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들의 시대'-노트르담 드 파리
고등학교 때, 매 학기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식 날까지 애매한 시간이 남았다.
진도는 끝났는데 수업일수를 뺄 수는 없는 터라 선생님들마다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때웠는데, 좀 괴짜였던 음악 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음악에 관련된 영화를 틀어 주셨다.
기억나는 이름은 shine, once, 노트르담 드 파리, 그리고 베토벤에 대한 어떤 영화.
대부분 길이도 상당히 길고, 스스로는 찾아보지도 않을 만큼 생소한 작품들이었는데 기묘하게도 대부분이 내 취향에 맞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게 봤던 건,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심각한 인상으로 분장한 배우들이 나와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노래를 불러대는데,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어로 부르는 노래가 하나같이 엄청나게 멋있었고,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 아래 펼쳐지는 스토리 전개도 전혀 어색하거나 오글거리지 않으며 오히려 웅장하며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극의 초반부에 시인이 혼자 나와 약간 느끼한 목소리로 부르는 곡에 완전히 꽂혀서, 단 한 번 들었을 뿐임에도 멜로디와 목소리가 뇌리에 박혀 거진 일 년간이나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극을 다시 보며 알게 된 곡의 이름은 'Le Temps des Cathédrales'.
우리말 번역은 '대성당들의 시대' 라고 한다.
(원제는 '대성당의 시대' 라는 뜻이지만, 발음을 위해 고친 이름이라고)
그리고 더 나중에, 한창 음악에 빠져 좋은 곡들을 모으다가 이 곡의 한국어 버전 번안곡도 발견했다.
원곡이 너무 심각하게 좋기도 했고 번안곡의 한계도 있어서 완전히 만족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원곡의 포스와 분위기를 상당 부분 잘 살려냈으며, 가사를 직접 우리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 이 곡에도 한동안 엄청나게 빠졌었다. 원래 곡 하나에 빠지면 최소한 백 번이 넘게 들어대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이 두 곡에는 가장 오랜 기간동안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시적인 가사에 물 흐르듯 이어지는 멜로디,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 곡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내 취향이고 특히 원곡은 그 요소들을 경외감마저 느껴질 만큼 완벽히 소화해내서 듣고만 있어도 '정말 예술이다' 라는 느낌을 지금도 받는다. 그러고 보면 노래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번안곡을 직접 불러보려고 했다가 실패하고부터였던가. 참 여러 가지로 나에게는 의미깊은 노래다.
그리고, 이 노래를 다시 떠올려 글을 올리게 만든 아이유의 영어버전 커버.
발음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뭐 다 좋은데, 내 취향에는 조금 안 맞는 것 같다.
대체적인 평가가 좋은 걸 보면, 역시 아직은 내 안에 있는 원곡의 이미지가 너무 강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