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에 대하여' 를 읽고

취미/책 | 2020. 8. 18. 18:04
Posted by 메가퍼세크

 

평소 별 생각 없이 쓰는 개소리라는 단어에 대해, 철학적 차원에서 고찰한 특이한 책이다.

 

예전에 어떤 독서클럽에서 읽고 후기를 썼는데, 오랜만에 보니 괜찮아 보여서 여기에 보관해 둔다.

물론 평소처럼 스포일러 포함.

 

 

 

 

 

선동과 개소리의 위력

서점의 교양 코너에 있는 많은 책들의 도입부는 그 책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논의의 주제가 되는 단어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탐구하는 것은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며, 동시에 다루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이끌어내는 좋은 출발점이기도 하다.

목차가 필요없을 정도로 짧은 이 책의 전개도 그런 전형적인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분석의 대상이 되는 단어는 조금 독특하다. 개소리라는 일상적이고 친근한 단어는 얼핏 진지한 이야기의 주제로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책의 다면적이고 섬세한 분석은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많은 개념들을 파헤쳐 드러낸다.

비슷한 단어와의 비교, bull과 shit이라는 두 단어의 역사적, 의미적 고찰과 실제적 사용례 분석 등을 통해 저자가 최종적으로 내리는 결론은, 개소리라는 단어가 '진리값을 신경쓰지 않는 주장'을 의미한다는 것. 자신이 아는 진실을 고의로 왜곡해서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진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주장을 꾸며내는 것은 개소리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개소리는 진실에 연연하지 않는 특성 때문에 거짓말보다 큰 진실의 적이라고 말한다.

개소리에 대한 이 책의 정의에 따르면, 그 개념에 가장 잘 들어맞고 비슷한 단어는 아마 '선동'이 아닐까. 남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의 주장으로, 진실의 여부보다 설득력을 기준으로 구성된 선동의 개념은 책에서 이야기하는 개소리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멀게는 나치 독일에서부터 가깝게는 일베와 워마드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배타적인 집단들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신경쓰지 않는 이런 '선동적인' 개소리들이 힘을 발휘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준다는 점일 것이다. 히틀러는 1차 대전의 패배에 좌절한 독일인들에게 '우리는 잘 싸웠지만,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졌다' 는 말을 들려주어 인기를 얻었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지지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믿는 것이 자국과 자신의 무너진 자존심을 세워줄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고, 개소리에서 자존감을 공급받는 순간부터 그 말을 부정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진실에 신경써야 한다는 제약이 없으므로, 개소리로 묶인 집단의 사람들은 더 편하고 거리낌없이 자신이 믿는 것을 부르짖을 수도 있다.

반면 진실을 추구하는 길은 험난하다. 거의 모든 지식의 영역에서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한 분야에서 정립된 가장 정확한 진실을 깊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한 소수의 학자들뿐인 경우가 많다. 결국 일반인이 가급적 정확한 정보에 접근하려면 그 분야의 믿을만한 책이나 논문, 기사 등을 찾아보며 끊임없는 비판적 수용을 거쳐야 하고, 그렇게 얻은 지식마저도 회의주의에 따라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으므로 과도하게 맹신하거나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도 없다. 게다가 개소리를 믿을 때 얻을 수 있는 마음의 안식이나 자존감 같은 것은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둘의 싸움에서 승패는 명확하다. 소수의 전문가와 지식인들이 철저하게 검증해 조금씩 내놓은 진실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람들이 쉴새없이 늘어놓는 개소리에 파묻히기 마련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가짜 정보와 선동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어딘가에는 이 근본적인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만약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해도, 수많은 개소리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반드시 있다' 고 하면 개소리가 될 테니, '있었으면 한다' 정도로 끝내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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