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킹 배드 후기 (스포)
최근에 브레이킹 배드를 정주행했다. 최고의 드라마라는 평가처럼 짜임새도 좋고 인상적인 장면도 많았지만, 동시에 여러모로 보기 불편한 작품이기도 했다. 드라마의 특성상 보편적 윤리 따위는 집어치우고 별의 별 방식과 가치관으로 행동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나오는데, 그들을 보며 느껴지는 혐오감과 상대적 만족감 같은 감정들은 나 스스로의 윤리적 기준에 대한 깊은 질문으로 발전되곤 했다. 어딘가에서 이 작품이 일종의 "로르샤흐 테스트" 라는 말이 있었는데, 굉장히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를 정주행하는 동안 여러 질문과 답변을 던지면서 내 윤리와 사고방식이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지를 여러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었고, 그 결과를 여기에 정리해 둘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스포일러 포함.
이 시리즈에서 내가 혐오감을 느낀 인물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 가장 강렬했던 것은 제시였다. 이 드라마의 초반 몇 시즌은 제시가 저지른 바보같은 일과 그에 대한 월터의 수습이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했고, 그 후에도 내 관점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수없이 많았다. 물론 제시의 행동 중 단순히 본인의 판단 능력 부족이나 실수에 의해 벌어진 일들도 많은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삼고 싶지 않다. 사람의 능력은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아무리 조심해도 실수는 할 수 있는 거니까. 진짜 문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한 노력이나 결과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고, 그 결과를 직시하고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시가 저지른 수많은 바보같은 행동들은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끝없이 손실과 위험을 가져왔지만, 제시는 그것들에 대해 사과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자기합리화와 공격적인 반응으로 대응한다. 감정은 진하지만, 책임은 희박하다. 월터가 리스크와 책임을 뒤집어쓰고 그의 행동들을 수습하고 배려하고 도와주어도, 그가 그것에 대해 고마워하거나 보답한 것은 손에 꼽는다. 극중 상당 기간 동안 제시는 사실상 나이만 먹은 청소년에 가까웠고, 월터나 마이크 같은 보호자가 없으면 무책임하고 바보같은 짓만 저지르는 살아있는 위험 덩어리일 뿐이었다.
단지 그가 본인의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싸여 원료를 팔고 마약 사업을 그만두려 한 것은 몇 안 되는 이해할 만한 행동이었지만, 그 이후에 자신의 도덕적 충격에만 집중해 돈을 아무데나 뿌리는 것 같은 생각 없는 행동을 일삼고, 월터가 브록에게 한 짓을 발견하자마자 맹목적인 복수심을 표출하며 원래의 느낌으로 돌아간다. 물론 아이를 이용한 것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행동이 맞고 그것이 제시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도 이해할 만 하지만 , 여전히 월터는 그의 목숨을 구하고 수많은 바보짓을 수습한 은인이었고 월터에게 생존을 위해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지, 그가 아이를 죽이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제시는 자신의 감정에만 100% 몰입해서 그에 대한 그 어떤 고찰도, 검증도 하지 않고 월터를 맹목적으로 공격하고 몰아붙였다. 물론 그가 월터에게 이용당했다는 배신감도 있었겠지만, 그에 대한 분노로 저지른 행동들은 다시 DEA 요원들에게 이용당하기만 했을 뿐 아닌가?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도 자기 관점에서의 오해만으로 월터를 다시 한 번 단정했고, 마지막 장면에서 월터가 자신의 목숨을 한번 더 구해주었을 때도 바로 월터에게 총을 겨누었다. 결국 끝까지 그는 인간적으로 극도로 미성숙했고, 자신의 트라우마와 애매한 윤리 의식에 휘둘리며 맹목적이고 아이같은 행동으로 여기저기에서 이용당하기만 했다. 이런 행보에 대해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여지는 있을지 몰라도, 내가 추구하고 싶은 가치에서는 가장 정반대에 가까운 존재라고 느꼈다. 스스로를 직시하고 통찰하며 성장하려 하지 않는 미숙한 행동은, 결국 자신의 행동에 대한 무책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스카일러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초기에 그녀는 월터를 위해 진정으로 노력했고, 월터 거짓말과 범죄를 알게 되었을 때 느꼈을 혐오와 공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거기서 생각을 멈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항상 생각하는 원칙 중 하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디까지나 사실에 대한 근사치일 뿐이며, 얼마든지 오차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록 내가 지금까지 느낀 것이 무언가에 대한 강한 인상을 만들었더라도 항상 “그것이 사실인가?”, “지금 보고 있는 단면이 전부인가?”, “내가 모르는 정보가 더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것이 완전히 틀렸을 수 있다는 불확실성을 열어둔 채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스카일러는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자신이 월터의 거짓말에 대해 느낀 감정을 아무 필터링 없이 그대로 때려박았고, 월터가 마약 딜러라는 단편적 사실을 확인한 시점에서 더 이상의 정보 획득이나 대화를 모두 단절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도덕적, 심리적 관점을 확정하며, 그 단정 위에서만 행동했다. 그 결과는 엇나간 도덕적 우월감과 자기기만, 비일관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월터를 쫓아내기 위해 바람을 피우고, 월터의 자금을 아무런 논의 없이 사용하고 (행크의 치료비와 테드의 세금 문제), 월터의 돈세탁과 여러 일들에 가담하면서도 스스로를 “인질”로 재정의하고 피해자 프레임에 안착했다. 월터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인식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지만, 월터가 행크의 일에 관련되었을 거라는 추측만으로 그 잘못된 일로 얻은 돈을 사용해야 한다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한 시점에서 그녀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런 행동들이 소시민적이고 평범한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관점에서는 이 또한 무책임과 자기기만, 자기합리화의 덩어리로만 느껴진다. “저 사람은 틀렸다”는 확신이 “그러니 저 사람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로 변질되는 순간, 윤리와 대화는 사라지고 자기연민과 아집에 빠진 위선자만이 남는다.
월터는 가장 흥미롭다. 그는 항상 계획을 세우고, 복잡한 변수를 통제하고, 상대의 반응을 예측하며, 필요한 자원을 정확히 배치한다. 이성적 역량만 보면 가장 우월한 편이다. 하지만 그 이성은 견고한 원칙 대신 자존심, 인정 욕구, 박탈감이라는 불안정한 동기 위에서 작동하며, 어떤 계기로 트리거가 눌리는 순간 정교한 계산은 순식간에 충동적 행동으로 대체된다. 그런 인간적인 단점들이 그를 입체적인 캐릭터로 만들지만 동시에 굉장한 혐오감도 불러일으킨다. 그는 그런 대단한 이성적 능력을 가지고 단지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자아를 세우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연료로써 불태웠으며, 그에 희생되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에는 급격히 무감각해졌다. 사실 이렇게 보면 극중에 나오는 여러 조직의 보스와 조직원들과도 크게 다를 바 없기도 하다. 그들 또한 본인 또는 조직의 이득이라는 확실한 동기와 목표의식이 있고, 그를 위해 비대한 자존심과 거만함, 과감한 행동이라는 방패로 스스로를 보호하며 그 과정에서 즉흥적이고 바보같은 일도 수없이 했다. 월터는 단지 그들 중 가장 능력있고, 감정적 단점도 크며, 극단적으로 비틀려 있는 인물일 뿐인 것 같다. 역으로 보면, 그렇기에 스스로를 직시하고 합리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며 솔직한 소통과 배려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구스타보는 내가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다. 그는 당연하게도 일반적인 기준에서 엄청난 악인이 확실하지만, “합리적 의사결정”이라는 기준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있다. 거스에게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분리되어 있고, 이성적 행동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의 거시적 목표인 복수는 철저히 감정적이지만, 그에 대한 실행은 거의 완벽하게 철두철미한 계산과 이성에만 의존한다. 상대의 입장과 행동, 반응을 미리 계산해서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지 않고, 필요한 행동은 군더더기 없이 실행하며, 상대의 감정까지 고려하여 필요하다면 공감과 관용 (처럼 보이는) 의 제스쳐까지 취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이 작품 속 다수의 인물이 감정과 이성을 서로 침범하게 내버려둔다면, 구스는 두 층을 분리하고 다른 인물들의 의사결정과 감정까지 모두 조망하며 최선의 행동을 취한다. 물론 그의 판단도 100% 완벽하지는 않았고 조금 남아있던 감정적 요소 때문에 결국 몰락하기도 했지만, 즉흥적이고 성급한 인물들이 넘쳐나는 이 시리즈에서 그의 판단력과 냉철함은 유독 돋보였다. 복수를 위해 인생을 바쳤다는 점에서 춘추시대의 오자서가 생각나기도 했다.
다른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다. 토드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라 평가가 무의미하고, 사울은 단순한 하청업자였다. 리디아는 겁이 많아서 역어로 모든 위험요소를 과격하게 제거하려다 역으로 위험을 키우는 결벽증 같은 타입이고, 제시의 친구들이나 제인은 의도와 책임이 얕은 즉흥적 인물이다. 테드는 성욕과 허영심에 취한 전형적인 바보이고. 이런 부류들은 너무 명백히 다른 유형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내 감정을 크게 자극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더 자주 불편하게 만든 건, 이성과 감정의 경계 위에서 계속 흔들리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바보같은 결정을 한 캐릭터들다. 위에 언급된 제시와 스카일러, 월터는 말할 것도 없고 마리의 도벽과 허언과 가벼운 입, 행크의 마초적 허세와 공격성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마지막 둘은 짜증스럽긴 해도 이 작품에서는 가장 “선에 가까운” 축에 속하기는 하겠지만, 스스로의 약함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추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시 좋은 반면교사가 된다.
그리고 작품 전반에서 가장 답답했던 것 중 하나는 거의 모든 인물이 보여주는 절망적인 수준의 의사소통이다. 공유해야 할 정보는 잘라서 던지고, 자존심 때문에 핵심을 숨기고, 상대의 맥락과 정서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건조한 사실만 들이밀거나 역으로 실질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순간에 자기 감정만 앞세운다.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고 지속적으로 사실을 확인하려 노력하는 대신 대부분의 대화가 부분적인 정보만으로 의심하고, 섣부르게 단정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이상한 의사소통이 감독의 의도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져 몰입이 깨질 정도였다. 실제로 미국의 특정 지역에서 저 정도 수준의 비효율적 커뮤니케이션이 흔하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선 좋은 반면교사가 되었다. 서로의 의도를 가능한 투명하게 전하고, 불확실성은 열린 채로 유지하며, 정서적 맥락을 먼저 확인하고, 그 다음에 사실을 다루는 것. 이런 기본만 지켜도 극중 파국의 절반 이상은 사라지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사실인지 추측인지를 혼동하는 순간, 의사소통의 근간은 무너지고 오해와 의심은 눈덩이처럼 굴러 파국을 만든다.
정리하면, 이 작품을 보며 내가 확인한 스스로의 원칙은 이렇다.
- 감정은 행동의 동기나 목표를 정할 때만 관여해야 하고, 구체적인 판단과 실행을 방해하는 필터로 작용해서는 안된다.
- 주관적인 감정과 인식은 언제나 근사치이며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인식과 뿌리깊은 감정을 가졌더라도, 그것이 틀린 인식에 의거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즉시 폐기하고 수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감정과 인식으로 누군가를 함부로 단정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
- 소통은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상호작용이어야 한다. 내가 원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목표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가능한 투명하게 소통해야 한다.
- 스스로의 감정과 기준을 끊임없이 직시하고 점검하며, 본인이 아집이나 자존심 등에 빠져있는지 진단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완전히 막기는 힘들지만, 그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 중 하나에 심각하게 빠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런 감정과 판단, 기준들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 글은 단지 내가 이런 장면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을 이렇게 해석해 이렇게 결론내렸다는 기록일 뿐이다. 언젠가 다시 보면 완전히 다른 감상을 느낄 수도 있겠지.
'취미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피니티 워 후기 (0) | 2018.04.30 |
|---|---|
| 수어사이드 스쿼드 후기 (0) | 2016.08.07 |
| Flipped 감상. (0) | 2015.09.06 |
| 위플래시 리뷰 (0) | 2015.04.24 |
| 킹스맨 리뷰(스포) (0) | 2015.03.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