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과자와 차

잡설 | 2014. 11. 13. 15:32
Posted by 메가퍼세크

요즘, 갑자기 티타임 비슷한 걸 가지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일정 없이 그때 그때 생겨나는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며 살다 보니 완전한 개판이 되어버린 생활 패턴에 조금이라도 규칙성을 줘 보려고, 편의점에서 카누 한 상자를 사다 매일 오후에 한 잔씩 마시기 시작한 게 발단.


많고 많은 커피믹스 중에 카누를 선택한 건 그저 상자가 멋있고, 어차피 매일 한 잔씩만 마실 테니 이왕이면 좋은 걸로 사자는 마음이었을 뿐인데 막상 카페에서도 카페라떼만 줄창 마시던 몸에 진한 향과 쓴맛을 가진 아메리카노를 주입하니, 적응이 좀 힘든 감이 있었다.


그래서 학교 앞 수입과자 전문점에서 여러 가지 과자들을 구입, 시행착오를 거치며 하나하나 먹어 보며 커피와 맞는 과자들을 찾아갔는데, 이게 또 생각보다 재미있는 과정이어서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하고 처음 '제대로 된' 홍차 전문점을 가봤는데, 정말 장난이 아닌 향과  맛의 하모니를 느껴 여기에도 꽂혀버렸고, 찻잎을 사려고 근처 마트를 뒤졌지만 찾지 못하고 꿩 대신 닭이라고 괜찮아 보이는 티백이라도 골라왔다.


커피에 맞춰 구입했던 과자들은 홍차와도 충분히 잘 맞아, 내키는 대로 아무 거나 조합해도 별 무리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간식 세트의 라인업이 완성되었으며, 원래의 의도대로 평소 일과에 괜찮은 휴식 시간 하나를 추가하는 데도 성공했다.


아무래도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자금사정 때문에 커피나 과자나 차나 꽤 소박한 것들뿐이지만, 점점 여러 가지를 먹어보고 마셔보며 가끔 사치도 부려보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운 과정이 되지 않을까.


인생을 좀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컨텐츠를 한 가지 더 찾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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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개봉한 '인터스텔라' 에는, 놀란 감독이 직접 설명하지 않거나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많은 물리학적 바탕 이론들이 숨겨져 있다.


물론 이런 과학적 바탕을 전혀 모른다고 해서 영화를 즐기는 데 큰 지장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배경적인 부분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보면 조금 더 깊이 있는 영화감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간단하게나마 영화에 관련된 물리학 지식들을 모아보았다.


이해가 쉽도록 모든 복잡한 내용과 수식들을 제거하고 직관적으로만 설명하다 보니 아무래도 내용의 일관성이나 깊이에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틀린 부분도 있을 수 있으니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조금 더 심도있는 상대성 이론 책들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하겠다.




1.차원


차원이란, 간단히 말해서 물체의 상태를 나타내는 데 필요한 지표(기준점을 제외하고)이다.


예컨대, 30cm 자 위에 아주 작은 벌레가 한 마리 올라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자 위에서 벌레가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어떤 숫자가 필요할까? 물론 자의 눈금 하나만 알면 된다.


반면, 네모난 색종이 위에 올라가 있는 벌레의 위치를 나타내는 데는 몇 개의 숫자가 필요할까? 여기에 사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ⅰ 색종이의 모서리 한 점(왼쪽 아래)부터 시작해서 가로와 세로로 눈금을 새기고, 벌레가 가로 방향으로 몇 센티미터, 세로 방향으로 몇 센티미터에 위치하는 지 나타낸다.(직교 좌표계) 


ⅱ 색종이의 왼쪽 아래 모서리 끝점에서 벌레까지 직선을 하나 긋고 그 직선과 색종이의 아랫변과의 각도, 직선의 길이(벌레와 모서리 끝점의 거리)를 나타낸다.(극좌표계)


두 가지 방법 모두, 두 개의 숫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예시에서 직선이나 색종이는 벌레가 있을 수 있는 '공간' 이라고 하고, 그 공간에서 벌레의 위치를 나타내는 데 필요한 숫자의 수를 '차원수' 라고 한다. 즉 직선은 1차원, 색종이는 2차원이다. 위의 설명을 확장하면 3차원 공간의 이미지도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3차원인가? 라고 묻는다면,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시간' 이라는 마지막 차원이 남았기 때문이다.


시간도 하나의 차원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위에 제시한 차원의 개념을 조금만 확장하면 된다.

색종이 위에 벌레 두 마리가 기어다닌다고 치자. 이 두 벌레가 자유롭게 기어다니다가 우연히 만났다면, 벌레의 위치를 나타내는 두 개의 숫자는 분명 일치할 것이다. 그런데 '만났다' 라는 건 뭘까? 결국 같은 '시간' 에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결국 현실 세계에서 물체에 대한 모든 정보를 나타내려면 위치에 대한 숫자들에 더해 시간이라는 숫자 하나가 더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을 위의 공간의 개념을 확장시켜 '시공간' 이라고 부른다.



2.시간 지연


시간이 공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차원이라는 것을 이해했다면, 그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재미있는 성질이 하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색종이 위를 기어다니는 벌레의 예시를 생각해 보자. 색종이의 왼쪽 아래 모서리에서 출발한 벌레가, 갑자기 어떤 방향을 정해 직선으로 계속 기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직선으로 기어간다' 는 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운동이고, 방향과 속도만 알면 손쉽게 나타낼 수 있다. 더 단순하게 하기 위해, 벌레가 기어가는 속도는 초당 10cm라고 먼저 가정하자.


이제 방향을 나타내야 하는데, 먼저 벌레가 색종이의 아랫변 방향으로 기어간다고 생각해 보자.

벌레가 기어갈 때 벌레의 위치를 나타내는 숫자 두 개는 어떻게 변할까?(2차원이므로) 당연하게도, 아랫변 방향으로는 초당 10cm로 이동하고, 세로 방향으로는 이동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벌레가 아랫변에서 약간 벗어난 방향으로 기어가기 시작한다면?

아랫변 방향으로의 속도는 초당 10cm에서 약간 적어지고, 세로 방향으로의 속도가 조금 생길 것이다.


'속도'가, 두 방향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도 비슷한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어떤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이 자동차는 시간 방향으로만 일정한 빠르기로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자동차가 갑자기 시속 100km로 달리기 시작한다면?

시간 방향으로만 움직이던 이 자동차는, 공간 방향으로의 속도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시간 방향으로의 빠르기와 공간 방향으로의 빠르기를 합한 것은 항상 일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자동차는 어쩔 수 없이 시간 방향으로는 조금 느리게 가야 하고, 결국 자동차에 실려 있던 시계는 더 느려지게 된다. 아~~~~~~주 약간.


그리고 그 자동차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당연하게도 조금이나마 나이를 느리게 먹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동차가 빠르게 움직일수록 더욱 많이.


(물론 현실에서 자동차 좀 타고 다닌다고 나이를 늦게 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데, 이런 현상이 충분히 느낄 만큼 일어나려면 빛의 속도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빛의 속도인가 하면, 상대성 이론에서 물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 속도가 빛의 속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 지연' 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 중에는 '쌍둥이 역설' 이라는 게 있다.


완전히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가 있을 때, 둘 중 한 명이 우주선을 타고 매우 빠른 속도로 충분히 여행을 하고 오면 여행하고 돌아온 쪽의 시간이 더 늦게 흘러 쌍둥이의 나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시간이라는 게 사실 각자에게 다른 속도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다.


한 가지 오해하기 쉬운 점은, 어떤 공간의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이 그 효과를 느낄 수는 없다.


시간을 느끼는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도 결국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느려진 만큼 인식하는 속도도 느려져서 결국 스스로의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른다고 느끼게 된다. 갑자기 어떤 사람의 키가 2배로 커져도, 주변의 모든 것이 2배로 커지면 자신이 커진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3.질량과 중력


2번까지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 속하는 내용들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 항목에서는  약간 더 발전된 '일반 상대성 이론' 에 속하는 부분들을 조금만 살펴보겠다.


1번 항목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실 4차원이고, 시간과 공간이 합쳐서 '시공간'이라는 것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2번 항목에서 언급한 시간 지연 효과는, 이 시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지된 사람과 움직이는 사람이 똑같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아도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은, 결국 시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관점이 변하지 않아도 시간 지연 효과가 일어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시공간을 억지로 잡아늘리는 것이다.


시공간을 늘린다니 무슨 소린지 감도 잘 안 잡히겠지만, 개념 자체는 간단하다. 평평한 고무판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 무거운 쇠공을 올려놓으면, 판은 움푹 패인다. '왜곡' 이 일어난 것이다. 시공간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왜곡된다. 그럼 시공간을 휘게 하는 쇠공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질량' 이다.


※어째서 하필 질량이 공간을 휘게 하는지에 대한 서술은 이 글의 수준을 벗어나므로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일단 이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중력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앞의 쇠공의 비유에서, 쇠공으로 인해 휘어진 고무판 위에 구슬을 굴렸다고 생각해보자. 구슬은 고무판의 평평한 곳을 지날 때는 직선으로 굴러가겠지만, 쇠공 주변에 다다르면 쇠공(정확히는 쇠공이 만든 구덩이) 쪽으로 휘어져서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중력의 정체다.


그렇기에 무거운 질량이 있는 or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공간이 심하게 휘어져 있을 것이고, 그 주변을 지나는 물체는 위에 언급한 시간 지연 현상과, 휘어진 공간에서 일어나는 여러 신기한 현상들을 체감할 수 있다.



4.블랙홀과 웜홀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블랙홀과 웜홀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블랙홀에 대한 설명은 3번에서 바로 이어진다. 쇠공 주변을 지나가는 구슬의 경로가 휘어진다면, 가끔 너무 휘어져서 쇠공에 부딫히는 구슬도 있지 않을까?


간단히 예상할 수 있듯이, 구슬이 휘어지는 정도는 쇠공이 얼마나 무거운지, 구슬이 얼마나 무겁고 느리게 움직이는지, 구슬의 경로가 얼마나 쇠공과 먼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그 얼마나 가볍고 빠른 구슬을 옆으로 굴려도 전부 삼켜버리는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쇠공도 있지 않을까?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빠른 구슬은 빛이다. 결국 빛이라는 구슬을 옆으로 굴려도 무조건 집어삼킬 만큼 무거운 쇠공(질량)이 있다면, 그 쇠공의 주변은 그 어떤 구슬(물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마의 구덩이, 모든 물체의 개미지옥이 될 것이다. 빛도 빠져나올 수 없는 이 구덩이의 이름은 바로 '블랙홀' 이다.


블랙홀의 가공할 만한 질량은 주변의 시공간을 거의 찢어질 만큼 극도로 왜곡시키고, 한 번 들어간 물체는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 이라는 경계를 만든다. 이 경계 안으로 들어간 물체는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기에, 블랙홀의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고도로 발전된 현대 물리학으로도 규명할 수 없는 이른바 '특이점' 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블랙홀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기에, 물리학자들은 블랙홀의 알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라도 많은 연구를 수행했다. 블랙홀은 사실 '검지 않다' 는 것도, 그런 물리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진 사실이다.


빛도 빠져나올 수 없는데 어떻게 검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당연한 물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진공 청소기'를 생각해 보면 된다. 진공 청소기의 흡입구에 가까운 물건들은 모두 빨려 들어가지만, 흡입구에서 10cm만 떨어져도 흡입하는 힘은 훨씬 떨어지고, 30cm 정도 떨어지면 청소기의 영향력은 산들바람에 불과하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는 블랙홀도 사실은, 모든 물체를 빨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중력이라는 힘의 특성 때문에, 만약 태양이 지금 이 순간 질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블랙홀로 쪼그라든다고 해도 지구에 미치는 중력은 변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근처에서는, 주로 가스로 이루어진 가벼운 물질들이 블랙홀의 주변을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다. 이런 물질들은 너무 엄청난 속도로 돌기에 서로 마찰해서 열을 내고, 그 열이 워낙 막대하기 때문에 백열 전구처럼 강한 빛을 낸다. 멀리서 보면 이런 빛은 블랙홀에서 직접 나오는 것처럼 보이고, 블랙홀의 중력에 의해 빛이 여러 방향으로 휘어지고 왜곡되어 특이한 형태를 띤다. 그 결과 일반적인 블랙홀은 그 이름과는 다르게 실제로 '검지 않다'


웜 홀은 '벌레구멍' 이라는 이름대로, 시공간에 뚫린 구멍을 말한다. 지금까지 지겹게도 우려먹은 고무판의 비유를 마지막으로 써먹도록 하자. 고무판이 너무 구부러지다 못해 아예 C자 모양으로 굽어버렸다고 생각하자, C자의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이동하려면 왼쪽 벽을 따라 긴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C자의 위쪽과 아래쪽 벽을 뚫어 통로로 이어버리면?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라는 오래된 공리에 의해, 훨씬 빠른 이동이 가능해진다. C자의 왼쪽 벽을 따라 이동하는 데 빛의 속도로 1년이 걸렸는데, 웜 홀을 뚫으면 단 5초 만에 이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웜 홀의 활용도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위에서 구멍을 뚫은 고무판은 공간이 아니라 '시공간' 이었기에, 구멍(웜 홀)을 통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넘나들 수 있다. 구멍의 한쪽 편은 2014년의 지구인데, 건너편은 4012년의 프록시마 센타우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연구가 이루어진 블랙홀에 비해 웜 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지지부진하기만 하지만, 그 놀라운 특성으로 인해 많은 SF장르나, 인류의 미래에 대한 구상에서는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장 아무리 가까운 별도 광년 단위로 세어야 하는 우주에서, 거의 속도제한 없이 바로바로 이동할 수 있는 웜 홀의 존재는 치트키와 다를 바 없으니까. 인류가 언젠가 드넓은 우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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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을 보고 실망하다(스포일러)

취미/영화 | 2014. 8. 6. 02:26
Posted by 메가퍼세크

※이 글은 모두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한 마디로, '최악' 이었다.


영화를 볼 때 내가 싫어하는 모든 요소들을 한 데 버무려 섞어놓은 종합 선물 세트에 가까웠다.


얼마나 개판이냐 하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원래 없던 '영화' 카테고리를 만들어서까지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정도로 개판이다.


나 자신도 지금의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역설적으로 명량이라는 영화에서 '꽤 괜찮다고 느꼈던' 몇 가지 점부터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장점-


1.최민식의 연기


극중 이순신의 복잡한 심경을 정말 잘 묘사해냈다고 생각한다. 대척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구루시마' 류승룡은 억지 설정과 표정의 제약 때문인지 오글거리기만 했기에 더욱 돋보였다.


2.'나름'의 고증 노력(아주 조금)


...적어도 명량 해협에 철쇄를 깔았다던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없었고, 전투 초기에 이순신의 대장선만이 혼자서 싸웠다던가, 포격전으로 왜군의 배를 요격했다거나 하는 부분들은 감독 나름대로 눈꼽만큼이라도 고증을 고려한 연출로 보였다. 대신 어쩌면 그보다도 심할 수 있는 엄청난 오류들을 추가로 저질렀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무시한다.


3.'나름' 멋진 해전 묘사


바다와 물살의 CG라던가, 포격전에 관련된 묘사가 매우 멋있었다.(고증은 모르겠지만) 왜구와 백병전하는 장면도 전체적으론 식상했지만 딱 두 장면, 창을 일제히 위로 세우고 왜구들의 접근을 막는다거나 근접거리 포격으로 적을 날려버리는 부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단점-


1.그냥 아예 말조차 안 되는(개연성이 부재중인) 전개들.


고증이고 뭐고 운운하기 전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분들이 산재해 있다.

슥 자르면 피도 별로 없이 뚝 떨어지는 목이라거나, 멀리서 곡사로 쐈는데 팔이나 머리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화승총 정도는 애교로 봐준다고 해도 말이다.


-보급도 개 딸릴 상황에 최소한 부하들의 개인 물자, 소중한 물건, 미처 나오지 못한 사람까지도 있을 수 있는 마을에 큰 불을 내버리고 자랑스럽게 연설하는 이순신 장군이라던가(불이 번지면 어쩌려고?)


-'작용 반작용의 법칙' 도 모른 채, 졸라 큰 배에 작은 배 십수 척을 밧줄로 연결해 '인력' 으로 끌어당기려는 똥멍청한 민중들과, 심지어 작은 배는 미동도 없이 큰 배가 끌려오는 뉴턴 할아버지가 지옥에서 통탄할 만한 병신같은 현상이라던가(회오리까지 있었는데!)


-후반에 배 몇 척한테 포위돼서, 이미 상륙한 인원이 갑판의 반절이 넘는 절체절명의 백병전 상황에서 포로 근접 샷 한 방으로 왜군 배들을 날려버리니 갑자기 수적 열세였던 조선 병사들이 스팀팩이라도 빨았는지 왜군 병사들을 순식간에 도륙내버리는 병신같음과(심지어 어깨에 용가리 두 마리 붙여서 눈에도 겁나게 잘 띄는 이순신 장군님은 난전 와중에도 절대 노리는 일이 없는 눈병신 왜군들도 포함)


-신기전인지 뭔지 화살에 무슨 통 달아놓고 분명 도화선인지 뭔지에 불을 붙였는데, 그걸 또 수십 초 이상 기다리다가 별다른 기폭 장치 조작도 없이 쏘는 장면에서는 그냥 실소만이 나올 뿐이었다.


-전시상황인데 쓰잘데기없이 더럽게 세밀하고 거대한 용대가리를 붙여 넣은 쌔삥 거북선도 혹자의 눈에는 긴장감을 박살내주는 피식의 대상이 될 수 있었겠고.


극의 기본 중의 기본인 개연성 자체가 박살나 있기에, 몰입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계속 진지하다가 어이 털리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상황상 개그는 또 아닌 것 같고. 뭐 어쩌라고?


2.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닌데 졸라 식상하거나 재미없거나 쓰잘데없는 장면들.


이 쪽은 훨씬 심각했다.


1번의 이유로 극의 메인 전개 자체도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는데, 거기에 가장 전형적이고 뻔하고 재미도 의미도 감동도 없는 병신같은 잔가지들을 수없이 쳐 놨다.


-시작부터 끝까지 저걸 왜 넣었는지 이해도 안 가는 눈 먼 부인과 백성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백성들이 배 끌어주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오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간간히 복선 깔아주면서 비장의 카드로 쓰일 거 같더니, 그냥 부하 한 명의 자폭과 백성들의 억지 신파극으로 존재를 알게 되어 터져버린 자폭선.


-판옥선의 높이가 세키부네보다 2미터 가까이나 높았다는 고증을 무시하면서까지 집어넣은, 우리나라 사극에 안 나오는 걸 도통 볼 수가 없는 쓰레기같은 백병전.


-현대로 치면 모자에 별이 서너 개는 달려 있을 이순신 장군님께서 친히 내려와 훨윈드를 돌아주시거나, 배에 올라와 난봉을 피우는 라이벌(?) 구루시마를 여럿이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리는 판에 박힌 연출은 너무나도 지겨웠다. 물론 화살 몇 방 쳐맞고도 좀비새끼같이 걸어가는 신도 대체 왜 넣은 건지 참.


-애초에, 해전 영화에 라이벌 따위를 만들어야 하는지부터가 의문이기도 하다. 대체 어째서, 구루시마 따위를 이순신의 라이벌로 끼워 맞춰야 했는가? 이순신한테 허구한 날 털려서 뭐 포장할 것도 없는 마당에, 중간에 합류한 해적 출신 장군과 기존 수군 장군들 사이의 갈등이라는 별 쓰레기같은 이벤트를 억지로 넣어주면서까지 말이다.


-그것도 없던 설정을 끼워넣을 거였으면 연출이라도 잘 해 줄 것이지, 장면도 개판에다 괜히 근거 없는 카리스마나 만들어보려고 일본 장수 목에 칼을 들이대기나 하질 않나, 눈은 항상 부릅뜨고 다니니 더 오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이건 연기력 문제일지도)


-아 물론, 무슨 게이새끼같이 얼굴에 허옇게 화장하고 흔들리는 배 위에서 강선도 없는 조총으로 저격질하다 화살로 역저격맞고 뒤진 멍청한 저격수도 빼놓을 수 없고.


-마지막으로 후일담에 나오는 대화도 너무 영양가가 없었다. 이긴 다음에 별안간 뜬구름이나 잡고 앉아있으니.


원래 기본 바탕이 좋았으면 모르겠는데, 기본 줄기부터가 막장인데 뻔한 클리셰들을 마구마구 쳐넣은데다, 몇 안 되는 떡밥들조차 애매하거나 찌질하게 마무리지어 버리니 그냥 말이 안 나오더라.


쓰잘데기 없는 등장인물들만 컷트해도 얼추 전체의 1/3은 빠졌을 거 같은데, 그 돈으로 메인 스토리를 더욱 완성도있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총평-


그 누구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영화다.


무엇보다 가장 맘에 들지 않는 점은 명량 대첩이라는, 삼국지로 치자면 적벽 대전쯤 될 신화적인 전투를 이런 식으로밖에 풀어내지 못했다는 것 . 최고급 횟감으로 매운탕을 끓인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적 연출과 극적 장치, 클리셰라는 갖은 양념으로 소재를 빛나게 하는 것도 좋지만, 이미 찬란하게 빛나는 최고급의 소재를 다룰 때만은 양념을 자제하고 그 본연의 맛을 극도로 살리는 데 집중하는 절제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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