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 와 잔혹 동시집 사태에 대한 생각
몇 주 전에 위플래쉬를 보고 리뷰 하나를 휘갈겼는데, 영 뒷맛이 좋지 않았다. 필력의 한계인지 표현력의 한계인지, 내가 느꼈던 복잡한 기분을 거의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그동안 여러 가지로 많은 노력을 했고, 그 결과로 조금이나마 더 숙성되고 다듬어진 내 생각들을 다시 한 번 여기에 정리해 보려 한다.
'가르친다' 는 것은 무엇일까?
교육, 훈련, 훈육. 다양한 종류의 가르침을 일컫는 많은 말들이 있지만, 모두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킨다' 는 뜻을 담고 있다. 자잘한 단어의 뉘앙스 차이는 주로 그 변화가 어떤 면에서 일어나는지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변화는 보통 크게 두 가지, 기능적 변화와 인간적 변화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기능적 가르침은, 주로 '훈련' 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훈련을 주도하는 사람은 총을 쏘거나, 못을 박거나, 음식을 만드는 것과 같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기술들을 높은 수준으로 익히고 있고, 그런 기능들을 훈련받는 사람에게 전수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서로의 합의에 기반하며, 일종의 거래로 생각할 수 있다.
반면 '교육' 이나 '훈육' 같은 단어로 일컫는 인성적 가르침은 좀 더 복잡하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무언가의 방법을 통해 교육자가 교육받는 사람의 정신세계에 고의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이다. 예컨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조금 더 생각하게 된다던가, 함부로 물건을 부수지 않는다던가 하는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인성적 변화를 주는 가르침의 복잡함은, 그 가르침의 당위성을 판단할 때 드러난다.
어떤 가르침이 '당위를 가진다' 고 표현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두 입장에서의 만족도를 생각할 수 있다.(앞으로 편의상 '스승' 과 '제자' 로 통칭한다) 스승과 제자가 모두 가르침을 주고 받고자 하는 의사가 있고, 그 과정과 결과에 만족한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결과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있기에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헬스 트레이너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트레이너의 제자는 자신의 몸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키고자 하는 큰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트레이너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여러 가르침을 받는다, 이 가르침은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운동의 방법을 배우는 것만을 이야기하겠지만, 많은 트레이너들은 제자가 덤벨을 더 이상 들 수 없다고 할 때 한두 번 더 시키는 것처럼, 기능적인 가르침의 영역을 벗어나곤 한다. 이는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제자의 의사를 거슬러 가르침을 강요하는 행동이지만, 보통 여기에 불평을 표하는 제자는 거의 없다. '자신의 몸을 변화시킨다' 는, 조금 더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위플래쉬의 플래처 교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비인간적인 긴장과 인간적 모욕, 체벌이라는 매우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교육을 시행했다.
모욕을 당한 제자 한 명이 자살하는 등 그의 교육의 부작용은 매우 컸지만, 사실 기본적인 구도는 위의 예시와 그렇게 다를 것이 없다. 교육의 장기적인 목적은 '명 연주자의 양성' 이고, 그것을 위해 제자에 대한 체벌, 인격 모독, 고압적인 분위기 등을 활용해 정신적 충격을 주어, 그 반동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극단적이고 도박적인 방법은 맞지만, 본질적으로 틀린 방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국 두 예시 모두 시간에 따라 제자의 정신 상태가 변하는 가르침의 과정이고, 헬스 트레이너의 사례에서 중간 과정보다 마지막에 다다른 제자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여기에서도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플래처의 방법이 정말로 명연주자를 양성할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는 그 방법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너무 과할 만큼 강하게 시행했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있겠지만.
또한 얼마 전에 일어났던 잔혹 동시집 사태도 이런 프레임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 특정한 인성적 가르침을 단계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된 관습이고, 여러 가지 이유로 당연시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항상 밝고 명랑하고 선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의 근거는 어디에도 없고, 단지 보편적인 고정관념이었을 뿐이다. 어린이들의 정신세계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확연히 달랐고, 이전의 관념과 대비되는 잔혹함도 충분히 들어 있었다.
물론 어린이들의 그런 면들이 소름끼친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런 부분이 빼놓을 수 없는 아이들의 진짜 '동심'의 일부분이라면, 어른들에게는 교육을 통해 그것을 왜곡시킬 권리가 있는 것일까? 이는 정말로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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