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아 콘서트 '다시, 봄' 관람

경험 | 2015. 3. 9. 01:03
Posted by 메가퍼세크


오늘, 롯데카드 아트센터에서 열린 루시아 콘서트에 다녀왔다.


표 예매가 열리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공연날이라니. 지갑에 넣어둔 표를 볼 때마다 느꼈던 설렘이,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기대감으로 바뀌어 공연장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커져만 갔다.


기대에 부푼 나머지 너무 일찍 도착해 버린 공연 장소 근처에서 레몬티 한 잔을 마시고, 공연 십몇 분 전쯤 입장해 자리에 앉아 마음의 준비를 시작. 핸드폰 전원을 꺼서 지갑과 함께 가방 속에 깊숙히 넣고, 관람하기 가장 편한 자세를 잡고 앉은 지 몇 분 후. 커튼이 열리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루시아의 인상은 예상과는 많이 다르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면 예상 그대로였다고 할까. 감성적이고 표현력 있는 가사와 곡들 때문에 조용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밝고 활발하며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


콘서트 처음에는 굽 있는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세 번째 곡이 끝나자 무대 뒤에 고이 벗어놓고, 무대 전체를 열심히 잰걸음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격정적인 몸짓을 선보이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곡 자체도 앨범에 수록된 것과는 많이 다르고, 라이브 버전으로 어레인지한 부분이 상당히 많았던 기억이 난다.


조용히 서서 서정적인 무대를 펼칠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지만, 상당히 좋은 방향으로 빗나갔다고 해야 하나. 관객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싶다는 의지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콘서트 중간중간의 멘트에서도 관객에 대한 감사와 곡에 대한 설명, 자신이 곡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마지막 날 공연에 대한 보너스라며 미발표곡도 하나 공개했다.

(근데 다른 후기들 보니까 마지막 날에만 공개했다는 건 순 뻥이었음)


통기타 둘과 베이스, 드럼, 현악 4중주로 이루어진 밴드의 하모니도 좋았고, 특히 'I can't fly' 나 '데미안' 같은 노래를 할 때 바이올린이 부각되는 부분이 상당히 멋있었던 기억이 난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사운드와 감성 가득찬 보컬, 시적인 가사는 곡을 듣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감상한다' 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고, 눈을 감고 음의 조화와 굴곡, 거기에 얹어지는 가사를 따라가다 보니 정말로 노래를 통해 가수가 표현하고 싶은 감성을 직접 전달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지, 슬픈 노래를 부를 때는 특히 감성적인 여자분들 몇몇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공연 전체적인 준비, 가수의 자세, 퍼포먼스와 사운드 등. 정말 준비를 많이 하고 정성을 많이 들였다는 느낌이 강한 공연이었고, 공연장을 나올 때는 그 준비만큼 많은 것을 실제로 얻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에도 루시아의 공연이 있다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관람하게 될 것 같다.


마무리는, 루시아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발견한 공연 기념 케익 사진.

오늘 공연에서는 검은 드레스를 입었지만, 맨발도 그렇고 특유의 느낌이 참 잘 표현된 것 같다.





'경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시아 콘서트 'Light&Shade' 후기.  (0) 2016.01.19
투어리스트 콘서트 '오늘은 맑음' 후기  (0) 2015.12.06
2015 김동률 'The concert'  (0) 2015.10.12
 

가을방학, 루시아 노래들.

취미/음악 | 2015. 3. 8. 03:27
Posted by 메가퍼세크

집에서 혼자 노래를 듣다 보면, '이건 나 혼자 듣기 아깝다' 싶은 곡들이 있다.


멜로디가 좋거나 가사가 좋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멜로디가 좋은 노래는 눈을 감고 머릿속을 비운 채 들을 때 진가를 발휘하고

가사가 좋은 노래는 가사창을 조금 더 키워놓고 멍하니 가사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친구들에게 노래를 들려줄 때도 멜로디가 좋은 노래는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틀어놓고 이어폰을 꽂아 주면 그만인 반면, 가사가 좋으면 가사창까지 띄워서 건네주고 싶어지기도 한다.


정말 가사가 좋은 곡들은 아예 노래를 떼놓고 가사만 봐도 웬만한 문학 작품 못지 않아, 아예 가사 전체를 복사해다 폴더에 모아놓기도 한다.


그런 좋은 가사를 가진 곡들 중, 내가 특히 좋아하는 두 가수의 곡을 몇 개 추려 모아보았다.

초연하고 담담하지만 잔잔한 목소리로 생각과 철학을 흐르듯 풀어내는 가을방학,

감성과 운율이 살아 있는 가사를 마치 연극배우와 같이 극도로 감정이입하여 표현해내는 루시아.

서로 정 반대라고 할 수도 있는 두 종류의 표현법이지만, 듣다 보면 약간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소개하려고 보니 대부분의 곡들이 좋아, 고르는 데 애를 먹어서 각각 5개씩만 선정했으니 여기 소개된 곡들이 마음에 든다면 다른 곡들도 들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1. 인기 있는 남자애



달달하고 스토리있는 곡.

직접적으로 결론을 내지 않고 짧고 간결한 스토리를 반복하면서 여운을 남기는 게 좋다.


2.가을방학-가을방학



참 아련하면서 공감되는 곡이다.


'너' 의 넋두리를 화자가 대신 풀어주면서, 잠시 화자의 입장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구도가 노래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라 신선했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인데도 잠시 깊게 들어가는 척 하다가 두루뭉실하게 넘어가서 너무 심각하지 않게 완급 조절을 한 것도 마음에 든다.


3.가을겨울봄여름-가을방학



글로 치자면 '수필'이나 '설'을 떠올리게 하는 가사다.

일상의 사소한 깨달음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가을방학의 스타일이 가장 잘 묻어나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


4.여배우-가을방학



'취미는 사랑' 으로 가을방학을 알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접한 곡.

소재도 좋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설레임이라는 주제가 참 괜찮은 것 같다.

그리 길지도 않은 곡 내에서 서사적 구성을 물 흐르듯이 풀어내면서, 심리적 묘사까지 충실한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5.샛노랑과 새빨강 사이



가을방학의 감성이 묻어나는 곡.

시시때때로 바뀌는 기분의 색깔에 대한 곡이다. 



6.루시아-선인장



이런 동식물을 소재로 한 노래도 좋다.

가시 돋힌 선인장이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 이런 가사를 생각해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7.필로소피-루시아



가사는 반복도 많고 단순한데, 참 무거운 단어가 많이 쓰인 노래다.

자신만의 철학으로 번뇌하는 연인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한 것 같은데... 곡이 좋아서 참 많이 듣긴 했지만 아직도 몇 부분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8.어떤 날도, 어떤 말도-루시아



소재는 참 단순한데, 문장과 표현이 정말 마음에 드는 곡이다.

사랑 노래를 이런 식으로 쓰는 가수는 처음 봐서, 루시아 노래에 처음 빠졌었던 기억이 난다.


9.어른이 되는 레시피-루시아



제목도 특이하고, 내용도 특이하다.

노래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가사의 상상력이 마음에 들어서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찾아보니 홍차에 계피와 레몬을 넣는 레시피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서 착안한 게 아닌가 싶다.

어른들이 마시는 홍차를 마시면,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아이의 심리? 를 표현한 게 아닐까.


10.I can'y fly-루시아



무슨 생각으로 썼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냥 문장이 좋다...

어딘가의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어온 것 같다.

'취미 >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드-춤추는 바람  (1) 2015.04.25
DEPAPEPE-二人の写真(두 사람의 사진)  (0) 2015.04.25
김동률 곡 모음  (0) 2014.12.06
그런 계절-루시아  (0) 2014.04.27
로시난테-이적  (0) 2014.04.26
 

종교에 대한 생각

자아성찰/가치관 | 2015. 3. 5. 00:10
Posted by 메가퍼세크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종교라는 것에 참 관심이 많았다.


관심이 많았다고 해서 열성적으로 종교를 믿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그 정 반대 방향으로.

아무리 봐도 뻔히 구라처럼 보이는 것을, 사람들이 어째서 열렬히 믿고 따를 수 있는지 참 신기했다.


궁금증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커져 책도 읽어보고,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친구의 권유로 교회 수련회를 갔을 때에는 3일 동안 새벽 2시까지 그쪽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다.


종교라는 게 이래서 저래서 말이 안 되지 않느냐. 라고 어릴 때부터 했던 생각과 지식들을 총동원해 물어보면 교회 쪽 사람들은 처음에는 논리로 맞대응하다가, 모든 논리가 논파되고 나면 믿음의 영역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다면서 결국 그들만의 쉘터에 틀어박히곤 했다.


그때 내가 주장했던 주된 논리가 아직도 생각난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거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인간의 감각 또한 불완전한데 어떻게 당신이 깨달은 것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완전무결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해서 계시를 내리는 것과, 인간과 비슷하게 불완전하지만 인간에게 계시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외계인이 존재하는 것을 인간이 구분할 수 있는가?' 


이 간단한 논리로 수많은 종교인들과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생산적인 대답을 주지 못했고, 그렇게 비슷한 삽질을 하며 궁금증에 몸서리치고 있다가 조금 다른 방향에서 실마리를 발견했다.


'이기적 유전자' 라는 책을 접했던 것이다.


그 책에서는 인간은 결국 유전자에 의해 조종되는 운반 기계이고, 인간이 느끼는 여러 감정이나 무의식적인 행동들은 단지 자연 선택의 시뮬레이션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단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유전자가 더 잘 살아남았기 때문이라는 문단을 볼 때에는,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지고 새로운 것이 밀어넣어지는 기분이었다.


책을 다 읽자 내 머릿속에는 '세상에 아무것도 의미는 없고, 모든 것은 단지 자연이라는 정밀한 기계의 흐름일 뿐이다' 라는 문장이 박혀 지속적으로 엄청난 허무감을 발산했고, 한 일주일 정도 극도의 우울증에 빠졌다. 


세상의 현실이 이렇게 의미없고 허무한 눈 덮인 황무지 같은 곳이라면, 인간에게는 추위를 견뎌낼 옷이나 건물이 필요하지 않을까. 굳이 모든 사람이 이런 허무함과 우울증에 잠겨 있을 필요는 없다고 느꼈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심정이 단박에 이해가 갔다.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 존재를 믿는 것만으로 자신의 심적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 때부터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을 그만두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종교를 통해 돈, 시간, 약간의 합리성과 같은 어느 정도의 손실을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생 동안 얻게 되는 마음의 안식이라던가 잠재적 정신병원비라던가 우울증으로 허비할 시간들을 고려해 보면, 웬만한 경우 종교는 일생 동안 사람이 얻게 되는 행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적어도 내가 만난 교회 사람들은 그랬으니까. 


'자아성찰 > 가치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  (2) 2017.09.11
선함이라는 것.  (0) 2016.10.24
투표: 선택의 문제에 대하여  (0) 2016.09.26
군중심리와 동기의 순수성  (4) 2015.11.15
나의 가장 큰 고민.  (1) 2014.04.26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사랑받는 음식, 초콜릿.


개인적으로 초콜릿은 고고하게 단품으로서 맛을 발휘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과자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한 시너지 효과도 쉽사리 무시할 수는 없다.


오늘은 그 시너지 효과를 준수하게 이용한 괜찮은 과자 두 개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먼저 소개할 것은, 최상과 최악의 맛을 모두 보여준 본 마망 상표의 마지막 작품, 초콜렛&캬라멜 타르트.




겉포장은 이번에도 다른 제품들과 비슷하다.

최초로 두 가지 맛을 컨셉으로 한 제품이라 그런지, 캬라멜과 초콜릿 두 가지를 균형 있게 강조했다는 정도?


그리고 근접 샷을 업로드하려고 했지만, 깜박하고 사진을 날려먹은데다 남겨둔 과자도 없는 관계로... 어차피 두 번이나 소개했던 상품이고, 실제 모양도 겉포장에 그려진 것과 똑같으니 일단은 대충 넘어가도록 하겠다.


맛의 평가는, 미묘하지만 준수한 편이다.

한 과자에 초콜릿&캬라멜&파이 껍질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집어넣고, 밸런스를 맞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 입에 넣었을 때의 맛 밸런스는 꽤 잘 맞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끈적한 질감을 가진 캬라멜의 맛이 조금 더 강하고 오래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던 듯 하다.


초콜릿 부분이 단단해 보이지만 보기보다 두께가 얇아 한입 베어물면 아래의 캬라멜 층으로 자연스럽게 부서지고, 캬라멜과 파이까지 깔끔하게 입 안에 들어온 후 서로 융화되는 식감은 높게 평가할 만 하다.


초콜릿이 쿠키에 밀착되어 서로 단단하게 융합된 보통의 초콜릿 쿠키와 달리, 초콜릿이 캬라멜 층 위에 약하게 붙어있는 구조적 특징과 타르트 껍질 특유의 질감, 그 둘의 질감과 맛을 모두 감싸는 캬라멜의 느낌은 확실히 특이하고 완성도 높은 일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소한 한 번쯤 먹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피카소 초콜릿 쿠키.



겉포장과 이름을 보면 유럽 과자인 줄로 착각하기 쉽지만, 뒷면의 설명을 보니 말레이시아산이다.

왜 저런 이름을 썼는지는 알 수 없고, 위에 써 있는 'CABELL DE BRUE' 라는 문구는 구글 번역기로 수없이 돌려봤지만 어떤 나라 언어인지 모르겠다...


뭐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일단 과자를 뜯었다.



속포장이 한 번 되어 있고,




그걸 뜯으면 과자가 들어 있는 트레이가 나온다.

이 사진에서는 보기가 좀 안 좋지만,




뒤집으면 이런 모양이 나온다. 아무래도 초콜릿 부분은 압력이 가해지면 녹을 수 있으니, 다른 과자에 묻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넣어둔 듯. 처음 트레이를 보고 이번에도 창렬인가 싶었지만, 이렇듯 실용적인 목적의 포장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체적인 맛은 초콜릿과 쿠키의 두께를 두 배씩 뻥튀기한 초코틴틴에 약간 가깝다. 두 부분 다 두께가 상당한 편이고, 쿠키 부분은 평범하게 담백한 맛을 내지만 초콜릿 부분의 단맛이 상당히 강하다.


처음에는 거의 팀탐에 버금갈 정도의 단맛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먹다 보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고, 서로 두껍고 자기주장 강한 맛을 내는 초콜릿과 쿠키의 맛이 번갈아 휘몰아치다가 결국 초콜릿이 근소하게 이기는? 그런 느낌이라고 하는 게 가장 정확할 것 같다. 


집어먹을 때 손가락에 초콜릿이 묻기 쉬워서 접대용으로 쓰기는 좀 그렇고, 적당히 단 맛이 필요할 때 한번씩 먹으면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또한 국내 과자에서는 찾기 힘든 맛이니까.

 

toraysee 렌즈 클리너

취미/기타 | 2015. 2. 15. 13:51
Posted by 메가퍼세크

보통 '안경닦이' 라고 부르는, 안경을 닦는 데 쓰이는 극세사 천은, '계륵'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물건이다. 있으면 여러 모로 좋지만, 딱히 없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옷자락 같은 적당한 천으로 안경을 닦다가 생긴 자잘한 기스들을 보면서 안경닦이의 필요성을 느낄 때도 많지만, 안경을 쓰고 다니는 모든 곳에 손수건만한 천을 챙겨 가기도 귀찮고, 막상 들고 나가서 잃어버리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딜레마 때문인지, (특히 남자들의 경우) 이 작은 천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은근히 찾아보기가 힘들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안경을 쓰기 시작한 어릴 적부터 잃어버린 안경닦이가 최소한 수십 장. 하도 잃어버리다 못해, "비싼 안경닦이를 사면 안 잃어버리겠지?" 라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도달해 인터넷을 뒤졌던 적이 있었다.(아마 5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도레이시' 라는 일제 안경닦이가 좀 비싸지만 엄청 좋다는 말을 듣고 바로 주문, 만 원 근처라는 안경닦이로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놀랐지만, 생각보다 엄청 뛰어났던 성능에 만족하고 소중히 썼다. 하지만 사람의 습성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기에 몇 달이 지나기도 전에 그 비싼 물건조차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즈음에 바쁜 일들이 많았던지, 어쩌다 보니 다시 사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시 안경점에서 공짜로 주는 안경닦이를 쓰게 되었다.


얼마 전에 다시 생각이 나서 해당 상표의 안경닦이를 찾아보았지만, 해당 상품은 이미 품절에 새로 들어올 기약도 없고, 국내에서 구할 방도가 없는 상황. 


하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거진 한 시간여의 검색 끝에 이베이와 아마존닷컴에서 '도레이시' 라는 이름의 천조각을 찾았고, 배송비 포함 17유로(대략 2만원 이상)에 가까운 미친 가격에 잠깐 고민했지만 마침 한창 돈 쓸 데가 없던 상황이라 그냥 질러버렸고, 얼마 전 한국에 물건이 도착했다.


그렇게 5년여의 시간을 넘어 다시 재회한 그 물건의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


역시 비싼 몸이라 그런지, 흰색 바탕에 일부분만 물건이 보이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포장이 참 멋지다.

안경을 쓰는 친구들에게 줄 수 있는 색다른 선물로도 괜찮을 것 같다.


'Multi-purpose washable micro fibre lens cloth' 라는 긴 문장은 이 물건의 용도와 재질, 특성을 명확히 설명해 준다.


'다목적의, 세탁 가능한, 극세사 재질의 렌즈 클로스'


그런데, 잠깐의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이 문장의 진의는 놀라웠다.


'극세사' 라는 단어는 한 가지 섬유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는 실' 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이고, 극세사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것이, 'NP분할사' 라고 하는, 단순히 하나의 섬유를 잘게 쪼갠 종류의 극세사로, 직경은 대략 5마이크로미터 정도. 보통 안경점에서 나누어 주는 공짜 안경닦이는 보통 저급의 NP극세사를 일반적인 굵은 실과 혼방하여 직조하는 것으로, 원가는 겨우 100원 이하.


그에 비해 이 렌즈 클로스를 직조하는 데 쓰인 극세사는 '해도사' 라고 하는, 특수한 화학 공정을 통해 처음부터 엄청나게 얇게 제조한 고급 실로, 직경은 2마이크로미터 정도에 NP분할사와 달리 단면이 둥근 모양이라는 이점이 있다고 한다.


제조 원가도 비싸고 제조에 드는 기술력이 상당해서, 이 상품의 제조사인 일본의 '도레이' 나, 한국의 '코오롱' 같은 몇몇 기업만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라고.


워낙 얇다 보니 렌즈에 닿는 표면적이 넓어 본연의 목적(렌즈 클리닝)에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보통 비누로 거품을 내도 극세사 때문인지 거품이 거의 쉐이빙 폼에 가까울 만큼 작고 균일하게 나서 미용 목적으로도 많이 팔린다는 믿기지 않는 말도 있었다.


말 그대로 '다목적' 의, '질 좋은 극세사를 사용한', '최고급'의 렌즈 클로스. 이런 놀라운 품질에 대한 광고문구나 설명서 하나도 없이, 그저 시크하게 한 문장으로 상품 설명을 끝냈다는 건 대체 어떤 자신감일까. 


아무튼, 설레발은 이쯤 하고 상품을 개봉해 보자.




일단 순수 극세사라 그런지, 두께가 정말 얇다. 양면에 손가락을 마주대고 비벼 보면, 천 특유의 부피감은 간데없고 거의 기름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둔 느낌? 약간 손수건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말도 안 되는 두께 때문에 확실히 구별된다. 그렇게 얇음에도, 말도 안 될 만큼 치밀해 직조물 특유의 체크무늬는 거의 보이지도 않으며, 엄청나게 가까이에서 쳐다보아야 거의 점에 가까운 조밀한 벌집 모양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


시험삼아 렌즈를 닦아보니 그 두께 때문에 거의 손가락으로 직접 렌즈를 닦는 느낌이면서도, 렌즈에 묻은 모든 기름기나 이물질이 천으로 빨려들어가는 게 참 신기했다. 가장자리의 마감 처리도 상당히 꼼꼼하고 촘촘해서, 아무리 사용해도 실 한 오라기 하나 쉽사리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좋은 지갑을 사면 돈을 많이 쓰게 되고, 좋은 신발을 사면 많이 걸어다니고 싶게 된다고 했던가. 앞으로는 안경을 닦는다는 것의 느낌이 참 많이 달라질 것 같다. 물론 그 느낌에는, 무려 2만원이나 하는 렌즈 클로스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긴장도 (좀 많이)섞여 있겠지만.


'취미 >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차 입문기.  (0) 2017.12.26
 

2,500히트 달성

잡설 | 2015. 2. 9. 23:58
Posted by 메가퍼세크



별 생각 없이 블로그 들어왔는데 딱 2500히트.


잠깐 기분이 좋았는데, 블로그 글들 보니 다시 쪽팔린다...


대체 언제쯤이면 내가 만족할 만한 글을 쓸 수 있을까.

 

'슬픈 미이라의 저주' 에 대한 감상

취미/게임 | 2015. 1. 29. 16:37
Posted by 메가퍼세크



리그 오브 레전드의 새로운 시네마틱 컨텐츠가 발표되었다. 징크스 발매 때 발표되었던 'Get Jinxd!' 이후, 15개월만에 나온 개별 캐릭터의 뮤직 비디오다.


동화풍의 그래픽과 기승전결이 뚜렷한 장면 전개, 뮤지컬 느낌이 나는 곡 등 마음에 드는 부분은 수없이 많지만, 그 동안 리그 오브 레전드의 영상 컨텐츠들을 봐온 유저로서 느끼는 가장 큰 포인트는 역시 영상의 주제 선정. 라이엇의 영상물 제작에서 오랜 시간 동안 외면되어 왔던 '캐릭터 스토리' 를 정면에 부각했다는 것이 가장 눈에 띈다.


울보 아무무와 잔혹한 광대 샤코, 시체를 짜맞추어 살아난 언데드 장군 사이온과 녹서스에서 쫓겨난 부모에 의해 키워진 천재 마법사 애니 등. 다양하고 각자의 개성과 매력을 갖춘 캐릭터들은 리그 오브 레전드가 초창기부터 큰 인기를 얻도록 한 큰 요인 중 하나였고, 초기의 라이엇은 '리그의 심판' 이나 '정의의 저널 등을 통해 캐릭터 컨텐츠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저런 부가적인 컨텐츠들은 유저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나씩 사라져 갔지만, 라이엇은 그 대신 조금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캐릭터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개성과 매력을 겸비했던 초기 챔피언들>


최초로 곡 전체에 가사를 붙여 캐릭터의 컨셉을 설명한 다이애나의 로그인 음악부터 시작해, 렝가와 카직스의 라이벌 구도와 게임 내 특수 이벤트, 로그인 화면에서 독백이 나왔던 엘리스, 발매 전부터 공식 홈페이지에 떡밥을 뿌려대더니 아예 최초로 뮤직 비디오까지 들고 나와 대놓고 캐릭터성을 표현했던 징크스까지. 라이엇의 캐릭터 메이킹은 표현 방법을 발전시켜 가며 꾸준히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옛말에 열흘 붉은 꽃은 없다고 했던가. 과도한 창작으로 매너리즘에 빠진 것인지, 날이 갈수록 라이엇에서 내놓는 신규 챔피언들이나 스토리 관련 컨텐츠의 매력이 떨어져만 간다는 생각이 든다.


컨셉이 딱 '자기 힘에 취한 초딩' 수준이었던 신드라나 도저히 캐릭터의 의미를 알 수 없는 퀸은 그렇다고 쳐도, '분노조절장애' 라는 게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어이 털리는 설정을 가지고 나온 나르나, 스타 2 울트라리스크의 잠복 돌진 하나 보고 베껴만든 듯한 렉사이, 기존 스토리를 이상하게 뜯어고치면서 나온 아지르까지. 점점 나오는 챔프나 스토리들이 이상해지고, 사람들이 좋아했던 리그 오브 레전드 본연의 색깔을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새대가리나 고양이는 대체 왜 출시한 건지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출시된 것이 이 뮤직 비디오. 아무무라는 매력적인 챔프의 스토리의 뼈대와 캐릭터성을 완벽히 살리면서 영상과 음악 컨텐츠로 살을 입힌 이 작품은 라이엇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 '캐릭터 본연의 매력' 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헷갈려 할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니, 가능한 쉬운 설명을 위해 현재 베타 테스트 중인 옆 동네 HOS,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과 비교해 보기로 하자.(이하 히오스, 롤로 통칭한다)


히오스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이 롤과 비교해서 가장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점 중 하나는 캐릭터성이였다.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라는 방대한 세계관과 스토리를 자랑하는 블리자드가 만드는 AOS 게임이라면, 각 게임의 가장 인기있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얼마든지 데려다 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디아블로, 짐 레이너, 아서스, 티리엘과 같은 초인기 캐릭터들이 출연한 시네마틱 트레일러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러나 실제로 히오스가 테스트에 들어간 지 오랜 기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히오스를 플레이하면서 가장 당황한 포인트 중 하나는 '생각보다 캐릭터성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스타크래프트에서의 짐 레이너는 물론 멋있었지만 히페리온의 그림자라고 주장하는 장판을 깔고 무빙하면서 평타질하는 마린 한마리를 보며 스2의 폭풍간지를 떠올리기는 어려웠고, 위엄 넘치던 디아블로가 쏴대는 W 불똥의 초라한 이펙트와 데미지를 보며 느꼈던 어이없음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결국 게임의 스토리란 어디까지나 게임의 재미를 서포트하기 위한 컨텐츠이고, 게임과의 활발한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스토리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 설령 해리 포터를 RPG 게임으로 만든다고 쳐도, 이름만 해리 포터인 마법사가 마왕 때려잡는 내용이라면 그 게임을 누가 할 것인가. '본질에 충실하라' 는 격언은 게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슬픈 미이라의 저주' 를 보고 롤 플레이어들이 감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매일 플레이하던 게임 속에서 울고 짜증내면서 정글몹을 잡고, 붕대를 던지고 저주를 폭발시켜 상대팀을 묶어버리던 작은 아무무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임의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듯 게임 내적인 이미지와 플레이를 잘 설명하고 받쳐 주면서, 캐릭터의 매력을 증폭시키는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다. 굳이 아무무가 어째서 미이라가 되었는지, 어째서 친구를 사귈 수 없는 저주를 받았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설정을 짤 필요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캐릭터 본연의 매력' 이기 때문이다.



<아무무가 왜 미라가 되었는지 몰라도, 매력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잡한 설정과 스토리가 아예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 데마시아와 녹서스, 아이오니아, 그림자 군도, 프렐요드 등 다채로운 지역들로 이루어진 발로란의 세계관은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고 스토리의 살을 붙이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고, 롤이라는 게임의 스토리에 통일성과 일관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보조에 그쳐야 할 설정과 스토리의 일관성에 집착해,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에 마구잡이로 손을 대는 최근 라이엇의 행보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다. (특히 제라스의 과거 스토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게임에서 캐릭터와 스토리의 관계는 하나가 아니다. 거대한 스토리 안에서 캐릭터를 만들고 완성시키는 게임(워크래프트 등)이 있는 반면, 하나하나의 캐릭터에 초점이 맞추어진 짧은 스토리가 포도송이처럼 엮여 있는 게임(LOL)도 있는 것이다. 조금 과하게 흩어진 감이 있는 캐릭터들의 스토리를 정리하고 다듬으려고 하는 라이엇의 태도에도 일리는 있지만, 형식적인 작업에 치중하여 캐릭터 본연의 매력이라는 본질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취미 > 게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게임 라이프에 대하여  (2) 2015.07.20
 

글쓰기의 어려움

잡설 | 2015. 1. 27. 00:15
Posted by 메가퍼세크

요새 블로그를 들어와 이것저것을 확인하다 보면, 항상 신경쓰이는 숫자가 있다.


블로그 우측 상단쯤에 표시되는 총 글의 개수가, 로그인하기 전에는 20개였다가 어드민으로 로그인하는 순간  29개로 급격히 늘어나는 것.


늘어난 9개의 글은 모두 비공개로, 주로 한창 쓰던 중 더 이상 이어갈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다 썼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너무 개판이어서 블로그에 걸어놓기가 민망할 정도인 것들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공개로 놓은 글들에 문제가 없냐고 한다면 그건 또 전혀 아니지만, 29개나 되는 글 중에서 거진 3분의 1이나 비공개라는 건 뭔가 내 글쓰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이 블로그를 만들기 전, 페이스북이나 다른 온라인 사이트에 가끔 글을 쓸 때부터 글쓰기라는 건 항상 오랜 시간과 생각과 고통, 그리고 노가다를 동반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글로 써보고 싶다' 고 생각하게 만드는 소재가 나타나야 하고, 그 소재로 인한 모티베이션이 키보드 앞에 앉는 시점까지 유지되어야 하며,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그 소재에 대한 생각과 재해석을 전개하고, 부족한 필력으로 그 상세한 내용을 남김없이 풀어내면서 제대로 된 글로서의 짜임새와 완결성, 결론까지 갖춰야 한다는 것.


매 과정 하나 하나가 성립되기 엄청나게 어려운 조건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특히 글의 표현과 짜임새에 있어서는 점점 높아져만 가는 스스로의 기준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떨어지는 문장력이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무더기로 발견되는 어색한 문장과 스펀지마냥 구멍이 숭숭 뚫린 논리 전개,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의 반의 반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미숙한 문장을 보면 그냥 컨트롤 A-딜리트를 눌러버리기 일쑤였다.


그나마 페이스북을 할 때는 아무래도 SNS라는 특성상 여러 사람들이 자유롭게 떠드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 상대적으로 쓰기 어려운 주제라도 상대적으로 덜 깊이 생각하고 부담없이 올릴 수 있었는데

(그 때도 4~5시간 잡아먹는 건 예사였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글들은 하루 안에 끝났다)


글이 너무 길어지고 SNS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가 반복되는 것을 보고 티스토리로 이사한 이후에는 오히려 '글을 쓰기 위해 만든 공간' 이라는 터무니 없는 부담감 때문에 글을 쓰는 모든 과정에서 적용되는 기준이 현저히 올라가 버렸다.


그 결과로 몇 시간씩 쓰다가도 스스로에게 절망감을 느끼고 팽개쳐 버리는 글들이 늘어났고, 그렇게 비공개로 돌려진 글들은 그 절망을 떨쳐낼 만큼의 새로운 모티베이션이 생길 때까지 그대로 수감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 좀 어렵다 싶은 주제로 시작한 글은 비공개 상태에서만 몇 달이 넘는 기간을 보내면서 대여섯 번이 넘는 갈아엎기와 가필을 거치고서도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다 보니 블로그의 글 수는 올라갈 기미가 없고, 일부러 열어놓은 블로그를 몇 달 동안 방치해두기도 뭐해서 차선책으로 한두 개씩 쓰기 시작한 과자나 음악 리뷰들은 어느새 블로그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해 버린 지 오래다.


정말 쓰고 싶었던 내용들은 검증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비공개로 돌려지고, 취미 겸 가벼운 흥미로 시작했던 리뷰들은 별다른 제지 없이 블로그를 점령하는 이 상황.


대체 몇 년이나 글을 더 쓰면,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을까.



'잡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유와 휴식에 대하여  (0) 2015.04.14
2,500히트 달성  (0) 2015.02.09
북한으로 배송된 후드 집업의 사연  (1) 2015.01.09
커피를 마시다 문득 든 생각.  (0) 2014.11.25
커피와 과자와 차  (0) 2014.11.13
 

'대성당들의 시대'-노트르담 드 파리

카테고리 없음 | 2015. 1. 22. 05:19
Posted by 메가퍼세크

고등학교 때, 매 학기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식 날까지 애매한 시간이 남았다.

진도는 끝났는데 수업일수를 뺄 수는 없는 터라 선생님들마다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때웠는데, 좀 괴짜였던 음악 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음악에 관련된 영화를 틀어 주셨다.


기억나는 이름은 shine, once, 노트르담 드 파리, 그리고 베토벤에 대한 어떤 영화.

대부분 길이도 상당히 길고, 스스로는 찾아보지도 않을 만큼 생소한 작품들이었는데 기묘하게도 대부분이 내 취향에 맞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게 봤던 건,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심각한 인상으로 분장한 배우들이 나와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노래를 불러대는데,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어로 부르는 노래가 하나같이 엄청나게 멋있었고,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 아래 펼쳐지는 스토리 전개도 전혀 어색하거나 오글거리지 않으며 오히려 웅장하며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극의 초반부에 시인이 혼자 나와 약간 느끼한 목소리로 부르는 곡에 완전히 꽂혀서, 단 한 번 들었을 뿐임에도 멜로디와 목소리가 뇌리에 박혀 거진 일 년간이나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나중에 극을 다시 보며 알게 된 곡의 이름은 'Le Temps des Cathédrales'. 

우리말 번역은 '대성당들의 시대' 라고 한다.

(원제는 '대성당의 시대' 라는 뜻이지만, 발음을 위해 고친 이름이라고)





그리고 더 나중에, 한창 음악에 빠져 좋은 곡들을 모으다가 이 곡의 한국어 버전 번안곡도 발견했다.




원곡이 너무 심각하게 좋기도 했고 번안곡의 한계도 있어서 완전히 만족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원곡의 포스와 분위기를 상당 부분 잘 살려냈으며, 가사를 직접 우리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 이 곡에도 한동안 엄청나게 빠졌었다. 원래 곡 하나에 빠지면 최소한 백 번이 넘게 들어대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이 두 곡에는 가장 오랜 기간동안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시적인 가사에 물 흐르듯 이어지는 멜로디,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 곡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내 취향이고 특히 원곡은 그 요소들을 경외감마저 느껴질 만큼 완벽히 소화해내서 듣고만 있어도 '정말 예술이다' 라는 느낌을 지금도 받는다. 그러고 보면 노래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번안곡을 직접 불러보려고 했다가 실패하고부터였던가. 참 여러 가지로 나에게는 의미깊은 노래다.


그리고, 이 노래를 다시 떠올려 글을 올리게 만든 아이유의 영어버전 커버.





발음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뭐 다 좋은데, 내 취향에는 조금 안 맞는 것 같다.

대체적인 평가가 좋은 걸 보면, 역시 아직은 내 안에 있는 원곡의 이미지가 너무 강한 듯.


 

북한으로 배송된 후드 집업의 사연

잡설 | 2015. 1. 9. 00:15
Posted by 메가퍼세크

12월 초, 평소처럼 인터넷을 돌다가 어딘가에서 제법 괜찮아 보이는 후드 집업 하나를 발견했다.






(출처: http://www.shermancarter.com/products/two-tone-zipper-cardigan-hooded-double-pockets-long-sleeve-cotton-men-sweatshirt)


어새신 크리드라는 게임 느낌의 자켓이라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괜찮은 후드 집업이 필요했기에 별 생각 없이 확 질러버렸다.


Free Shipping인 대신 배송이 오래 걸린다길래 그냥 잊어버리고 2~3주일 있으면 알아서 오겠거니 했는데, 어째 시킨 지 몇 주일이 지나도 배송확인 이메일 이후에 새로 오는 게 하나도 없어...


뭔가 불안해서 후드 집업을 구입한 홈페이지에 들어가 상품 번호를 쳐넣고 배송 추적을 했더니, 난생 처음 보는 결과가 나왔다.






중국어도 모르고 한자도 젬병이라 대부분의 정보는 쓰잘 데 없었지만, 대문짝만하게 쓰여진 North Korea 와 배송 이력에 쓰여진 조선, KP 까지는 읽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용했던 해외 배송 택배들의 경우에는 어김없이 KR이라는 코드가 적혀 있었는데, KP는 또 뭘까 궁금하여 인터넷을 뒤져 봤다.





...그렇다고 합니다.


내 소중한 택배가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으로 날아가 버렸다는 소리였다.


세상에 북한에도 택배 수취하는 곳이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에서 시작해서, 내 택배를 가로채 가 버리면 어떡하지? 자본주의 느낌이 충만해서 어차피 못 입고 다니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나름 따뜻해 보이니 원래 용도처럼 집 근처에서 입고 다니려나? 애초에 북한에 내 사이즈에 맞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까지 도달하고 나니, 슬슬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인터넷을 뒤져 보니 이런 배송 오류 자체는 가끔 일어나는 일인 듯 했다. 외국에서는 딱히 우리 나라에 관심이 없고, 북한이 여러 가지로 국제 사회에서 유명하다 보니 가끔 이렇게 오배송되는 일이 종종 있다고. 근데 아무리 그래도, 발송지가 우리 나라 코 앞인 중국인 데다 주소도 South Korea로 제대로 입력했는데도 이 따위 상황이란 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하다.


아무튼 이 이상한 상황을 하루빨리 해결하고 후드 집업을 받기 위해, 구매처에 문의를 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기업인 거 같지만 어차피 중국어는 알지도 못하니 영어로, 영어도 프리토킹 따위는 꿈도 못 꾸는 저질 중의 저질이니 그나마 좀 나을 것 같은 메일 문의로. 어학 실력 때문에 문의 방법이 정해진다는 것도 참 슬픈 일이다.


그 후부터는 안 되는 영어 실력을 쥐어짜낸 고객 센터와의 사투의 연속.





: 12/12일에 너네 사이트에서 후드 재킷을 주문했고, 내 구매 정보는 이렇다.

근데 17track에서 배송 체크해보니까 내 택배가 북한으로 가고 있네?

가능한 빨리 체크하고 조치좀.


센터:? 니 택배는 아직 배달중이고, 정해진 배송 기간이 아직 안 지났음. 그 택배가 다른 나라에 잠시 배송 중 상태로 머물다가, 너네 나라로 갈 수도 있음.


: 아니 시발. 내가 중국 우정 많이 써봤다고.

근데 난 지금까지 배송 과정 중에 "Destination Country" 가 노스 코리아인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배송 중에 잠깐 노스 코리아를 거쳐가는 거면 적어도 저건 싸우스 코리아로 돼 있어야 되는 거 아님?

(첨부 파일로 배송조회 결과를 첨부함)


센터:?? 니 택배는 아직 배달중이고, 2주 안에 배달될 것임. 2주 지나서도 안 도착하면 우리한테 연락해. 그럼 우리가 재배송하거나 환불해줌.


(며칠 후): 12/22일부터 내 택배가 계속 북한에 짱박혀있는 걸로 보이는데.

너네가 전에 지껄인 대로 2주 지났으니 내 택배를 빨리 재발송해줘.


그리고 내가 알아본 바로는 택배 회사가 노스 코리아랑 사우스 코리아를 잘 구분 못하는 경우가 많다던데, 대충 그런 경우인 거 같으니까 전화 좀 해보는 게 좋을 거 같다.


센터: 그렇군! 우리가 실수로 사우스 코리아 대신 노스 코리아로 보냈구나. 추가 비용 없이 제대로 된 주소로 재배송 해 주겠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당신 주소는 이건데 확인하고 맞으면 답장좀.


: ㅇㅇ 맞음


센터: 당신한테 보낼 택배 이미 새로 싸놨고 배송 번호 받으려고 대기중임. 이거 배송 정보 뜨면 바로 다시 메일 보내겠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





대충 이런 흐름으로, 배송 문제가 모두 해결된 건 그저께 아침. 고객 센터는 그럭저럭 대답도 빠르고 나름대로 친절한 것 같은데, 내 괴멸적인 영어 실력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잡아먹은 것 같다. 혹시 나와 비슷한 문제로 이 글을 보시는 분이 있다면, 고객 센터에 문의할 때 "택배 회사가 북한과 남한을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는 사실을 고객 센터에 납득시키는 데 중점을 두는 게 좋을 듯.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분단 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깨닫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잡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0히트 달성  (0) 2015.02.09
글쓰기의 어려움  (0) 2015.01.27
커피를 마시다 문득 든 생각.  (0) 2014.11.25
커피와 과자와 차  (0) 2014.11.13
어떤 노래 찾기  (1) 2014.07.19
 

블로그 이미지

메가퍼세크

왠지 모르게 말하고 싶어진 것들을 쌓아두는 곳.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8)
자아성찰 (13)
취미 (31)
경험 (4)
잡설 (14)
보관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