번식행위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을 통해 본성을 자극하는 포르노만을 내보내겠지만, 연인의 사랑이나 부모의 희생과 같은 정서적 주제들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들은 매년 천문학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렇게 인간의 원시적 본능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확장된 정서적 의미 부여의 여러 갈래 중에서, 요즘 가장 흥미가 가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혈연의 연쇄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체를 막론하고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소재 가운데 하나이고, 대단한 능력과 의지로 영웅적 업적을 이뤄낸 인물들이 자신과 무언가의 관계로 엮여 있다는 기분은 사람들 각자의 삶에도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나의 유전자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사람들의 가계도를 이어 보면 가깝게는 조선과 고려, 멀게는 중국, 몽골과 어쩌면 중앙아시아와 유럽에 이를 수도 있겠지. 그 시작이 어디까지 도달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십에서 수백만 명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나라의 흥망을 걸고 적국과 맞서 싸운 병사나 장군, 관료나 왕으로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골몰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하루하루 먹고 살 일을 걱정하거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던 걸인도 있겠지만,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인생에 어느 시점에서 성공적으로 자손을 남김으로써 나에게 유전자의 일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내 몸의 각 부분을 이루는 설계도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수많은 사람 중 누군가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고, 이런 생각을 미래의 나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어 포기했을 수도 있겠지.

 

 이런 식으로 과거의 조상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밈을 전파하는 창작자들에 대해 갖는 감정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그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내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보고 그의 생각에 공감하며 한번 만나 대화해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던 것처럼, 수백 년 전에 개울가에서 나와 같은 상념에 빠졌을 조상을 만나 이런 근원적인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의 생각을 교류한다면 얼마나 짜릿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나는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할 것 같지만, 누군가 비슷한 생각을 할 미래의 생물학적 or 정신적 자손을 위해 이런 글들을 남겨두는 것은 나름대로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이 글을 볼 미래의 나 또한 어떤 관점에서는 지금의 내가 낳은 정신적 자손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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