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서점의 하고많은 코너들 중에서도, '자연과학'은 가장 한산한 코너들 중 하나일 것이다. 출판된 지 수십 년이 넘은 외국 석학의 책이 맨 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그 아래에는 십수년 쯤 된 국산 대중과학서가 있고,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초중고 대상 과학상식집이 빈 자리를 채우는 광경은 퇴적암의 지층을 연상하게 한다. 그나마 개중 괜찮은 책들을 보고 입문하게 된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곧 턱없이 부족한 바리에이션과 도통 들려오지 않는 신작 발매 소식에 진저리를 치다가 이윽고 흥미를 끊어 버리기 일쑤고, 안 그래도 좁은 과학책 시장은 날이 갈수록 더 좁아지기만 할 뿐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간만에 베스트셀러에 올라온 신작 과학책의 소식은, 기다림에 지쳐버린 소수의 과학 책 독자들에게는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고 할까. 응원하는 팀이 꼴찌를 전전하다가 큰맘먹고 영입한 특급 신인을 보는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책의 제목은 '세상 물정의 물리학'. 거시적 현상을 기술하는 통계물리학의 방법론을 이용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책이다. '세상물정' 이라는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서 묻어져 나오는 느낌과 같이, 목차에서는 서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서른 개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과학 콘서트', '하리하라의 과학 블로그' 같은 오래된 대중 과학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찌 보면 해묵은 구성이지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세상물정' 이라는 주제에는 딱 어울린다고 할까. 게다가 각 단원의 내용이 아주 독립된 것도 아니어서, 각 챕터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는 과정들에서는 충분한 일관성과 통일성이 느껴진다. 마치 주인공이 통계물리학이라는 무공을 가지고 여러 문제들과 싸우러 돌아다니는 무협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저자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었다. 과학이라는 하나의 렌즈로만 세상을 보는 많은 과학자들과 달리,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는 인문학적 감수성과 관점, 상상력 또한 엿볼 수 있었다. '진달래꽃' 을 통해 관계맺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사랑과 미움의 비대칭성을 통해 인간 관계의 특성을 분석하며, 교육과 기대 소득의 관계를 통해 사회 구조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다양한 분야들을 아우르는 저자의 통찰이 느껴졌다. 한 부분에만 열중하지 않고 자연의 거시적인 부분을 조망하는 통계물리학자로서의 능력일까.
대중에게 외면받고 오랜 침체기에 빠져 있는 우리나라의 과학책 시장에서, 이 책의 성공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하나의 활력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과학자들만이 느끼는 무언가를 대중의 언어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책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로 포스팅을 마치겠다.
"물론 이러한 '궁극의 이론'을 알게 된다고 해서 물리학자들의 할 일이 더 이상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알파벳들을 제대로 알게 되면 이제 '자연의 시'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인류의 시' 를 쓸 일이다. 아래로 내려가 드디어 우리가 단단한 땅 위에 섰다면, 이제는 눈을 들어 저 하늘로 오를 일이다. 통계물리학은 바로 그 사다리다. 물론 사다리의 길이가 무한대라 문제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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